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평균 자유 행로는 어떤 입자가 다른 입자와 부딪히기 전까지 움직이는 평균 거리를 뜻하며 챔버의 크기는 이 평균 자유 행로와 온도에 따른 플라즈마의 속도를 고려해 플라즈마가 외벽에 부딪히는 빈도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최소 크기로 설계 되어야 했다.
그래서 표면적 당 부피가 가장 큰 구형의 챔버가 선택이 되었고 또 거기에는 출력이 강한 고주파 레이저 장치가 붙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강현이 만든 장치는 끝에 동그란 구형의 챔버가 달리고 한 쪽에는 레이저 장치가 달려 마치 온도계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럼 해볼까?”
데이터 축적을 위해서는 실제 장비를 이용해서 계속 실험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같이 그리 기다리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본적인 설계 개념은 이미 한 번 만들었던 인공 베타 붕괴 장치와 동일했기 때문에 외주 업체들은 빠르게 장비를 제작해 설치해 주었다. 겨우 한 달이 걸렸다면 믿겠는가?
겨우 한 달 안에 장치를 완성하는데 성공한 외주 업체들의 능력에 강현은 감탄하면서 약속했던 거액의 보너스를 지급했고 외주 업체는 역시 큰손이라면서 기분좋게 계약을 마무리 했다. 그러면서 명함을 남기며 차후 또 이런 일이 있을 때 자신들의 업체를 이용해 줄 것을 부탁했다.
중성미자 방출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끝나자, 강현은 이제 직접적으로 중성미자의 방출을 검측하기 위해서 또다시 장비를 설치했다.
원래 중성미자라는 것이 전기적 중성이다. 이 중성미자를 검측하기 위해서 이 중성미자가 다른 어떤 것과 반응해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켜야 하는데 이 중성이라는 점으로 인해서 반응성이 매우 낮다. 때문에 대부분 중성미자 검측장치는 대형화 되어 있다. 반응빈도가 작기 때문에 원활한 관찰을 위해서는 관측장치의 규모가 커져야 하는 것이 지금의 기술 수준인 것이다.
하지만 강현은 그렇게 큰 장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인공 중성미자 방출 장치를 중심으로 광학 센서와 증류수를 함께 집어넣은 물통을 1미터 간격으로 배치했을 뿐이다.
과거 1998년도 일본에서 폐광산에 물을 잔뜩 집어넣고 이 물에 우주에서 날아온 중성미자가 물과 부딪혀서 발생하는 체렌코프 복사를 관측해 실제 중성미자의 존재와 질량의 존재를 확인한 바가 있다. (체렌코프 복사란 어떤 매질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받아 대전된 입자가 그 매질에서의 빛의 속도보다 빨리 움직일 때 발생하는 발광 현상이다. 일종의 전자기적인 소닉붐 현상으로 비유하는데 방사능을 뿜어내는 원자로 노심이나 폐 핵연료봉 보관 수조에서 관찰할 수 있다.)강현 역시 페렌코프 복사를 이용해 중성미자의 방출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작은 물통으로 중성미자의 방출을 확인할 수 있을까? 반응성이 너무 적어서 폐광산 가득 물을 집어넣어 관찰할 정도인데 말이다.
하지만 강현이 방출하는 중성미자의 에너지는 매우 작았다. 일반적으로 관측되는 중성미자의 에너지가 수 MeV라는 것을 비교하면 겨우 KeV 수준에 불과하다. 때문에 중성미자의 흡수 현상이 더욱 용이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면 모든 반응에는 유효 충돌이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절할 에너지를 가지고 적절한 방향으로 입자들이 충돌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력에 대해서는 탈출 속도라는 개념이 수반되는데 이는 마치 제2 우주 속도처럼 일정 속도 에너지 이상을 가지면 인력권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중력이나 핵력에 의한 인력의 영향을 무시할 정도의 운동에너지가 유효 충돌을 위한 궤도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분열을 위해서 중성자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감속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태양이나 원자로에서 생성되는 일반적인 중성미자가 가진 에너지보다 훨씬 작은 운동에너지를 가진 중성미자를 생성하여 반응성을 높인다는 강현의 발상은 중성미자의 검출은 물론 차후 방사능 물질의 반감기를 줄이기 위한 촉매 작용에도 매우 용이할 것이 분명했다.
[실험을 시작합니다.]
강현은 두근두근 거리는 심정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실험과정에서 강력한 에너지를 이용한 인공적인 베타 붕괴 과정은 순수하게 양전자나 중성미자만 내뿜는 것이 아니라 양전자 플라즈마의 격한 움직임으로 인해서 X선이나 양전자와 전자의 쌍소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마선 역시 발산하기 때문에 실험실은 원자로 수준의 두꺼운 콘크리트 벽과 두꺼운 납 내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거기에 항상 가우스 계측기가 설치되어 있어 HA 시리즈가 강현이 실험실로 들어가기전에 항상 방사능을 체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잔류하는 방사능은 극히 적었다. 알파선은 헬륨가스가 되어버리고, 베타선은 전자의 집합이니 금속에 부딪혀 접지된 곳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감마선은 빛의 속도로 전파되어 사라져 버리고 남을 만한 것은 중성자와 결합한 방사선 동위원소 뿐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는 극미량의 중성자만이 생성되어 전체적인 방사선량은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중수소는 매우 안정해 붕괴되기까지의 반감기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장비 자체의 재료와 중성자가 결합하는 경우인데 사실 이 경우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인공 베타 붕괴를 할 때마다 장치에서 생성되는 중성자와 챔버의 원소가 결합해 방사선 동위원소가 되고 그로 인해서 챔버에서 뿜어지는 방사선량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성자와 챔버의 결합을 막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 정도의 양자 컨트롤은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절대로 무리였다. 그렇다고 중성자를 잘 잡아먹는 우라늄을 쓰면 그것이 방사능 오염이 되어버린다. 설사 강현의 중성미자 방출장치로 방사선 동위원소를 인위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고 해도 챔버를 구성하던 원자가 더 이상 그 원자가 되지 않기 때문에 결함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챔버의 재질인 철의 안에 있는 탄소. 철 원자핵의 경우에는 모든 원소중 원자력적으로 가장 안정한 물질이 바로 철이기 때문에 중성자를 흡입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다. 왜냐면 핵융합 반응의 최종 산물이 바로 철이기 때문이다. 철보다 원자번호가 높은 물질들은 핵융합이 아닌 항성의 폭발 과정에서 생성되기 때문에 핵붕괴로 인해 에너지가 생성되는 것은 철보다 큰 원자번호를 가진 원소들만이 가능하다.
