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학의 군림자-128화 (128/241)

128화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혐오는 혐오, 실리는 실리. 혐오주의가 꽃핀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이스라엘 건설에 방해가 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전에 이들은 이스라엘을 완성할 자신이 있었고 그런 연후에는 얼마든지 그런 비난 여론을 가라앉힐 시간과 능력이 있었다. 세계는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그 자본주의의 흐름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제 설득은 실패군요.]

“미안하지만 그렇다네.”

[뭐, 저도 최선을 다해서 설득했으니 마리아 씨에게 할 말은 생겼으니까 괜찮습니다.]

“딸애 때문에 미안하게 됐네.”

[아니요, 괜히 다른 사람 일에 간섭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죠. 그럼 이만. 잘 지내세요.]

“자네도.”

둘의 통화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헨델은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일은 강현에게는 ‘남의 일’인 것이다.

= = = = =

통화를 마친 강현은 기묘한 불쾌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헨델 회장과의 대화를 차근차근 곱씹으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자신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헨델 회장과 시오니스트들이 가진 민족주의적인 사상(선민사상은 제외하고서라도)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입장을 정할 수가 없다. 민족주의의 반대는 반민족주의, 혹은 매국이지 흑인이니 백인이니 따지는 것에 관심이 없는 그를 민족주의의 반대자라고 할 수 없었다.

수학적으로 강현의 입장은 더욱 간결하게 표현된다. A, B, C로 구성된 입장의 집함이 있다. 그 중에 A의 반대는 무엇일까? B일까? C일까? 아니다 -A다. 강현의 입장은 -A가 아니라 A 자체가 없는 B, C라고 할 수 있다. 즉, 강현은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이에는 엄청난 생각와 행동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를 해보자. 기술자와 학자를 존중하며 그들의 잘못이나 범죄행위에도 눈감는 태도를 생각하자면 아마 문명주의자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흑인이니 백인이니 상관없이 아무나 존속해서 인류가 지금껏 쌓아 올린 과학 문명을 상실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본심이 아닐까?

그런 입장에서 팔레스타인 사태를 판단하기에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일이 과연 인류 문명의 존속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서로 간의 증오로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사례들처럼 역사서에 글 몇 줄을 남기게 될 뿐일까?

물론 팔레스타인 사태가 인류 존망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흔히들 나비 효과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비 효과를 위해서는 그를 위한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비 효과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세워진 수 많은 도미노 블록들. 이 도미노 블록들은 에너지적으로는 준안정상태에 있다. 길쭉한 직육면체의 도미노들을 세우면 그 중앙에 무게 중심에 의해서 중력장 안에서의 에너지 상태가 결정된다. 당연히 도미노를 눕힌 상태가 세운 상태보다 에너지가 낮고 안정하다. 그러나 세운 상태의 도미노가 저절로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미노 블록의 직육면체 본질적 구조로 인해 그 무게 중심에서 모서리까지의 거리는 각 면의 거리보다 길다. 이로 인해 도미노가 넘어지기 위해서는 그 무게중심이 모서리까지의 높이 만큼 상승해야 된다. 이는 중력에 반하는 에너지가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고 바로 이것이 수 많은 물리화학 현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활성화 에너지라는 것이다.

즉, 자연계에서는 활성화 에너지만 공급이 된다면 도미노처럼 무수히 많은 연쇄반응을 통해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마치 겨울철 사용하는 액체 손난로에 들어있는 티오황산나트륨이 똑딱이의 작동으로 점차 열을 내며 굳어지는 것처럼 도미노 같은 연쇄반응은 세상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태가 처음 무너지는 도미노가 되어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팔레스타인이라는 도미노 하나가 무너질 때 이미 그 주변의 도미노가 무너져 있거나 아니면 다른 도미노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연쇄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준안정상태가 구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하지만 인간의 복합한 사회구조와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상태, 때때로 카오스적인 흐름을 보이는 대중의 변화로 인해 연쇄반응의 방향성은 물론 발생 가능성도 예측이 어렵다. 드라마의 흥행도, 스타의 탄생도, 갑작스레 벌어진 독일의 통일도.

사회 과학이 그러고자 하는 시도이지만 인간의 인지와 생각,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언제나 변하고 데이터도 언제나 과거의 것이기에 예측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 미국의 언론과 여론조사 기관이 대통령 선거 때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하는지 아는가? 그 만큼 미래를 내다보는 행위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강현의 직감은 엄청난 비용절감의 효과가 있었다. 그의 초능에 가까운 직감은 가자지구의 일이 큰 파급을 불러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살살 긁적이고 있었다.

물론 말들이야 많겠지만 현대에 들어서도 인간의 인간에 대한 대량 학살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리아의 인종청소에 가까운 내전 역시 그렇다. 민주화 운동으로 촉발되어 종교 갈등에 국제 문제 등 수 많은 갈등 요소로 인해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고 있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시리아 문제가 국제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복잡하고 첨예한 이해관계들이 풀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박사님, 고민이 있으십니까?]

