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지적 욕구라... 자네.. 그런 사람이었던가?]
전혀 의외의 말에 헨델 사장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경영자의 입장인 그가 강현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고 지난 연회에서의 강현에게서 옹고집적인 학자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물론 그동안 세계에 보여주었던 온건한 모습도 그런 오판에 일조를 했다.
강현은 그런 그의 오해를 친절하게 풀어주었다.
“각자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개인의 가치관은 물론 삶에 있어서 우선 순위라는 것도 다 다릅니다. 그리고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것도 있죠. 제가 사장님의 사정에 대규모 생태학 실험이라는 흥분되는 이벤트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유대인이 건설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죠.”
[정말로 이러긴가?]
“저는 기본적으로 온건한 사람입니다. 제 인생의 목적을 방해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양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사장님의 제안은 양보하기에는 이미 이쪽이 너무 몰려버린 것 같군요. 저는 순환 방목 시스템의 대규모 적용을 통한 환경 변화를 꼭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헨델 사장님이 양보를 하시죠.”
[어떻게?]
“그야 사장님이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쪽의 내밀한 사정을 모르니까요. 밤이 늦었습니다. 그럼 결정이 되면 연락주시죠.”
강현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아즈삭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바로 각종 수단을 이용해서 카길을 비롯한 곡물 카르텔과 유대인 네트워크를 감시해.”
[네, 박사님.]
강현은 샤워실로 가면서 혀를 찼다. 위험하면서 귀찮은 것들과 갈등을 빚고 말았다. 하지만 호기심을 충족할 기회를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헨델 사장을 비롯한 그들에 대한 대응은 그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결정해야 했다.
= = = = =
그러나 며칠 동안 아즈삭은 별로 아무런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즈삭이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헨델 사장이 가만히 있다는 것. 강현은 왜 가만히 있는지 궁금했다. 너무 궁금해서 참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먼저 연락을 하고 말았다.
[일단은 그냥 지켜보기로 했네.]
“그때는 금방 사업이 망할 것처럼 구시더니 웬일이에요?”
[순환 방목 사업이 정말로 성공할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네.]
“하지만 경영하는 입장에서 리스크 관리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강현이 하는 말은 어떻게든 훼방을 놓아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의 완곡형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헨델 사장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 웃음의 이면에는 강현이 이미 대비에 대한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생긴 두려움을 감추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강현은 필요하다면 유대인들과 싸울 생각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허허. 당연히 리스크 관리를 하고 있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리스크 관리를 하고 있다니. 강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라는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지 않은가?]
“저요?”
[자네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군. 그러니 자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못할 테지. 자네의 그 석유 제조 라이센스만 고려해도 자네의 이번 아프리카 투자를 방해 했을 때 더 큰 불익이 생길 것이 확실한데 굳이 음모를 꾸며 자네와 척을 질 이유가 없지.]
“그런가요?”
[그렇다네. 우리는 적이 많지. 곡물 시장의 손해라고 해봤자 겨우 5%정도야. 에너지 시장의 패권을 잃어버리는 손해보다야 낫지. 막말로 자네가 빡쳐서 석유 라이센스 이권을 중동 쪽에 몰아주기만 해도 우리는 석유 시장의 패권을 상실할 수 있어.]
“그렇군요.”
강현을 끄덕였다. 하지만 살짝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유대인 네트워크의 힘이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던가? 그러나 계속되는 이야기에 그에 관한 질문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열었던 석유 제조 라이센스 국제 컨소시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거나 다름없었지. 그때 록팰러 가에서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아는가?]
“유대인 네트워크로 어떻게든 할 수 있었지 않나요?”
[우리는 힘이 있네. 돈도 많지. 오히려 그로 인해서 우리를 증오하고 싫어하고, 혹은 배척하고 싶은 이들은 무수히 많다네. 자네가 석유 제조 라이센스를 개발했을 당시만 해도 거의 모든 국가 정부에서 석유 로비가 끊어질 뻔했네. 우리의 입김에서 자유롭게 되거나 적어도 영향을 끼칠 수 없을 정도로 줄여보겠다는 생각이었다네. 국가의 기반인 식량과 에너지라는 중요한 축 중에 하나를 무력화 시킬 수 있으니까. 그러나 다행이 자네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선택해서 큰 타격이 없었네. 그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얼마나 절실하게 자네의 영향력을 실감했는지 아는가? 자네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우리하고 할 수 있지.]
“쩝. 그랬나요?”
당시 강현은 배터리 기술 좀 풀었다고 징징대는 석유 재벌들에게 으름장을 놓기 위해 만든 것 뿐이다. 그런데 설마 그런 뒷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니.. 하긴 그때는 세계 정세를 감시해주는 아즈삭이 없었으니 모를 만도 했다.
[그래서 얼마 전 만난 친구들을 통해서 결정을 냈지.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당분간 크게 손을 쓰지 말자고. 일단 중동 문제부터 확실하게 해결해야겠다고 말일세.]
