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그녀에게 연달 된 메시지는 강현의 메일주소로 보내진 것(아즈삭이 강현의 신변을 관리하고 있다.)이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그가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남 눈치 볼 것 없이 부담없이 그의 연구실에 갈 수 있었다. 덕분에 강현과 샐리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있어 혹시나 모를 경쟁자에게 앞선 상태라고 생각하며 자신감에 차 있었다. 지금 누구보다 그에게 가까운 여성은 바로 자신인 것이다.
“어? 샐리 양.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세요라니요! 어째서 휴가를 제대로 안 보내고 다시 연구실에 들어온거에요?”
“쉴 만큼 쉬어서,”
“쉴 만큼 쉬다니요!”
샐리는 기겁을 했다. 연구실에 처박힌 동안 매일 그녀가 식사를 나르지 않았다면 아마 연구하다 죽은 천재로 강현의 이름이 역사서에 기록됬을 것이다.
“일단 바람부터 쐬러가요. 간만에 출근하자 마자 방에 처박혀 있지 말고요.”
그러면서 그녀는 강현의 팔을 잡아 끌었다.
강현은 난감했다. 그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동안 그녀가 자신에게 바친 헌신과 노력을 알고 있었다. 특히 배고픔도 잊고 연구에 몰두하던 시간동안 그녀가 자신의 건강을 관리해 주지 않았다면 금방 건강을 해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팔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리고 망설이는 사이에 NASA에서 조성한 야외 잔디밭으로 나왔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했다. 하지만 강현은 눈을 부시게 하는 햇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부터 햇살이 닿는 피부가 뜨거워지는 것이 기분 나빴다. 따뜻해지려면 전신이 골고루 따뜻해지지 이렇게 일부분만 뜨거워지는 것은 불쾌했다.
“어때요? 상쾌하죠?”
“바람은 그렇네요.”
가을이다보니 바람은 시원했다. 강현은 심호흡을 했다. 시원한 공기가 폐속에 들어오며 머리가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샐리는 그런 강현의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죠?”
“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관계였다. 그 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집요했다.
= = = = =
강현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복귀해서 여러 잡다한 일들을 처리했다. 자정주의를 일으키고 필요한 인물들에게 투자하기 위해 불러들인 제이슨 킬덤이 미국에 제현 투자 회사를 세웠고 그에 필요한 투자 제안서를 강현에게 보내왔던 것이다. 미국 제현 투자회사는 하지만 한국의 제현 투자회사와는 법인이 달랐다. 미국 제현 투자회사는 온전히 미국기업이고 약 80%의 지분이 강현의 소유였다.(한국 제현 투자 회사는 제이슨 킬덤을 비롯한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넘겨준 상태다.)투자 제안서는 실리콘 밸리는 중견기업들이 합동을 제작해 올린 것이다. 애플이나 인텔같이 세계적인 기업이 아니라 단독으로 인공지능을 구입하고 유지하기 어려운 회사들끼리 뭉친 것이다.
그러고도 돈이 부족한지 제현 투자 회사에 투자를 의뢰했다. 인공지능의 장점과 단점을 확실히 꿰고 있는 강현이기에 투자 제안서에 나열된 기업들과 인공지능의 시너지 효과가 굉장함을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히 큰 돈이 될 것이 분명했다.
“쯧. 이건 기각.”
하지만 강현은 혀를 찼다. 돈을 벌려고 투자 회사를 차린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자신 주위의 환경과 입장이 외부의 입김에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다.
안그래도 유대 자본, 아랍 자본, 유럽 자본이 제현 투자 회사의 횡보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익성을 내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면 왜 암묵적인 묵계를 지키지 않았는지 따지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미국 제현 투자 회사는 지금까지처럼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투자하는 경영 방침을 유지하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했다.
그렇다. 한국의 제현 투자 회사는 수익과 사회성의 균형을 맞춘 자본주의 회사라면 미국의 제현 투자회사는 수익성을 신경쓰지 않고 공익과 사회적 역할에 더 높은 비중을 둔 공익재단의 성격이 더 강했다.
그래서 미국 제현 투자회사는 가난한 공립 고등학교에 지원을 해서 학생들이 맘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거나 적성에 맞는 취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수익모델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으로 자리잡은 이들에게 약 15년 동안 수입의 일정 비율을 투자에 대한 수익금 명목으로 받기로 한 것이다. 이는 미국 제현 투자회사가 공익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공익재단과 차이가 나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회사를 유지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거대한 시장 흐름에 끼어드는 것은 기존 기득권의 경계를 사는 일이라 하지 않았다. 세계를 움직이는 그들과 척을 지어봤자 별로 이득이 없다. 그래서 미국 제현 투자회사는 그들이 눈을 두지 않는 소규모 시장에 투자를 했다. 주로 지역 사회의 경제 분야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럭 저럭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제이슨 킬덤으로서도 한국에서 벌인 스케일 큰 일은 아니지만 지역 사회의 발전을 두 눈으로 뚜렷하게 볼 수 있어서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의 투자 제안서는 킬덤으로서도 욕심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획서가 반려되자 급하게 강현을 찾아왔다. 경영자는 자신이지만 아무래도 일을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권위자인 강현의 동의가 필요했다.
“강 박사님. 실리콘 밸리의 투자 제안서를 거절하셨다면서요?”
“네.”
