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둘의 대화는 점점 심도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강현의 머리속에는 어느세 알리아에 대한 의문은 지워져 있었다. 간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박사님!”
그러나 둘의 대화는 누군가의 간섭으로 끝나버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강현이 고개를 돌리니 샐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알리아를 흘끔흘끔 주시하고 있었다.
“파티가 끝났는데 왜 계속 그러고 계세요?”
파티를 밤새워 계속 하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다시 그 가족과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한 이들이 있어서 파티는 10시가 되자 파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강현은 알리아와 그 때까지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 끝났어요?”
“네. 그러니까 이제 박사님도 돌아가 보셔야죠.”
지저분해진 파티장은 미리 치우기로 정한 이들이 치우기로 되어 있었다. 주로 기획부 사람들이었는데 뭔가 일을 만들고 담당하는 것이 직업병처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라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를 계획하고 또 이렇게 마무리도 하게 된 것이다.
“안녕하세요. 컴퓨터 개발부에 들어온 알리아 헤밍스턴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사무과의 샐리라고 해요. 알리아 씨의 이름은 자주 들었어요. 컴퓨터 개발부에서 아주 기대하는 인재라고 들었어요.”
“과찬이세요. 박사님. 그럼 연구실에서 더 대화를 나누어도 될까요?”
샐리와 인사를 주고 받은 알리아는 샐리가 끼어들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현은 얼떨결에 그러라고 말했다. 샐리가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야밤에 남녀 둘이 같이 있으면 오해를 살 수도 있어요.”
“네? 무슨 오해요? 전 그냥 인공지능 컴퓨터에 대해서 밤새도록 토론을 하고 싶을 뿐인데요?”
알리아가 뿔테 안경을 고쳐쓰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샐리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도둑고양이가 앞발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샐리의 지적에 강현은 금방 스스로의 실수를 자각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구설수에 오를 수 있었다.
“확실히 샐리의 말대로 이 야밤에 단 둘이 있으면 오해를 살 수 있군요. 알리아, 대화는 다음에 시간 날 때 나누기로 하죠.”
“네? 하지만 방금은 승낙하셨잖아요.”
“실수였습니다.”
강현은 일반적인 남성이 아니다. 평범한 남자라면 마치 청춘 시트콤의 주인공이 된 느낌에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겠지만 강현은 청춘 시트콤의 주인공 따위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바꾸어 버렸다.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강현의 그런 태도는 샐리를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다.
‘봤지?’
알리아는 살짝 불쾌감이 들었다. 강현과 좀 더 은밀한 이야기를 나눠야 했는데 샐리 때문에 틀어졌다. 왜 자신의 범죄 행위를 그냥 묵살하고 넘어갔는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여기에 취업까지한 그녀에게 강현의 연구실에서 둘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은 기회였다.
“박사님, 남자면서 그렇게 말을 바꾸실 건가요?”
알리아는 답답하다는 듯 틀어올린 머리를 풀어 헤치면서 도발했다. 웨이브진 갈색 머리가 출렁거리며 팜프타탈적인 여성미를 잔뜩 풍겼다.(샐리가 인상을 찌뿌렸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며 남성의 자존심을 살짝 긁어주면 백이면 백, 그녀의 의도대로 넘어왔다.
“못 바꿀 이유는 또 뭡니까?”
하지만 강현은 그 백에조차 속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논리적으로 그래서는 안되는 이유를 물었다. 실수가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 아무리 심혈을 기울인 가설이라도 실험과 검증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면 피눈물을 흘리며 수정하는 것이 당연한 과학자의 기질은 이미 스스로 내면화 되어 자신의 행동조차 잘못되었다면 수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하아..”
그의 그런 태도에 알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예상범위를 벗어나 버린다.
그가 자신의 범죄 행위를 덮어주기로 한 후 그녀는 머리를 굴려 추측 해봤다. 자신을 왜 보호해 준건가?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할 의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자신을 잡은 건 결과적으로 강현과 그가 만든 아즈삭이다. 순식간에 인공지능용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을 보면 자신의 힘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혹시 자신의 몸을 노리는 건가? 하지만 강현 정도 되는 사람이 왜? 사교 파티에만 가도 그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상류층 여자는 확실히 있을 것이고 그도 아니면 최고급 콜걸을 불러 성욕을 해결할 수도 있었다.
온갖 망상이 머리를 휘몰아치며 강현이 원하는 것은 완전히 자신을 수발하는 성노예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상상이 무의미 해졌다. 어떤 후속적인 조치도, 은밀한 연락도 없었다. 다만 혹시나 하고 인공지능 바이러스를 프로그래밍을 할 때 갑자기 컴퓨터가 재부팅되며 자료가 날라가 버렸다. 정말로 그의 인공지능이 전달한 그대로였다. 정말로 자신이 한 일을 덮어주겠다는 듯 철저하게 침묵하면서 혹시나 다시 나쁜 일을 할까봐 감시를 풀지 않은 상황.
