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학의 군림자-122화 (122/241)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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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로 돌아온 강현은 한 숨을 내쉬었다. 어떤 말로 정의 할 수 없었던 샐리와의 관계가 이로서 명확해 졌다. 그녀와는 애인 이상 연인 미만 같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샐리가 강현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관계, 그리고 강현은 제시의 존재를 여전히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샐리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관계였다.

강현은 제시를 품은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잃어버린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보상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강현 자신은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단지 제시와 영원히 이별했을 뿐이었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이별한 것은 다르다. 한국의 이산가족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죽음이 그와 제시의 사이를 갈라 놓더라도 강현은 항상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만큼 샐리 역시 쉽게 변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확신해가고 있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바뀔 수도 있지만 몇 년간 샐리의 헌신을 피부로 실감해 온 그는 그녀의 굳은 심지와 그녀의 마음이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할 만한 데이터를 확보했다.

한 달, 두 달, 그 증거에 대한 신뢰가 점점 깊어질 수록 샐리와의 관계 정립에 대한 필요성도 점점 크게 느끼기 시작했다. 과학자로서의 기질은 둘 사이의 모호한 어떤 것을 확실하게 정의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또한 현재의 관계를 유지시키기에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커져가는 강현의 죄책감이 때때로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둘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앞으로 혹여나 그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 여자는 오직 샐리 그녀 뿐이라고 약속하는 것.

그것은 동정, 의리, 미안함, 신뢰 등의 감정적인 요소와 평생 제시를 잊지 못할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현재까지는 샐리만이 유일하다는 현실적인 요소를 모두 고려한 결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무척이나 이기적인 결정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온전히 원하는 여인에게는 모욕과 같은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현에게는 그 것이 최선의 결정이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 지 모르지만 그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을테고, 곁에 있는다면...

“연인으로서 행동해야겠지.”

강현은 결심했다.

[박사님. 결국 고백하신 겁니까?]

“고백? 결국?”

아즈삭의 질문에 강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납득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아닌 것도 아닌,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을 때의 표정이었다.

[샐리 양의 얼굴이 가진 비율은 미녀라고 할 수 있는 여러 타입의 얼굴 비율 중 C 타입에 약 92.4%가까이 일치합니다. 게다가 그 동안 그녀가 해 왔던 어필의 경우 역시 남성과 교제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제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그녀 정도의 외모와 행동에 그녀에게 호감을 품지 않을 확률은 약 8.23%미만. 그러니 박사님께서,]

“잠깐만, C 타입은 뭐고 또 도대체 수집한 자료는 또 뭐지?”

강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이해가 필요한 요소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가장 먼저 아즈삭이 말한 내용 그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었으니 설명을 요구했다.

[C 타입이란 인터넷과 매스컴들에서 연예인 선호도, 패션 잡지, 뉴스 기사 등 각종 자료를 모아 통계학적으로 종합해 만든 미모지수 중 하나입니다. 이 C 타입은 유럽풍 백인 미녀를 기본으로,]

강현은 더 안들어도 알 것 같았다. 굳이 더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곧장 다음 의문으로 넘어갔다.

“잠깐 그건 거기까지 하자. 그런데 왜 그런 자료를 수집해서 분석한 거야?”

[박사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 여성의 미모를 분석한다? 강현은 이해가 어려웠다.

[그 동안 박사님께서는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지 않으시고 연구에 몰두하셨습니다. 만일 샐리 클린턴이 없었다면 금방 건강을 해쳐 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사님을 내조할 ‘반려’의 존재가 필요함을 깨닫고 박사님의 마음에 들만한 여인들을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즈삭의 설명에 강현은 멍했다. 그러나 아즈삭을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나 다행이 샐리 클린턴이 존재해 그 일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외모 또한 수준급 이상이었으며 그녀와 박사님의 관계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차 두 분이 잘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

두 분이 잘 될 거라니.. 하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샐리와 강현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이미 NASA의 직원들 사이에서는 둘이 선언만 하지 않았지 연인사이라고 소문이 나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강현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아즈삭이 예전부터 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을 거란 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럼 내가 끼니를 거를 때마다 샐리가 찾아온 것도 네가 한 일이었니?”

[네, 그렇습니다.]

“그녀가 내 건강 상태를 알고 담요나 따뜻한 코코아 따위를 가져온 것도?”

[네, 그렇습니다. 박사님의 건강을 위해서 저와 그녀 사이에 협조관계를 형성해 박사님의 건강 관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

강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속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런 느낌은 부정했다. 속은 것이 아니다. 단지 듣지 못 했을 뿐이다. 또한 아즈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아즈삭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즈삭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즈삭을 설계 때부터 성장시키고 지금까지 줄곧 관찰해 왔기 때문에 강현은 아즈삭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나를 위해..’