“혹시, 왜 그러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요..”
강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부모님의 복수가 끝난 이상 더 이상 크게 일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장을 장악한 이들의 경계를 살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들과 인맥을 형성하느라 파티장을 돌아다는 일도 하고 싶지 않다. 귀찮으니 관련되고 싶지 않다.
은밀한 느낌의 이야기였지만 킬덤과는 한국에서의 일로 개인적 친분과 공감대, 그리고 비밀을 공유하는 동지라는 느낌도 없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껄끄럽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끝난 일이다. 다른 사람이 안다고 해도 별로 문제 될 건 없다. 오히려 연구에 집중하고 싶다는 강현의 솔직한 속내가 공개된다면 그와 부딪히고 싶지 않은 이들은 알아서 피해갈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킬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오히려 투자를 권고했다.
“박사님. 제 이야기를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는 증권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로 들어 강현을 설득했다.
증권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증권가란 자본주의의 꽃밭이다. 돈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중 가장 시장이 크고 짜릿한 공간이다. 인간의 탐욕이 수치화되어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이었다.
끝없는 역동성과 생명력,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잔인함이 드리워진 세상. 강현이 연루되기 싫어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곳에서 사는 이들이었다. 아니,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먹잇감을 물어뜯는 야수들이었다.
트레이더로 자본이란 논리에 파묻힌 이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킬덤은 그들이 무서웠다. 단순히 그들은 철저한 자본주의자가 아니었다. 자본 그 자체였다. 자본의 원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법과 윤리, 사람의 세상 따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이야기네요.”
하지만 강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것 역시 인간의 속성이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오해들이 비극을 불러왔는가? 그러나 그런 오해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잔인해지는 것이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본질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이들이 많다. 새롭고 이질적인 것에 관대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들이미는 이들에게 분노할 것이다.
킬덤이 언급한 소위 자본가들도 그런 인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다는 일을 한다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쁘다는 것인가? 법이 정의인가? 그렇지 않다. 법은 규제이며 그저 국가를 유지하는 틀일 뿐이다.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법이 저지르는 수 많은 국가적 범죄를 외면하는 반푼이일 뿐이다.
그러니 자고로 정의롭게 살고 싶다면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옳다.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옳다. 법은 정의와 동의어가 아니며 국가와 사회를 빙자해 소수의 권리를 짓밟는 것은 강자가 약자의 권리를 짓밟는 것과 같은 불의인 것이다.
강현에게 적용시켜보자. 자본과 연구가 동치되는 순간 강현은 그들보다 더 잔인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의 강력한 에고이즘은 킬덤이 만났던 이들과 비교해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힘의 역학 문제입니다.”
킬덤은 강현과 투자 회사 운영을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강현의 성향을 파악했다. 한국에서 경영자로 많은 이들을 만나다보니 그 사람의 우선 사항이 무엇인지, 또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예리한 수준으로 느낄 수 있는 뛰어난 협상가가 되었다. 한국 기업인들 중에서 제현 그룹에 흡수하거나 협력업체로 만들기 위해서 각 기업의 경영자들을 만나 옥석을 가렸던 일이 그를 크게 성장시킨 것이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강현을 설득했다. 그건 비단 자신의 이익뿐만이 아니라 회사의 이득과 강현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대세가 되고 나서 많은 나라들이 자본주의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기술 문명의 발달은 기술이 자본의 파트너가 되도록 만들었죠.”
분명 근대까지는 그랬다. 집에서 연구하는 발명가들도 큰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기술의 생명력은 자본의 생명력에 뒤떨어질 수 밖에 없는 법. 기술 수준이 고도화 될 수록 연구비는 증가했고 기술은 자본에 종속되어 갔다. 때로는 자본 논리에 뛰어난 기술이 묻힐 뻔 했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았다. 만일 테슬라의 교류가 에디슨의 직류를 훨씬 뛰어넘는 장점이 없었다면 수 십년 동안 직류가 세상을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거대 자본가들이 박사님에게 손을 못대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미 정부의 보호 때문이죠.”
강현은 돈이 된다.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다. 힘을 가진 기업인, 자본가일 수록 그런 욕구는 강했다. 하지만 미국이란 거대한 조직의 비호를 받고 있는 강현에게 섣불리 손을 대기는 부담스럽다.
게다가 그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있다고 해도 강현은 그저 뛰어난 기술을 판매할 뿐, 상업의 핵심인 물류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시스템 그 자체에 대한 영향력은 없었다.
“솔직히 박사님은 정치권의 비호 이외에는 힘이 없습니다. 그 비호가 얼마나 갈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준비를 해놔야 합니다.”
힘이 없다라.. 아즈삭이 전세계 첩보망에서 정보를 얻고 있는데 힘이 없다고 하니 동의할 수 없는 강현이었다. 하지만 킬덤의 발언도 이해가 되었다. 아즈삭이 지금도 아즈락을 비롯한 여러 인공지능과 협상을 통해 정보를 획득하고 있고 유사시에는 바퀴벌레 로봇으로 은밀한 정보 역시 도감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현 이외에 알고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라는 단어가 귀에 쏙들어왔다.
“준비요?”
“네. 강 박사님을 지킬 수 있는 준비요.”
킬덤은 그러면서 실리콘 밸리의 중견 회사들이 투자 요청이 그러한 준비 중 하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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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재미없을 듯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