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지금까지 나온 인공지능은 무척이나 비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현이 개발한 인공지능은 초창기의 설계목적인 전자 세계의 생물이란 개념에 걸맞게 끊임없이 성장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문에 하드웨어의 보완과 보충은 반드시 필요했으며 그에 따라 상승하는 원가, 유지비가 웬만한 기업이 구입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컸다.
그래서 현재 NASA의 컴퓨터 개발부에서는 성능이 좀 떨어지고 성장할 수 없더라도 충분한 효용성을 가진 인공지능을 개발하고자 했다. 인공지능의 대중화를 위해 성장성을 담보로 가격을 낮출 수 있는지 연구 개발 중인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찾아와서 알릴 필요가 있나요? 그냥 메일 한 통이면 될텐데.”
“문자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직접 만나 대화를 하는 게 더 빠르지 않나요?”
“하긴. 그런 면도 있죠.”
메일 같은 건 의견 교환 속도가 말하는 속도보다 압도적으로 느리다. 물론 각자가 정리된 생각을 교환해 군더더기가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복잡한 일이 얽힌 경우, 혹은 스스로의 입장마저 정해지지 않은 경우 같이 지속적인 피드백이 요구되는 일는 사용하기 매우 불리한 통신 방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는 것은 즉시 피드백이 오고 가기 때문에 정보의 상호교환이 실시간으로 서로에게 전해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즉시 파악하고 목적을 위한 의견 조율이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통화나 채팅같은 실시간적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대면할 때 느끼는 어조의 미묘한 뉘앙스, 표정, 눈빛, 몸짓 등 대화에 대한 집중도와 관심 정도를 피부로 실감할 때 얻게 되는 정보의 양적, 질적 수준을 결코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대학 조별 과제는 반드시 직접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채팅이나 전화 통화 따위로 고도의 지적 활동과 협동성이 필요한 대학 조별 과제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왜 수 많은 바이어들, 외교관들이 직접 만나 협상을 하고 계약을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시작하면 식사시간 안에 조율을 다 마칠 수 있을까요?”
강현의 말에 알리아는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것이 샐리에게 무척이나 거슬렸다.
“그럼 식사하면서 대화하면 되죠. 아참, 이 일은 대외비니까 타 부서인 샐리 씨는 끼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 순순히 수긍할 샐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받아졌다.
“식사 시간은 쉬는 시간이기도 하죠. 그런 식으로 박사님께서 쉴 시간을 빼앗는 모습을 옆에서 보려니 그리 마음이 편하질 않네요.”
그렇다. 식사 시간은 또한 휴식시간 지독한 워커 홀릭이 아닌 이상 휴식시간에도 일거리를 찾아오는 이를 반길 사람은 없었다.
알리아는 샐리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
장군, 멍군이었다. 강현은 두 여자 사이의 신경전에 벌써부터 골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경험은 그로서도 무척이나 생소했다. 그래도 그는 몇 가지 핵심을 파악했다. 샐리의 말대로 굳이 식사시간을 잡아 먹으면서까지 의견 조율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그리 한다고 해도 식사를 하면서 제대로 의견 조율을 할 수 있을 지 미지수라는 점이다.
“의견 조율은 식사 시간이 끝난 오후에 하기로 하죠. 알리아 씨, 괜찮겠죠?”
“그러죠.”
강현의 말에 알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 밖에 없었다. 옆에서 샐리가 의기양양한 눈빛을 했다. 그 모습에 알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간신히 참아냈다. 그 약간의 동요조차 샐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은 알리아만 쫗아내지 않았다.
“샐리 양도 부서에 돌아가세요.”
“네? 같이 식사 하기로 했잖아요.”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닙니다.”
강현의 말에 샐리 역시 연구실 밖으로 나와야 했다. 두 여자는 서로 잘 가라는 말도 없이 뚜벅뚜벅 복도를 걷다가 각자의 방향으로 갈라섰다.
알리아는 샐리와 다른 길로 가다가 문득 뒤 돌아보았다. 샐리의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알리아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며 강현을 떠올렸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파티 다음날 그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한 껏 스스로를 꾸몄다. 평생 처음 해본 일이라고나 할까? 짧은 미니스커트에 와이셔츠를 입고 단추를 한 두 개 풀어 가슴골을 살며시 드러내고, 머리는 틀어올려 목선이 도드라진 패션이었다. 기본적으로 몸매가 뛰어나 섹시하게 차려입은 맵시가 나쁘지 않았다. 남자라면 분명 눈이 즐거울 섹시한 오피스 레이디의 모습이었다.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의례적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잠시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강현이 입을 다문 것이다. 당연했다. 용건은 알리아에게 있었고 그녀가 말을 꺼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을 입밖에 꺼내기는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녀가 말을 꺼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왜죠?”
그리고 입밖에 꺼낼 수 있었던 단어는 고작 그것이었다.
단 한 단어였지만 강현은 거기에 포함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범죄를 저지른 자신을 그냥 놔둔 것인가? 분명 사실이 알려진다면 강현도 결코 무사할 리가 없는데.. 어째서 자신을 두둔한 것인가?
“안 될 이유는 또 뭔가요?”
“... 이해가 안 돼요.”
알리아로서는 강현의 반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세간의 상식과 저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죠.”