아무튼, 탄소의 방사선 동위원소가 붕괴하면 질소가 되는데 이 질소는 매우 반응성이 큰 물질이다. 거기에 탄소가 있는 자리에 그보다 원자 반경이 큰 질소가 들어가게 되면 금속의 미세구조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만일 이 질소(N)가 서로 만나 질소 기체(N2)가 되어 버린다면 미세 구조에 기체가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된다.
물론 수소 취성처럼 질소가 금속 내부로 확산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매우 떨어지지만 높은 온도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챔버의 경우, 열충격과 함께 생기는 내부의 결함(빈공간, 균열), 그리고 그 결함을 통해서 전파된 질소 원자가 질소 기체가 되어버리면 수소 취성처럼 금속 내부에 기포가 생겨버리는 현상이 발생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강현은 실험을 강행했다.
[어째서입니까?]
“궁금하잖아.”
사실 생각보다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었다. 철의 탄소 함유량은 강철의 경우 매우 낮다. 일반 주조철의 경우 대략 2%의 탄소가 들어있으나 그로 인해서 경도는 높고 연성은 낮다. 하지만 질긴 철을 만들기 위해서 이 탄소 비율을 필요한 만큼 줄이거나 다른 합금 원소를 집어넣는 것이 바로 강철이란 것이다.
따라서 중성자가 탄소와 결합해 방사선 동위원소를 만들 확률, 그리고 그 탄소가 붕괴해 질소가 되는 확률, 또 그 질소가 철 원자들 사이를 비집고 이동해 질소 기체가 될 확률을 모두 곱하면 정말로 위험할 확률은 뚝 떨어진다. 차라리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보다 레이저 장치나, 진공펌프에서 문제가 먼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즈삭은 강현의 말대로 실험을 계속 진행했다. 자신도 강현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이미 만들어 놓은 베타 붕괴 장치에 대해서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강현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에는 그동안 강현이 가르쳐 놓은 명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실험장비를 조절하면서 남은 시스템 소스를 이용해서는 정말로 어떻게 되는지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그러나 강현은 모니터로 실험장과 아즈삭이 표시한 각종 지표 숫자들을 잘 관찰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냥 콜라를 빨고 팝콘을 씹었다. 실험이라는 것이 극단적으로 시간이 덜 걸리는 실험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실험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중성미자 검출 실험은 후자에 속해 있다. 언제 어디서 날라올지 모르는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0.02mlx(lx:럭스, 조명도 단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출력을 상승시킵니다.]
맑은 날, 보름달이 있는 환경의 광량이 약 0.2 럭스 (lx)정도 된다. 직사광선의 경우에는 삼만에서 십만 럭스이고 사무실에서 권장되는 조명이 약 300 럭스 정도다. 그 만큼 미약한 빛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빛의 밝기는 파장의 길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광자의 양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빛이 밝을 수록 중성미자의 흡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일 중성미자의 흡수 확률이 일정다면 중성미자의 발생 빈도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0.002lx.... 0.1lx.... 1lx.]
아즈삭은 출력을 1lx에 고정시켰다. 가장 가까운 물통에서 발하는 푸르스름한 빛은 이제 모니터로도 관찰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럭스 수치가 점점 떨어졌다. 파동의 세기는 진원지와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감소하는 원리다. 왜냐면 진원지를 중심으로 한 구의 표면적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에너지 보존의 원리에 의해서 항상 같기 때문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구의 크기가 커질 수록 표면적도 증가하기 때문에 에너지 밀도는 면적에 반비례해서 감소하기 때문이었다.
“생각보가 대기에 의한 흡수는 적은 가보네.”
[계산 결과에 의한 럭스의 감소량은 약 1% 정도에 불과합니다. 대기중으로 흡수된 중성미자는 약 1%에 불과합니다.]
강현은 푸르스름에 하게 빛나는 물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속의 중성미자를 생성하는 것은 성공했다. 그리고 생각과 달리 중성미자의 대기중 소실율도 극히 적었다.
중성미자의 운동에너지를 조절함에 따라서 그 수치는 변동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건 이제부터 데이터 축적을 위한 여러 반복 실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 중성미자를 이용해서 본격적으로 방사능 원소의 반감기를 가속시키는 실험을 해야 할 차례가 온 것이다.
그리하여 NASA에서 실험용으로 사용할 방사능 물질 샘플들을 받아왔다. 두터운 납용기로 뒤덥힌 그것들은 각각 정순하게 제련한 초 우라늄 원소들이었다.
HA 중 한기가 방사능 방호복을 입고 초우라늄 원소들 중 하나인 플루토늄 조각이 든 시험관을 설치했다. 인공적으로 반감기를 가속시키면 고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폭발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냉각기를 설치했다. 사실 이 냉각기는 정밀한 칼로리미터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특제품으로 반감기 과정에서 일어나는 열량의 총량을 측정하도록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