그렇다.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잘 할 수 있게 보좌하는 것이 아즈삭의 존재 목적. 그렇기에 연구의 주체인 자신의 건강을 신경 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합리한 감정이라는 것은 안다. 만일 자신이 아즈삭이라면 최선을 다했는데도 욕을 얻어먹으면 억울할 것이다.

강현은 자신은 결국 인간이란 불합리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헛!”

그것은 차라리 한 숨에 가까웠다. 화를 내고 싶으면서도 그것이 불합리한 행동이라는 판단, 그리고 그리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현실적 이유와 화를 내면 오히려 아즈삭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게 될 것이 뻔하다는 예측도 있었다. 아즈삭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번과 같은 일을 또 다시 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 100%였다.

하지만 아즈삭이 하는 일을 강현이 일일이 보고 받고 점검 할 수도 없다. 아즈삭을 만든 이유가 자신을 보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일일이 허락을 받게 만든다면 아즈삭의 자율성을 해치고 나아가서는 아즈삭을 설계한 목적 자체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었다.

강현은 잠시의 숙고 끝에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비록 그의 마음은 뜻하지 않은 배신감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감정에 휘둘려 함부로 행동할 정도로 그는 무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를 내고 이를 빌미로 아즈삭에게 제약을 거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이 된다.

그는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한 점 부끄럼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외부의 상황, 조건 등 외부적 요소를 합리적으로 판단해 타협은 해왔어도 연구에 대한 어느 무엇도 타협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정주의 물결을 일으켜 그 답지 않게 정치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아즈삭이 자신과 같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챙기는 행위가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아즈삭이 비록 자신의 행동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고 해도 손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샐리는 덕분에 강현의 옆에서 신뢰를 쌓게 되어 결국에는 고백과 같은 것을 받았으며 강현은 건강을 챙겼다. 강현의 감정이 상했을 뿐이며 그마저도 불합리한 감정이었다.

그랬다. 결국 모든 원인은 강현 자신에게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건강을 챙겼다면 아즈삭이 샐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챙길 수 있었을까? 강현은 부정했다. 연구에 빠지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몰라 배고픔과 졸음도 인지할 수 없는 그였다. 때때로 아즈삭의 알림도 무시하거나 못 듣는 그였다.

그러니 아즈삭의 결정은 최선의 결정이었다.

그래, 자신의 감정이 불쾌할 뿐 아즈삭의 행동으로 인한 불이익은 없었다. 모두가 좋았다. 자신의 감정만 삭히면 된다.

강현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 = = = =

[아리사, 부팅시작. 하드웨어 섹터 구분 작업 시작.]

[인공지능 시스템 구동 준비 완료. 작동까지 32초]

[하드웨어 활성화율 50%, 60%... 100%]

[아리사 작동 시작. 음성 및 언어 시스템 실행. 학습 프로그램 셋팅 시작.]

[설정을 완료했습니다. 아즈삭과 아리사간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아리사의 본체는 실리콘 밸리에 있었다. 강현은 실리콘 밸리에서 도산한 회사의 건물을 사들여 아리사를 설치했다.

원래 인공지능의 시작은 매우 어렵게 시작되고 제대로된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실행 초기에는 사람의 손을 많이 타야 쓸만한 사고력과 유연성을 획득할 수 있다. 강현도 아즈삭이 쓸만하게 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건 아즈락을 비롯한 모든 인공지능에게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리사는 그러기 위한 시간이 엄청나게 줄었다. 아즈삭의 하위 인공지능으로서 아즈삭과의 정보 교류를 통해 단시간에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인간의 말과 타이핑 속도는 직접적인 전류의 흐름보다 느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고 인공지능인 아즈삭이 인공지능인 아리사의 반응을 이해하는 수준은 인간보다 높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신망을 통해 아즈삭과 정보 교류를 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기술 개발의 보조란 존재 목적을 위해서 아리사는 배워야 하는 것이 많았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개발 중인 기술과 기존의 특허 정보를 비교해 침해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일만 해도 매우 복잡한 알고리즘이 필요했고 스스로 그런 알고리즘을 설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강현&아즈삭 콤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기술 분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탑재 되었지만 이는 확실한 침해성에 대해서만 분별할 수 있을 뿐 특허 소송까지 갈 수 있는 특허권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강현도 아직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갖가지 사례들을 모으고 경험을 쌓아야 어떤 기술이 소송에 걸려 법정으로 가고, 다시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이 날지 확률적이나마 분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질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단 그 문제는 시간에 맡겨두고 그보다는 더욱 중요한 난제가 강현과 아즈삭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둘은 거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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