“무슨 말인가요?”
“저는 당신이 일으킨 피해보다는 당신이 가진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판단했어요.”
“.....”
알리아는 조용히 강현의 눈을 주시했다.
“뛰어난 연구자로서 당신의 재능이 쓸데없는 곳에 이용 당할 미래가 안타까웠죠.”
“고작 그것 뿐인가요?”
“고작이라요? 과학 기술 문명에서 학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나요?”
“....”
“세상에 과학을 배우고 연구하고 개발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인류는 다시 구석기 시대로 돌아가 버릴 겁니다. 현재의 첨단 기술과 문명을 온전히 다음 세대로 전달할 사람들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중세시대로 돌아가 버리겠죠. 두려움에 가득 차 오직 신만을 찾는 시절로 말이죠.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저 말고도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알리아 양. 당신의 재능은 특별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당신만큼 제가 설계한 인공지능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응용해 실질적인 결과물을 만든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 하지만 전, 그 결과물을 제 함부로 써서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줬어요.”
“왜 그랬나요?”
“.. 인공지능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맞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공지능은 위험하죠.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공포에 먹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는 거죠. 생각을 그만둔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강현의 말에 알리아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턱대고 바이러스를 만든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박사님께 무슨 이익이 있죠?”
“이익이라..”
강현은 감시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엄청난 재산 피해를 낸 알리아를 자신이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엄청난 위기가 올 것이다.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알리아가 한 일을 감출 이유가 있냐하면 딱히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녀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흐음.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통해서 어떤 이익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 불안한 거군요.”
알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자신의 행동을 감추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없으니 갖은 공상을 했던 것이다.
“투자라고나 할까요?”
“네?”
“당신의 재능은 특별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언젠가는 제게 도움이 되겠죠. 안 되면 할 수 없고요.”
“도움이 안 된다면요?”
“그래서 제가 당신을 고발해서 국제적으로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알리라고요? 그래서 제게 무슨 이득이 있죠?”
“.....”
이미 강현과 알리아는 그 일에 관해서 같은 배를 탄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리아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는 파멸, 강현은 지금까지 기득권, 자본가, 정부에게서 얻고 있었던 신뢰를 잃고 집중적으로 견제 당하기 시작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더 이상 바이러스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당신은 과오를 잊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요. 손해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
그때 자신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강현이 마지막 말을 하면서 싱긋이 웃는 표정이 가슴에 남았다.
그리고.. 그가 탐이 났다.
하지만 강현과 샐리는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나있었다. 오늘 보니 샐리의 적극적인 감정표현이 확인됬다. 아무래도 둘 사이가 더 진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포기할거야?’
알리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포기할 생각은 없다. 만에 하나 자신의 범죄 사실이 들통난다면 유일하게 비빌 수 있는 곳은 강현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그와 자신만의 비밀은 둘 사이의 인연을 질기게 만들어 줄 것이고 이는 샐리가 어떤 수를 써도 자를 수 없는 빌미였다.
바라보고 있던 샐리의 뒷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돌아서 사라졌다. 알리아는 늘씬한 다리를 쭉쭉 뻗어 하이힐을 또각또각 소리나게 딛으며 일터로 돌아갔다.
= = = = =
기술 개발 보조를 목적으로 개발된 아리사는 대성공이었다. 연합에 참여한 기업들은 6개월 짜리 프로젝트가 한 달이나 단축되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엔지니어들은 아리사가 제공하는 엄청난 설계 편의에 좀 더 신경써야 할 부분에 역량을 집중 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기술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새로운 특허를 개발할 수 있었다.
일명 아리사 연합으로 불리는 이 기업연합의 성과에 인텔을 비롯한 기술 개발 기업들이 부랴부랴 강현에게 연락해 자신들의 인공지능 설계에 자문을 구했고 강현은 아즈삭이 만든 ‘교재’ 프로그램을 건내, 아니 팔아 주었다.
RNP 모듈 두 개에 꽉 채운 프로그램(약 10 엑사(exa) 바이트 ; 1 exa=1000^6, 테라 바이트의 백만배)은 그 가격이 만만하지 않았지만 두 회사가 구입한 인공지능의 작동 시기가 앞당겨지니 그 만한 값어치는 했다. 남이 기술을 먼저 개발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개발해야 했다.
특히 IBM은 이번 인공지능 도입에 사활을 걸었는지 다중 연산 코드 프로그래머를 높은 연봉에 고용하거나 헤드헌팅을 하고 있었고 특히 강현과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는 컴퓨터 개발부의 연구원들은 군침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제우스 사태 이후 주춤했던 인공지능 컴퓨터의 확산은 둑이 무너진 듯 다시 확산하기 시작했다. 반 인공지능 단체들이 연일 시위를 벌였지만 기술 문명에서 기술의 선점은 국력의 척도였고 기술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수단은 이익에 민감한 기업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렇다고 규제가 완화된 것은 아니지만 인공지능의 제작을 신청하는 이들의 수가 많아진 것은 확실했다. 인공지능의 연구 개발은 정부 측 사람이 참관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자체적인 인공지능의 개발을 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강현이 있는 NASA 연구소와(그마저도 강현은 형식적으로 참관을 받았다.) 팬타곤의 무기 개발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