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역시 아즈삭은 똑똑해.”
강현은 즉시 무슨 말인지 즉시 알아듣는 아즈삭에게 만족하고는 계속 휴가를 즐겼다. 세상 이모저모를 살피는 것 역시 사고를 넓히고 영감을 얻는데 유익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강현은 편하게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다시 방학이 돌아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는 샐리로 인해서 마음 고생이 심해졌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질 수록 불편해졌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가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에게 자신을 포기하라고 해도 그녀는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고 맹세했다. 그 맹세의 단단함은 그동안의 시간으로 충분히 인지했다.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 강현 자신도 스스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녀 역시 그런 사람일 수 있었다. 그녀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 변하는 것은 자신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처럼 변하지 않는 샐리, 샐리처럼 변하지 않을 자신. 그런 모순적 상황속에서 강현이 내린 결론은 결국 상황 유지였다. 자신은 계속 도망가고 그녀는 쫓아오는 이 거리를 계속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샐리, 이건 뭡니까?”
강현은 어느날 자신을 데리고 프로젝트 실로 데리고 가는 샐리에게 물었다. 그 방은 원래 직원 교육이나 어떤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간단한 회의를 할 때 사용하는 용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용도와도 달랐다.
‘Happy birthday!’
“오늘, 박사님 생일이잖아요.”
“.....”
강현의 기분은 이상했다. 생일을 챙긴 것도 아주 오래전 일인 것 같았다. 아니.. 제시가 있었을 때에는 중간에 한 번 챙기기도 했지만 그 뒤로 챙기지 않은지 겨우 2번이었다. 제시가 죽은 후로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자, 들어가요.”
샐리는 침묵하는 강현의 등을 밀어 파티장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 동안 친분을 다졌던 NASA의 직원들이 강현에게 축하의 말을 전해 주었다. 그중에는 아즈삭 시리즈의 관리를 위해 여기저기 파견다니며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컴퓨터 개발부의 직원들도 있었다.
강현은 웃으면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다가 사브리나를 발견하고 잠시 굳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사브리나.”
“훗! 오래간만이지?”
“네.”
제시와 같은 연구실을 쓰던 사브리나와 강현은 서로 친분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시가 죽은 이후로 강현은 한 걸음도 연구실로 가지 않았고 사브리나 역시 일부로 강현을 찾아오지 않았다.
둘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굳이 말은 필요없었다. 제시의 친구였던 사브리나는 그녀를 잊지 못하는 강현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망가지는 것 같지 않았기에 뭐라고 조언해 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축하객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면서 샐리를 떠올렸다.
‘도와주세요.’
당돌하다면 당돌한 그녀의 행동에 처음에는 불쾌감이 일었지만 강현이 이대로 계속 혼자 사는 것을 제시가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둘의 사랑을 옆에서 지켜본 그녀였기에 제시가 강현이 인생을 괴롭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이 파티에 나왔다.
하지만.. 담담한 강현의 눈빛을 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강현은 상처를 극복했다. 제시에 대한 것을 어떻게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까지 자신이 간섭할 자격은 없었다.
사브리나는 언제 강현 옆으로 달라붙을까 눈알을 돌리며 타이밍을 재는 샐리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강현의 왼손 약지에 끼인 두개의 반지를 확인한 사브리나는 샐리에게 미안해졌다. 둘 사이의 관계는 둘 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이 좀 약간 들어가고 밤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 11시가 되니 강현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왜?!”
한참 즐겁게 여성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컴퓨터 개발부의 직원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이 좋은 분위기를 끝내자고 말할 줄은 몰랐다.
“이제 잘 시간이라서요.”
“에이. 난 또. 그러지 말고 계속 즐기자고.”
“즐기실 분은 계속하세요. 저는 졸려서 자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강현은 반쯤 감긴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이쯤되니 강현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슬슬 주변 정리를 하면서 파티를 마무리할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파티의 주인공이 사라지니 파티를 유지할 이유 역시 없었던 것이다.
강현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숙소로 돌아가려는 중에 샐리가 바래다준다면서 달라붙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그랬어요.”
“.....”
샐리의 질문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샐리는 그런 강현의 얼굴을 지긋이 보더니 말했다.
“거짓말.”
“......”
“눈빛이 조금도 즐거운 것 같지가 않아요.”
이번에는 강현이 침묵했다. 그는 몇 걸음 앞으로 내딛었고 그뒤를 샐리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가자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죠. 하지만 인간이 망각을 할 수 없다면 어떨까요?”
“.....”
“저는 생각이 많습니다. 한시도 생각을 멈춰 본 적이 없죠. 상상력을 제어하지 않고 마음대로 놔두면 공상, 추억, 논리적 추론, 아이디어, 미래 예측 등 지능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행하죠.”
뇌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심지어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는 축적된 정보들을 정리하고 처리하기 위해서 여러 활동을 한다.
“파티는 확실히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그 즐거운 장소와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저를 슬프게 만들었죠.”
“그건!”
“샐리.”
강현이 말을 가로막았다.
“이런 말해서는 미안하지만 제 인생에서 반려는 한 사람 뿐입니다.”