아즈삭은 창조주가 의자에 몸을 파묻고 무언가를 생각하자 피드백을 위해서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러니까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개입을 할까 고민 중이야.”

아즈삭은 강현의 대답에 목적어가 없더라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필시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방금 전 그 때문에 헨델 회장과 전화 통화도 했고 말이다.

[굳이 박사님께서 개입하실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으려니 묘하게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래.”

[왜 그렇습니까?]

“내가 종교를 싫어하는 건 알지?”

[네. 검증 과정을 생략하고 믿음을 강요하는 불합리한 구조 때문이죠.]

“스스로만 믿으면 되는데 이걸 타인에게 강요하는 순간 그건 폭력이 되지.”

물리적 폭력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폭력도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것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사람을 괴롭게 한다면 물리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리고 강현에게 종교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었다. 그래서 민족이라면 다 용납되는 줄 아는 헨델의 태도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그의 사상과 태도에서 언젠가 연구소로 찾아와 한국인이라면 한국에 이득이 되도록 하라고 윽박지르던(당시 강현의 나이가 어렸다.) 국회의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은 민족이면 다 허용이 되는 건가? 민족이 곧 정의인건가? 그 민족 출신의 살인범, 강간범, 사기꾼, 도둑놈 등 온갖 범죄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날로 강현은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향수도 지웠다.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미국이 자신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한 미국에 충성할 것을 결심했다. 그가 인공지능의 재확산 붐에서 오직 미국 기업들, 미국 대학들에만 추천서를 써준 이유는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미국 정부가 인공지능을 외교적 카드로 쓸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을 숭배하는 건 아니었다. 줄건 주고 받을 건 받을 관계를 언제나 명확히 했다. 하지만 오히려 미국에서는 강현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었으니 확실히 흑자를 보았다. 강현 역시 자신의 안전과 권리를 확실하게 보호했으니 흑자였다. 이런 윈윈 게임으로 서로간의 신뢰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강현의 머리속에는 갖가지 생각들이 뛰어다녔다. 그까짓 국가가 뭐라고. 어차피 자본주의 세상, 돈 있으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굳이 그런 식으로 학살극을 벌여서 나라를 만들어야 하나?

그럼 나라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럼 힘 많은 놈들이 지 맘대로 하겠지? 그럼 질서 유지 차원에서 국가는 필요한 걸까?

그때 강현은 깨달았다. 설사 국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 국가를 대신한 조직은 다시 탄생할 것이다.

인간은 본디 그런 생물이었다. 인간 내부에 자리한 어두운 면이 국가의 존재,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회란 목줄이 없는 인간은 모두다 늑대다.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이익을 위해 충혈된 눈을 희번뜩거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도덕은 사회의 존재로 탄생한 것이지 인간 본연 내면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고난 기량 중에 도덕심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동질감, 혹은 측은지심 뿐이지 도덕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니 수 천년 동안, 그리고 50년 전까지 노예제와 신분 차별법이 엄연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가 그것을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변화에 따라 도덕의 형태가 바뀌어 간다. 하지만 사회의 변화가 개인의 관점을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개개인의 변화가 사회를 변화시킨 것인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전자이기도 하고 후자이기도 하다. 그것을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순환론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국가를 만들어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울 필요를 느끼지만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그런 질서 위에 서기 위해, 자유를 위해 힘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노력하고, 남의 위에 서려고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대신 남을 자신의 밑에 깔아두겠다는 생각도 한다. 왕따, 인도 카스트의 달리트 계급, 서로를 이단이고 경멸하는 수많은 기독교의 분파들.

인간은 권력을 누리며 자유를 실감하는 존재다.

강현은 그런 인간이 참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는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연설을 떠올렸다.

‘이성이 다스리는 아름다운 세계!’

그는 ‘위대한 독재자’에서 불합리한 독재, 제도와 권력에 맞서 싸우기를 주장했다. 과학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되는 세상을 주장했다. 그 연설에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사랑이 묻어 나왔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이성보다는 사랑이 필요했다. 서로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하려는 태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런 태도를 아무런 차별없이 시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타인에 대한 사랑을, 동정과 연민을 민족과 국경을 너머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또한 힘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돈과 권력을 쥔 이들이 뭐가 아쉬워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런 삶을 살까?

권력을 쥔 자의 뇌는 근본적으로 평범한 소시민의 뇌와는 다르다. 권력은 그들에게 테스토스테론과 쾌락물질인 도파민의 분출을 촉진시킨다. 쾌락에 중독된 그들은 과감해지고 스트레스를 견디는 능력이 강해지지만 생각의 폭은 좁아지고 공감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권력자들이 사이코 패스같은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주로 그들의 뇌자체가 평범한 상태에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로 변질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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