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학의 군림자-97화 (97/241)

97화

이 사고 원전은 방사선 물질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석관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그 상황에서 반감기 가속기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방출된 열로 인해 방사성 물질이 기화되고 오래되어 부식된 석관 사이로 뿜어질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냉각 장치의 설치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서 미국의 방사능 제거 팀은 반감기 가속 장치를 이용해 체르노빌까지 가는 안전지대를 만드는 것을 우선했다. 일단 방사능을 여전히 유출하고 있는 핵심을 처리해야 다른 지역의 처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청소한 곳에 다시 먼지가 쌓이듯이 방사능 물질로 다시 오염될 수 있었다.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사고 원전을 덮은 석관은 너무 오래되었고 부실했으며 이 석관을 유지 보수하기 위한 전세계의 기부금은 부패로 인한 관리 부실로 여기저기 유실되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이 생긴 것으로 우크라이나는 다행이었다. 시일이 많이 걸리기에 사람이 안전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방사능 수치를 낮추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예산도(미국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많이 들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며 언제고 방사능의 처리가 완료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이제 원전 사고로 인한 피해는 무한대가 아닌 예측과 산출이 가능한 지표가 되었다.

몇 년이나 막대한 예산을 들여 체르노빌을 정화한다는 정부의 계획은 공화당의 많은 비난을 샀지만 정부측에서 직접 공화당 핵심 인사들과 만나 대화를 하여 설득했다. 체르노빌의 일은 장기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였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가장 간단한 방법은 폭압과 공포를 이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결국 피지배층의 항거를 불러온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유를 위한 인간의 갈망은 죽음에도 굴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좀 더 세련된 방법이 선호 되었다. 그것은 자원을 배분하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예시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지주는 땅이라는 자원을 배분하는 권리를 가짐으로서 소작농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다. 만일 산업 혁명이나 공산주의 혁명으로 사회 경제의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여전히 지주와 소작농으로 이루어진 지배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러지 않다고 자원을 배분하는 권력관계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세상은 생산 수단, 즉, 자산을 가진 자본가와 그들의 생산 수단에 기대에 생활을 하는 프롤레타리아로 나뉘었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은 수평적이어야 하지만 결코 수평적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신뢰적 관계가 어떻게 형성 되느냐에 있었다.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는 피지배층이 원하는 것은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노력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다면 대체로 만족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때문에 그 사회의 시스템을 유지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시스템을 지배하는 지배층에게 있었다. 어떻게 피지배층을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에 순응시키는가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방법을 위한 수단은 다양했고 지배층은 여러기라고 궁리를 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유지해 나간다. 그리고 이런 지배층에 성향에 의해서 피지배층의 운명은 결정된다. 피지배층을 노예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정당한 계약 관계를 유지할 것이냐? 물론 피지배층은 지배층이 부여한 운명에 순응하거나 저항한다. 그리고 그 결정의 배경을 설정하는 것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신뢰관계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신뢰할 수록 그들은 지배층이 만든 시스템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도 인간인지라 멍청한 것들이 있다. 그들은 폭력과 공포로 피지배층을 지배한다. 그 방법은 눈에 보이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쾌감을 말초적으로 한 껏 음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지배의 방식은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신뢰를 무너뜨려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는 별로 없다. 역사적으로 국가나 사회가 붕괴될 때, 지배층은 언제나 그랬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세련된 방식이 대중들이 그 사회 시스템을 자신들이 선택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중세 유럽에서 종교로 대중들을 세뇌 시켰듯이 말이다. 믿음이란 이름으로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중을 ‘설득’하는 여러 방법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자원’의 배분이다. 이 자원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쉽게 말해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의미한다. 일자리, 돈, 직위, 명예, 각종 수단이 이에 해당하며 인간은 이러한 자원을 배분해주는 존재에게 기댈 수 밖에 없다.

사회나 국가보다, 회사가 더 중요한 직원은 결코 내부의 비리를 발설하지 않는다. 사회나 국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보다 회사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더 클 때(혹은 그렇다고 생각할 때), 개인의 충성심은 회사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다. 인간은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되는 이의 편을 들기 때문이다. 이런 피지배자가 많을 수록 이들의 지지를 받는 지배자는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자원 배분으로 인한 이런 권력 관계로 이야기를 돌리면 이런 일은 비단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국제 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제 3세계에 대한 서방 세계의 구호, 그리고 의존.

