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왜냐면 여객선 운영 회사들이 가장 골치를 먹는 이유가 바로 연료다. 강현으로 인해 사실상 석유 무제한의 시대가 열렸지만 운영 비용 중 가장 많이 소모하는 것이 연료라는 사실은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플라즈마 제트 엔진이 상용화 된다면 CNT 시트로 거대한 비행기 동체를 만든다는 계획은 접을 수 있다. 사실상 연료보다 전기로 돌아가는 이상 연료는 더 이상 그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기에 노동 집약적인 CNT 시트 적용은 큰 이득이 없었다.
그걸 강현이 가져와서 써먹는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CNT 시트로 만들어진 동체가 대기권, 열권에서 견딜 수 있게 하려면 내열 설계를 또 따로 해야 한다는 애로사항이 있었다.
“역시 우주선 동체 설계는 복잡하네.”
소재 선정부터가 골치다. 강현이 괜히 발사체 제작에 NASA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다. 가볍고 튼튼하며 열에 강한 소재에서 NASA가 세계적으로 앞서고 있는 것이다.
“그럼 패러글라이딩은 근 시일에 가능한 설계고 가변익은 나중에 기술이 더 축적되면 가능한 기술이라는 뜻이군.”
강현은 수긍했다. 지금 당장은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 방법을 바로 쓸 수 있지만 나중이 되면 가변익을 이용한 매스 드라이버용 우주선이 등장할 것이다. 기술적으로 패러글라이딩보다 몇 배나 어렵고 제약 조건도 많지만 우주선이 즉시 비행기가 될 수 있다는 이점은 말로 할 수 없는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우주 도시를 중심으로한 운항 노선에 유연함이 부여되는 것은 물론이고 차후 우주 도시와 매스 드라이버가 늘어날수록 지상과의 연계가 중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레이 씨에게 또 말을 해야겠네.”
강현의 도움 요청을 받은 이레이가 우주선 동체 제작에 노하우가 있는 연구원들을 소개해 줄 것이란 건 너무나 당연했다. 강현과 NASA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즈삭. 그럼 일단은 두 가지 버전을 다 만들어보자. 가변익 기술은 펜타곤의 도움도 좀 받아야겠어.”
F-14기를 설계한 그루먼 사에 직접 연결하는 건 귀찮다. 직접적인 접촉은 의견 조율이나 미팅 따위로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 물론 그만한 기대 수익을 창출할 수도 있겠지만 강현에게 금전적 이득은 이미 소용없었다.
할렌에게 우주선에 접목할 가변익 기술을 부탁해서 조율하면 귀찮은 라이센스 계약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고 아들 준의 얼굴을 볼 시간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은근히 팔불출 끼가 있는 강현이었다.
“우쭈쭈! 엄마랑 재밌게 지내고 있었어요?”
“우마마! 끄아!”
점심 식사 시간을 칼같이 맞춰서 나온 강현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부엌이 아니라 아들인 준이었다. 부엌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지만 배고픈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여보, 식사해요. 준도 맘마 먹어야지.”
“마! 마마!”
강현은 아쉬운 얼굴로 아들을 넘겨주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샐리는 맞은 편에 앉아서 준에게 젖병을 물렸다. 강현은 한 입 먹고 정면을 보고 한 입 먹고 정면을 보는 걸 반복했다.
“왜 그래요?”
“아니, 그냥. 이런 종류의 행복도 있구나 해서.”
“풋!”
강현의 솔직한 대답에 샐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얼버무리는 걸 잘 못하는 강현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저런 솔직한 점도 좋아서 그에게 매달렸던 것 아닌가?
강현은 웃은 샐리의 품안에 안겨 젖병을 빠는 준의 모습을 보고는 감동했다. 연구를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또 다른 보람이다. 샐리와 결혼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니 샐리가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았다면 이런 행복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행운이었다.
그의 머리에 잠시 제시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인간들도 많았지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인생에 얼마 안되는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소중한 사람들.. 강현은 문득 어린 시절 지냈던 시설의 원장님이 생각났다. 세상 다 산 듯 염세적이었지만 그래도 당시 자신을 찾아오던 다른 어른들에 비하면 양반이나 다름 없던 유일하다면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 많은 어른들이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탐욕을 부렸는데 오히려 그 사람은 자신의 천재성에 별다른 탐욕이나 강현이 싫어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난도 치고 농담도 하고 자신을 평범한 어린애 취급을 했다. 자폐증을 앓았던 잔재 때문에 관심 분야 이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강현은 다시 포크로 음식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원장 선생님의 근황이 요즘에는 어떤지 호기심이 생겼다.
알아보는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제현 그룹에 아직 자신의 영향력이 남아있기에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 사람 한 명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자 통신 기술의 사용화로 이젠 실시간 화상 통화가 일상이 된 세상이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직접 만나야 그 사람의 분위기나 뉘앙스 등을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원장님이 미국에 오거나 자신이 한국에 가야한다.
‘한국이라..’
그러고보니 부모님의 유골을 모신 납골당에 가지 않은지 오래됐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강현이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유골이 의미가 없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사랑했고 또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들. 소중하고 행복했던 추억의 상징이었다.
“샐리, 한국에 한 번 가보지 않을래?”
“한국에요?”
“응. 부모님께 준을 보여주고 싶어.”
“아! 알았어요.”