사람은 개인마다 다 다르다. 그렇기에 강현이 저런 사람일 가능성 역시 있었고 강현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왜 또 그 이야기를 해요? 이미 옆에 있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뾰롱통한 목소리. 강현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이번에도 거절과 쫓아옴이 공존했다.
“강현은 로맨틱한 남자네요.”
“로맨틱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집이 셀 뿐이죠.”
“그래서 더 좋아요.”
샐리가 은근슬쩍 강현의 팔에 팔짱을 껴왔지만 강현은 슬쩍 팔을 뺐다. 그렇게 둘의 실랑이는 강현이 연구실 밖으로 샐리를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 =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니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강현은 두 달동안 인공 베타 붕괴 장치에 사용된 기술을 응용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구상하고 아즈삭과 시뮬레이션으로 검증했다.
다양한 기술이 나왔지만 일단 인공 베타 붕괴 장치의 실제적인 사용 데이터를 확인하고 나서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둘은 결론을 지었다.
이 인공 베타 붕괴 장치는 태생적으로 방사능을 뿜어내고 갖가지 실험을 위해 방사성 물질들을 사용할 예정이기 때문에 설치와 생산에 대해서 정부의 허락이 필요했고 정부는 적법한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편의를 보장했다. 장치가 만들어지는 2달 안에 방사선 물질 사용 허가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처리해 준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방사선 문제로 인해서 연구실의 위치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전해왔다. NASA에서도 우주 방사선 때문에 방사선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연구실이 있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강현이 있는 연구실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인적드문 한산한 곳이었다.
강현의 연구 스타일을 알고 있는 NASA에서는 강현에게 연구실을 배정해 주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 역시 마련해 주었다. 물론 숙소는 연구소 안에 있는 방들 중 하나였고 강현에게 배정된 연구실에서 걸어서 4분 이내에 있는 곳이었다.
숙소에 짐을 푼 강현은 인공 베타 붕괴 장치를 설치하는 장면을 잘 감독했다. 아무리 설계도를 주었다고 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장치들을 결합하고 설치하기 시작하는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장치가 베타 붕괴를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장치라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베타 붕괴를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일이 가능한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반감기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어떤 물질의 양이 처음 존재했을 때의 반으로 줄어드는 시간을 말한다.
이 반감기는 1차미분방정식으로 구하게 되는데 왜냐면 시간당 물질이 줄어드는 양, 즉 감소 속도는 그 물질 자체의 양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1차미분방정식은 매우 단순한 문제로 미분방정식을 배운 고등학생도 풀 수 있는 문제지만 각종 화학 공업분야에서 수치적, 정량적인 부분을 제어하기 위해 두루쓰이는 중요한 수식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화학 반응에서 이 반감기는 온도, 농도, 압력, 촉매 등 여러 요인에 의해서 마구 변화된다. 하지만 방사성 물질의 반감기는 그렇지 않다. 방사성 물질이 붕괴하는 메커니즘에 간섭하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의 반감기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서 만든 기술이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법이다.
“박사님. 그 인공 베타 붕괴라는게.. 정말로 가능합니까?”
“글쎄요. 이론적으로는 많는데 그 이론이라는게 아직 검증이 되어 가설 수준에 머물러 있죠. 이번 장치가 생각대로만 작동을 하면 가설을 검증할 수 있을 겁니다.”
“아, 그 신 통일장 이론을 말씀하시는 군요.”
“잘 알고 계시군요.”
강현의 말에 기술 책임자가 쑥스럽게 뒷통수를 긁었다. 이쪽 계통, 실험에 관련된 장비를 제작하고 납품하며 관리하는 인력들은 과학 기술에 관련된 기초 지식은 물론이며 최신 동향 역시 습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영업이 되지 않는다.
작업은 차근 차근 진행되어 완성에 약 일주일이 걸렸다. 강현은 완성된 장치를 보며 흥분에 몸을 떨었다. 실패냐 성공이냐? 성공한다면 이루 기분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을 것이다.
강현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장치를 가동했다.
[인공 베타 붕괴 장치를 가동합니다.]
아즈삭의 목소리와 함께 HA 세 기가 가동 대기에 들어갔다. 원격으로 조종되는 이 HA는 훌륭한 연구 보조였다. 그리고 아즈삭 혼자만으로도 연구 협력자는 더 이상 필요없었다.
진공이 된 챔버안으로 수소 가스가 흘러 들어갔다. 방전을 통해 플라즈마를 만들고 밀도를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양성자 밀도를 증가시킵니다.]
양성자는 그 자체로 강력한 산화물질이다. 어떤 물질이든 전자를 빼았아 산화시켜버린다. 하지만 외부에 접지된 챔버안에서 양성자는 단지 전자만을 빼았을 뿐, 챔버를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이 플라즈마에 적용되는 전기장은 매우 복잡한 삼각함수 결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플라즈마를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 위해, 양성자가 가속되는 운동에너지를 고려한 수식으로 직류와 교류 파장을 겹쳐서 만든 전기장이었다.
[임계치 도달. 자외선 레이저를 조사합니다.]
드디어 자외선 레이저를 가해서 양성자끼리 충돌을 일으킬 순서가 되었다. 자외선 레이저를 가하자마자 챔버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아즈삭은 강현이 짠 프로그램대로 레이저의 출력을 조절하면서 온도의 상승을 제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