그것은 어떤 외교적 방법보다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물론 호구가 되지 않게 적절하게 흔들어 주면 금상첨화다.

이번 체르노빌을 이용하는 미국의 계획 역시 그와 일맥상통한다.

체르노빌은 과거 소련 붕괴 이전에 지어졌고 현재,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존재한다. 물론 방사능 오염지대는 그 두 나라 뿐만 아니라 바로 옆 러시아까지 약 600km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 중에 영구 출입 제한 지역만 해도 약 500 제곱 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넓었고 이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골칫덩이, 아니 암 종양이었다.물질은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확산하는 물리화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생물과 바람, 물 등으로 인한 자연의 움직임을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오염 구역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때문에 여전히 방사능 제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주변 지역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골칫덩이를 미국이 나서서 제거해 준다? 우크라이라는 서방세계, 즉 유럽에 우호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아니, 더 좋아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방사능이 제거되면 바로 위에 있는 벨라루스는 몹시 우크라이나를 부러워 할 것이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이에 미국은 ‘방사능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이란 자원을 이용해 벨라루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전통적인 친 러시아파인 벨라루스는 입장을 바꿔야 할 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는 고작 그 정도로 미국과도 손을 잡는 우방을 달가워 하지 않겠지만, 사실 방사능은 ‘고작’이라고 할 정도로 가벼운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방사능 사고의 위협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이를 좀 더 부각시키게 된다면 벨라루스는 방사능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정권 차원에서도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벨라루스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사능을 좌시하는 정부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러시아의 서쪽에 있는 두 국가를 미국의 영향권 아래 두게 되면 러시아는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전통적인 우방을 빼앗는 것이니 미국은 +1, 러시아는 -1로, 2라는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정보부에서 이런 역학 관계를 모를리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움직이자 마자 과거 소련의 잘못이니 러시아 역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겠다면서 한 발 걸치려고 들었고 미국은 아직 개발 단계라 체르노빌 방사능 정화 작업은 대규모 실험에 불과하다면서 거절했다.

이에 행복한 쪽은 우크라이나였는데 러시아에서 피해 보상으로 각종 이권 등을 챙겨주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해 양쪽에서 혜택을 받는 중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러시아가 우호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으며 피해 복구를 위해 전폭적 지원을 해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소련이 싸질러 놓은 거대한 똥덩이. 그리고 그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만일 러시아가 보상을 한다고 한다면 방사능을 막기 위해 영원히 보상을 해야 한다. 피해규모가 무한대란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강현의 기술로 인해서 방사능의 피해가 무한대가 아니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영원히 보상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러시아로서는 미국이 딴지를 걸기 전에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미국이 여태 잠잠히 있었던 것은 자국에서도 원전은 운영하기 때문이었다. 원전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그 위험성을 부각시키는 체르노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가 없다.)이 복잡한 외교전에서 미국과 러시아, 과연 어디가 이득을 볼 지는 시간이 지나야 확연히 드러날 것 같다.

= = = = =

“박사님!”

샐리가 쪼르르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올해 졸업을 한 그녀는 많은 갈등을 했다. 이대로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냐 아니면 쌓아볼 것이냐.

그녀는 인턴 생활을 하면서 연구는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우는 것은 즐거웠고 머리도 좋았지만 진리를 탐구할 정도로 학자적 기질이 풍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현의 사무 업무를 보조해 주면서 비서처럼 누군가를 보조해 주는 것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NASA에 전격적으로 취업해 강현과의 접점을 늘렸다.

“샐리. 이제 떨어지는게 어때요?”

“저 여기에 취업하는데 성공했다고요. 기쁘지 않으세요?”

“아아, 기뻐요.”

“전혀 기쁜 것 같지 않은데요?”

샐리의 말에 강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기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 정보부의 대(對) 강현 작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강현을 평생 미국의 시민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타국의 작전(주로 미인계)를 막고 그에 대한 유효한 방법으로 강현에게 미모의 재원을 붙이는 시도는 다각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다.

샐리의 NASA 취직 역시 그러한 맥락의 연장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특혜를 받았지만 그 개인은 그저 운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리하지 않게 일을 진행했다.

그러나 강현은 전 세계 정보부의 아즈삭 시리즈를 통해서 그 자신이 대상인 작전이나 정보에 대해서는 모두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미 정보부에서 샐리를 통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샐리가 밉지는 않았지만 타인의 의도에 따라 자신이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 당하고 있는 샐리에게 약간의 동정심이 있을 정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