“그쪽은 종교가 얽혀 있어서 쉽게 해결이 안 될 텐데요?”
[그래도 별 수 없지. 일단 이스라엘 주변만 어떻게든 빨리 안정화시키고 아프리카의 변화에 대비하도록 내부적으로 동의를 했네.]
문제는 시간이다. 정말로 알렌 세이버리의 순환 목축이 아프리카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대지를 풍요롭게 만든다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유대계 자본이 개입할 틈이 너무 좁아지게 된다. 그러니까 적어도 변화가 가속되기 전에 개입할 수 있도록 중동의 정치 군사 상황을 안정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헨델은 그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보았다. 비록 이스라엘의 옛 영토를 완전히 수복하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한 번 놓쳐버리면 영원히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를 압박해서라도 팔레스타인과 평화 협정을 맺어야 했다.
많은 희생을 낸 팔레스타인 저항 단체들이 순순히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격언처럼 이슬람이 전도를 할 때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 들듯이, 이스라엘은 한 쪽에서는 모빌 아머 부대로 압박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평화 협정 문서를 내미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과는 확실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모빌 아머 부대는 강현의 K 시리즈와 전술 타입 모빌 아머의 도입으로(확실히 돈 잡아 먹는 괴물이었지만 이스라엘은 돈이 많다.) 강력하게 저들을 압박할 수 있었다. 자살 폭탄 테러로도 적과 함께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저들의 기세가 꺾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저는 이제 편하게 연구에 집중하면 되나요?”
[허허. 물론일세. 거기에 순환 방목에 대한 투자건에도 어떤 방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알겠습니다. 괜찮네요.”
강현은 의외로 일이 싱겁게 끝나서 김이 빠졌다. 그러나 김이 빠진 것은 빠진 것이고 헨델의 말을 믿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신뢰를 위해 아즈삭이 지금까지 그들의 네트워크를 감시했던 것을 잠시 더 지속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 딸은 어떻던가?]
“....”
강현은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문제가 마무리 되자 나오는 헨델 사장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역시 딸가진 재력가나 경영자의 생각은 대동소이 하나보다.
거의 대부분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한 번 찔러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툭 던지는 말이지만 어떻게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을 할까 고민하며 답해주는(온건하기 때문에) 강현에게는 귀찮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왜 마리아 씨가 아버지의 뜻을 어기면서 저에게 순환 방목 시스템 도입을 위한 투자를 받은 건가요?”
[….]
순간 전화기 너머로 말이 없었다. 그저 간간히 한 숨 소리만 나왔다.
[그 아이는 너무 착해. 그게 문제야.]
헨델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착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적인 일들 때문에 사춘기 때 너무 힘들어 했다고 한다. 부녀지간이 끊길 정도로 말이다.
마리아는 스스로가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팔레스타인에 저지르는 이스라엘 군의 만행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결국 죄책감을 선택하고 죄를 씻기 위해서 세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으로서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엄밀히 따지는 분쟁은 아니지만)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아프리카였다.
[하아.. 그때는 회사 이미지에도 좋다고 생각해서 허락해 버렸지. 거기가 세상을 좀 배우고 경영자로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네.]
아프리카의 비참함을 혁파하기 위해서 마리아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지원을 받고 각종 활동과 단체에 참여하는 등 젊음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건 헨델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그래서 둘은 사춘기 이후로 처음 다시 말다툼을 하고 말았다. 딸은 아버지를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고 아버지는 딸에게 세상은 그렇게 이상론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세상은 이상만 가지고는 살 수 없어.]
“하지만 누구나 꿈을 꾸고 살죠. 단지 그 꿈이 서로가 다를 뿐이죠.”
[자네를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군. 행동은 실리주의자면서 이상론자를 옹호하는 이유는 뭔가?]
“실리주의자라고 해도 이상론자를 싫어하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을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이상론자였지 않습니까? 헨델 사장님도 젊었을 적에 그래본 적 없나요?”
비단 인간 뿐 만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은 모든 포유 동물의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새로운 것을 알고, 탐구하고,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는 단계는 주로 성장기에 나타나는데 이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환경은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과거의 환경에 익숙한 기성세대의 방식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미 안정적인 삶의 방식을 체득한 기성세대에게 모험심을 부여해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원의 낭비였고 종의 멸종을 담보하는 위험한 일이기에, 자연은 덜 자란 개체를 이용해 위험을 시험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원소비량에 비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개체를 확보하는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인간에게는 좀 더 한층 상위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바로 야망이다. 그것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든, 아니면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이든.
정치적으로 분류를 하자면 흔히 진보나 보수라고 말을 하는데 전자는 주로 젊은 세대들로 새로운 변화를 원하고 후자는 주로 보수층으로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진보를 고수하는 이들도 있고 일찍부터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은 대체로 젊을 적에는 진보고 나이가 들어서는 보수로 노선을 갈아탄다. 통계적으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