그래서 알리아는 너무나 궁금했다. 왜?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생기길래?
그래서 NASA에 들어왔고, 그래서 강현과 둘만 이야기 할 수 있는 환경을 원했다. 그런데 이렇게 예상 밖에 거절해 버리는 행동을 취하다니..
그러나 그녀는 천재다. 포기할 줄 몰랐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전번에 일어난 인공지능 다발 고장 사태 아시죠?”
인공지능 바이러스가 살포 된 상황을 은근히 꺼내는 알리아였다. 그녀는 이만하면 강현이 그녀의 의도를 알고 다시 말을 바꿀 줄 알았다.
“아아. 그 얘기였군요. 하지만 밤이 깊었으니 그 일도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죠.”
하지만 역시 강현의 반응은 그녀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와의 밀약을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어떤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애시당초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힌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봐주겠다고 한 것 자체가 상상을 뛰어넘는 짓이었다.
알리아는 더 밀어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강현과 샐리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떠나자 강현은 샐리와 둘만 남자 부담이 가중되는 것 같았다. 골치 아픈 사람은 한 명 줄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샐리도 마저 떼어내기로 했다.
“이제 그만 샐리도 돌아가죠.”
“바래다 드릴게요.”
“안 그려서도 됩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하지만 역시 샐리는 강적이었다. 그녀는 기어코 강현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강현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었지만 샐리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도둑 고양이를 쫓아낸 강현의 행사에 매우 흡족했다. 아니 그보다 알리아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진 것 같지 않은 그의 태도가 더 마음에 들었다.
“박사님. 아까 알리아 씨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던데..”
“아, 알리아 양의 인공지능에 대한 지식이 매우 뛰어나더군요. 역시 세상은 넓어요.”
“그래요?”
역시 강현이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주제는 기술과학 분야였다. 샐리는 그 사실을 새삼 알게 되자 한껏 좋았던 기분이 식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제를 잘 알았다. 그녀는 제시만큼 그 분야에 뛰어난 과학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사랑을 위해 전문가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제시가 이룩한 성과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현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와 함께 같은 곳을 보며 나아갈 수는 없지만 그가 지쳤을 때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때때로 강현의 생활을 지켜보면 불안감이 밀려왔다. 강현이란 남자는 쉴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다리는 여자보다 같이 걸어나가는 여자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알리아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이 상기되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간 해온 일은 헛된 일일지도 몰랐다.
강현은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던 그녀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하아..
그는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여자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동물이었다.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당췌 어떻게 장단을 맞추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시도 그랬다.
‘아! 혹시 그날인가?’
한달에 한 번 여성이 예민해지는 날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혹시 샐리도 그 날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나라하게 생리로 힘들면 그만 돌아가 보세요라고 말할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당하게 말을 꾸며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도 별로 익숙하지 않아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사님. 알리아 양이 마음에 들어요?”
“... 이성적인 관점에서요?”
강현의 반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질문한 의도를 이해했다.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입맛이 썼다. 그녀의 질투심을 자극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시는게 아니었어요?”
우울한 목소리였다. 강현은 죄책감을 느꼈다.
“샐리.”
“.....”
잠시간의 침묵이 둘 사이의 긴장감을 고양시켰다. 샐리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제가 혹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그 누군가와 맺어질 일은 없습니다.”
“왜요?”
“샐리 양. 당신 때문이죠.”
“....”
“당신이 저에게 바친 노력과 헌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저에게 원하는 것이 뭔지도 압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감정이 휘둘려 당신에게 상처 입히는 짓을 하라고요? 저는 못합니다.”
샐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강현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존재가 강현이 누군가를 사랑할 가능성을 막는 것이 아닌가? 그건 싫었다. 그녀는 강현을 사랑하는 것 뿐이지 그의 방해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헌신이 오히려 그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니..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 결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강현에 대한 애정이 절실한 그녀였지만 그녀 역시 생각을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강현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는 강현의 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 즉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었다. 곧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헌신이기도 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성대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작별을 고하고자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을 추스리고 내일 말을 해야할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는 그녀의 발걸음을 강현이 잡았다.
“샐리 양. 다른 건 다 몰라도 이것 만큼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시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나 곁에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렇게 될 사람은 샐리 양 당신입니다.”
샐리는 그의 말에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흑! 흐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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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양과의 정리 완료. 이러기 위해서 알리아를 놔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