166화
“아아, 어찌된 건지 알겠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제현 그룹이 아니라 그 외에 제현 그룹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이들일 겁니다.”
“네?”
강현의 말에 카랄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실질적으로 제현 그룹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에 그 자신들에게 올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겁니다.”
제현 그룹 뒤에는 강현이 있다. 국제 통화의 조율 기준인 RP 시스템을 만든 남자, 여러 특허로 무지막지만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남자. 돈에 별다른 미련이 없는 그는 제현 그룹이 투자 좀 해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해줄 것이다. 그 자금력 앞에 제현 그룹을 무너뜨릴 수 있는 대기업은 없었다. 일반적인 기업이라고 해도 무너뜨리기 위해선 보통이 아닌 노력이 필요한데 건실한 제현 그룹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카랄니는 그의 말에 더욱 아리송했다.
양자 통신 기술, IAPP 충격 완충 기술 및 방탄 기술 등 돈 되는 기술 특허는 물론이고 전략 물자 기술의 핵심을 강현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제현 그룹을 공격한다? 아무리 강현이 한국 제현 그룹의 흥망성쇠에 별다른 미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해를 최소화 한다니요? 지금 같이 인재가 유출될 정도라면 기업 문화를 혁신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그의 말에 강현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단지 대기업이 아닙니다. 재벌이죠.”
그들은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다. 단순한 기업인이었다면 카랄니처럼 제현 그룹에 맞상대할 수 있도록 기업을 구조조정하고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 옳다.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기업인이 아니다. 기득권이자 하나의 정치 세력이자 권력자다. 그들에게 자신의 아성을 무너뜨릴 혁신과 개혁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들의 선택은 자연히 경쟁을 위한 개혁보다는 현상 유지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면 기꺼이 굴종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제현 그룹의 생태와 본질은 재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제현 그룹 앞에 무릎을 꿇는다?
같은 재벌에게 굴복하는 것이 그나마 나았다. 적어도 재벌이란 지배구조를 무너뜨리지 않아 손해는 좀 보겠지만 기득권은 잃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재벌이 아닌 제현 그룹에게 굴복하는 것은 재벌 중심의 지배구조가 붕괴하는 것을 뜻한다. 제현 그룹에게 굴복하는 순간 그들의 기업 문화가 혁신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이 지배하는 기업을 뿌리채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식으로 재벌 지배구조가 붕괴하는 것은 쿠데타에도 살아남아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재기할 수 없는 치명타였다.
그들이 권력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 제현 그룹식 고용 시스템이 일반적이 되면 어떻게 될까? 생활을 위해 허덕이지 않고 자신을 위해 혹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는 곧 건강한 시민 사회의 근간이 될 것이다. 고로 시민 사회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시민 사회가 형성되면 정의를 논할 것이다. 해묵은 역사 문제를 정리하려고 할 것이다. 그건 친일 매국 세력의 잔재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나라를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였다.
저 새끼 증조 할아버지가 친일파였데.
그런 손가락질을 당하는 풍조에서 어찌 자식 새끼들을 키울 수 있을까?
“제현 그룹의 기업 문화는 그들에게 위협적이죠. 그래서 전파를 막기 위해 결탁한 언론을 통해 그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일반 국민들에게 퍼지는 건 막거나 늦출 수는 있거든요.”
세계 악덕 기업 3위의 위업을 달성한 샘성. 하지만 일반인은 잘 모른다. 왜냐면 주류 언론에서 절대로 내보낼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의 지성은 상식 이하이며 대부분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결코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 진실을 확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근본적인 원인 해결이 안되지 않습니까?”
카랄니의 말 대로다. 그들의 노력은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효과가 떨어지고 무효가 될 것이다. 사람의 입이 괜히 있겠는가? 사원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과 지역 사회의 사람들의 홍보효과는 주류 언론의 짓거리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좋을 건 결국 퍼지게 되어 있다.
“그렇죠. 그래서 제현 그룹에게 한 방 먹일려고 할 겁니다. 기업계에서 대응하기에는 제현 그룹이 견고하니 아마 정치권을 통해서 괴롭히겠죠. 방법은 많습니다. 세무조사, 간첩조작, 증거조작, 판검사 매수 등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치졸하고 더러운 방법을 동원할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카랄니는 강현의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강현을 배경으로 둔 제현 그룹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카랄니는 기업인이니 잘 모를 수도 있죠. 하지만 재벌은 기업인일 뿐만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의 권력 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잘 기억해 두세요.”
권력자의 발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북쪽의 김씨 왕조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인권을 유린하는가? 푸틴의 방사능 홍차는 어떻고?
비단 북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남쪽에도 돈과 권력으로 자식들의 범죄를 가리기 위해 피해자의 권리와 인권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는 권력자들이 있다.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 가진 모든 영향력을 사용해 발악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니 몰락의 원흉이 될 제현 그룹에 이를 갈지 않을 권력자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흐음.. 따로 첩보망을 구성할 필요가 있겠군요. 전직 형사나 정치사회부 기자같이 그쪽 생리에 밝은 사람들로 구성된 이들을 통해서 방어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관대우가 남아있는 법조계의 인사를 영입하는 건데 그건 하실 생각이 없죠?”