강현의 말에 샐리는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남편의 태도도 그래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평소 자신이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남편에 대해서는 뭐든 아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탓이 아니다. 가족이 생기고 아들이 생긴 강현은 샐리가 푹 빠져들었을 때의 강현과 달랐다. 좀 더 성숙해지고 책임감이 생겼으니 세상만사가 잠재적인 귀찮음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던 젊었을 적과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건 당연했다. 환경과 조건이 변하면 사람의 행태도 바뀌는 것이다.
= = = = =
강현이 한국에 온다!
비록 개인적인 용무로 잠시 오는 것 뿐이지만 세기의 천재로 한국인의 자부심이자 유대 자본을 뭉게 세계적인 영향력을 증명한 유력자가 한국에 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어떻게 어디로 말이 세어나갔는지 언론에 특종으로 퍼지면서 강현의 부탁을 받은 한국 제현 그룹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세어나간 건가? 아니면 미국에서 세어나간 건가?
아마 비행기표 예약 때문에(미국-한국 노선은 아무래도 한국 항공사가 편리했다.) 입으로 사실이 전달된 것 같은데 덕분에 제현 그룹의 비서실에서는 부랴부랴 강현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 공항 운영팀은 물론 관공서에도 문의를 했다.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극히 싫어하는 강현에게 파파라치처럼, 아니 그보다 못한 한국 기자들의 저글링 러쉬는 악몽이나 다름 없을 터. 거기에 가족들과 같이 들어온다고 하니 그 소란 와중에 아기가 울기라도 하면 천재의 기분은 엉망이 될 것이다.
가장 단순하면서 확실한 방법은 보디가드들을 한 500여명 정도 고용해 기자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지만 그런 요란을 떠는 것도 강현의 취향은 아닌듯해서 입국 절차와 심사를 따로 받도록 공항 운영팀과 관공서의 허락과 편의 받기로 한 것이다.
강현이 비록 지금 대주주의 자리로 물러났지만 사실상 제현 그룹의 창립자나 다름없고 현재의 CEO인 카랄니 킴이 강현을 여전히 고용주로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현을 극진히 모시라는 엄명이 내려져 있었다. 고로 강현을 접대할 비서실은 신경을 극도로 날카롭게 긴장시켜 세세한 부분부분을 모두 체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번거롭고 혼잡한 것을 싫어하는 강현의 성정 역시 고려 대상이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전세기로 인천 공항에 착륙한 강현과 샐리는 품안에 준을 안아들고 일반적인 게이트가 아니라 따로 준비된 장소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몰래 다른 출구로 나와 외관은 전혀 VIP를 모시는 것 같지 않지만 내부는 VIP 용으로 개조되어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타고 준비된 호텔로 향했다.
“....”
귀찮은 기자들을 상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강현은 흡족했지만 샐리의 마음을 달랐다. 마치 범죄자처럼 몰래 다니는 상황에 자존심이 상했다.
강현은 그런 그녀의 기분을 느끼고는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행동을 하니까 기분이 안좋아요.”
“나도 그래. 하지만 어쩌겠어? 기자란 인종이 원래 그런 인간들인데..”
“미국에서는 이런 일 없었잖아요.”
“그 사람들은 나한테 호되게 당해본 적이 있잖아.”
무려 100억 달러 규모의 소송을 당하고 유대 자본과의 신경전에 틈바구니에 껴서는 아랍 자본에 경영권이 위협받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무슨 말이 오갔는지 터번 두른 아랍계 앵커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나라의 언론사들은 그걸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을까요?”
“글쎄..”
강현은 쓰게 웃었다.
한국의 언론사들은 바보가 아니다. 미국에서 강현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그의 우군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것이 집중되는 미국이니 만큼 다양한 유형의 유력가들이 있었고 강현은 그런 그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도 강현의 힘을 이용했으니 훌륭한 Win-Win 전략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한국의 기득권은 강현을 매우 싫어하며 튼튼하게 뭉쳐있다. 정재계 언론이 혼맥, 인맥, 이해관계로 탄탄하게 묶여있었고 거기에 포함되기에는 강현은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물론 강현이 그런 카르텔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기도 했다.
기껏 강현의 편이 되어줄 세력이라고는 제현 그룹과 세컨드 밴드 뿐인데 그것도 사실 대한민국 주류에서 배척당한 경계인들을 미국의 영향력과 돈의 힘으로 억지로 박아넣은 것 뿐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이 두 기업의 성공과 약진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질시와 경계를 사 그들간의 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말았고 더불어 쿠데타를 유도해 극심한 혼란을 주도한 강현을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금이라도 강현을 괴롭힐 수 있다면 기자들을 개 떼 같이 보낼 주류 언론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언론을 응징할 방법은 실질적으론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하는 방법 뿐이다.
명예훼손이라는 훌륭한 전가의 보도가 있으니 주한 미 대사관에 부탁 좀 해 놓고 소송을 걸면 파파라치 떼 같은 기자들 정도는 충분히 떼어낼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미련이 없는 곳, 괜히 꿀도 생산 못하는 벌통을 쑤실 필요는 없었다.
강현은 그런 복잡한 이해관계를 샐리에게 다 일일이 설명을 해주진 않았다. 현상의 추잡한 이면을 아름다운 아내에게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
샐리는 강현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은 미소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