잡음 없이 살기 위해서는 두루두루 원만하게 살면된다. 정경 유착, 법조 비리가 기업을 부드럽게 운영하는데 필수적이라면 적당히 타협하여 제현 그룹에 일어나는 견제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강현의 물음에 카랄니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이죠. 그런 식으로 회사를 경영하려고 했다면 제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카랄니는 그가 고수하던 ‘사람 경영’ 때문에 주주들에게 쫓겨난 경영자다. 그런 사람이 비리의 온상이고 법상식을 벗어난 전관 예우 따위에 기대려고 할 리가 없었다. 법조계와 유착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박사님은 연구하느라 바쁘실텐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십니까?”
카랄니의 물음에 강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다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 열심히 조사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거기에 정치권과 권력자들의 이해 관계에 얽혀 쌓은 경험도 적잖았다.
“원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되더군요.”
카랄니는 그의 씁쓸한 표정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는 세계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거인이었다. 유대 자본과의 일도 그렇고, 미 정부와의 관계도 그렇고, 세계를 주무르는 이들과 어떤 일이 없다면 이상할 일이다.
“아무튼 제가 아즈삭을 통해서 그룹의 방첩 역량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정보를 지원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카랄니는 강현과 고마움을 담은 악수를 나누고는 돌아갔다. 강현은 샐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룸 서비스로 식사를 하고는 잠든 준의 얼굴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 =
강현의 일정은 단순했다. 부모님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을 방문한 이후 어릴 적 자신이 있던 시설의 원장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바쁜 일정은 아니다. 하루에 하나씩만 해도 되도록 휴가 일자를 여유롭게 잡았다.
“여기가..”
샐리는 처음 맞아보는 향내에 엄숙한 곳에 왔음을 알아차렸다. 분향소에서 붉은 점이 끝에 붙은 향이 하얀 연기를 길게 흘리고 있었다.
“이쪽이야.”
강현이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준은 생소한 분위기와 향기가 도는 장소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두 개의 단지 앞에 도착했다.
“준아. 할아버지 할머니야.”
강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사람의 형상도 아닌 단지를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기엔 준은 너무 어렸다. 알려고 해도 몇 살 더 먹어야 이해를 할 것이다.
강현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샐리 역시 남편을 따라 두 눈을 감았다.
강현은 잠시 추억에 젖었다가 눈을 떴다.
“이제 그만 가자.”
“네? 벌써요?”
샐리는 놀랐다. 시간을 내서 차를 타고 왔으면서 고작 눈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끝이라니..
“어차피 두 분은 여기에 없어. 있는 건 행복했던 추억의 상징 뿐이야.”
“....”
샐리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남편의 심정이 괴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립지만 괴롭진 않다. 인간의 짧은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그에게 부모님과의 이별은 너무나 빨랐지만 언젠간 맞이해야 할 일이었다. 우주는 언제나 인간의 인지를 초월해 존재에 있었고 인간의 존재는 잠시 번뜩이는 깜부기 불 정도였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애도해 주는 샐리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얼굴 펴. 슬픈 추억은 아니니까.”
“슬프지 않아요?”
“이미 충분히 슬퍼했어. 남은 건 그리움 뿐이야.”
그게 더 슬퍼요. 샐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준아. 그럼 갈까?”
“끄아! 꺄~아!”
준의 재롱에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렸다. 강현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은 원장님을 만나러 갈 생각이라 오늘은 여유가 넘쳤다. 그런데 다시 호텔이라니.. 사실 출장은 경험이 좀 있기는 하지만 여행은 경험이 없었다. 오후에 뭘 해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자신은 머릿속으로 뭔가를 할 수 있지만 샐리는 무척이나 지루할 것이다. 뭔가 시간을 보낼 것이 필요하지만 이런 쪽으로 뭐가 좋은지 경험이 없는 그는 결국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저기 최혜영 씨?”
호텔 로비로 내려온 강현이 부른 사람은 비서실에서 나온 카날리의 비서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특별히 강현과 그 가족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항시 대기하는 건 지루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네, 박사님. 뭔가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서 아내가 좀 심심한 것 같아요. 뭔가 시간을 보낼 일이 있을까요?”
“아! 그러세요? 혹시 아내 분이 쇼핑을 좋아하시나요?”
“어...”
강현은 문득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내가 쇼핑을 좋아했던가? 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강현은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평생 자신의 곁에 있어줄 사람에게 이리도 관심이 없었다니..
“어.. 그러니까.. 물어보고 올게요.”
강현의 얼굴이 빨게졌다.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박사님. 굳이 물어보실 필요가 없으세요.”
“네? 왜요?”
“쇼핑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답니다.”
“정말요?”
“네. 그렇고 말구요.”
최혜영은 확신했다. 여자는 쇼핑을 좋아한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든 아니면 가족을 위해서든 쇼핑은 여성의 로망이자 생활이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준비가 완료되는 데로 연락을 드릴테니 그동안 푹 쉬세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혜영은 그런 강현의 모습에 샐리 클린턴이 부러웠다. 능력있고 자상한데다가 귀여운 맛도 있고 젊었다. 게다가 여성을 배려하는 눈치도 좀 있는 것이 연애할 맛이 있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