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둘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자정주의 보수세력이 대세인 것 같은데 도무지 자신들을 끼워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정주의를 촉발시킨 강현을 뒤에 업을 수만 있다면 자신들도 대세에 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의 머릿속에는 강현의 연구 감시에 관한 음모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은 도태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있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렇군요. 흐음.. 일단 이야기는 해보기로 하죠.”
강현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역시 온건파인 강현이라면서 모건과 라이펀은 다소 안심하고 돌아갔다.
[박사님. 정말로 저 둘을 용서해 주실 겁니까?]
“아니.”
[그럼 거짓말을 하셨군요.]
“응. 내가 저들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거든.”
사실 강현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둘을 안심시킨 것이다. 물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저렇게 모건과 라이펀의 몸이 달아있으니 제임스에게 주의하라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만 지나고 둘의 몸이 달아오르고 있을 쯔음, 제이먼 옐리가 강현에게 방문을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둘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서로를 탐색하듯이 관찰했다. 강현은 강현 대로 앞의 둘과 전혀 다른 관조적 태도의 옐리가 신기했고 옐리는 강현의 전신을 관찰하며 과연 자신의 예상대로의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뭐죠?’
강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태도에 물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목적?”
강현은 시치미를 땠다. 그런 그의 태도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옐리는 차근 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귀하가 제창한 자본주의의 자정이라는 논제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일차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케인즈 주의에 의한 수정자본주의가 대두되었었죠.”
케인즈 주의란 적극적인 정부 개입에 의한 계획 경제로 시장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계획 경제는 당시 공산주의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샀었다.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손이 허구라는 것이 증명되자 일각에서는 자본가의 사회적 책임이 대두되기도 했죠. 물론 그보다는 케인즈 주의가 더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대중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지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곧 하나의 계급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과거 귀족들이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몰락했는가? 민주주의가 대두되면서 대중은 강해졌고 자신들의 위에 서서 억압하려는 존재를 용서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언론의 존재 역시 자본가들에게는 껄끄러웠다. 부자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 그리고 그 관심을 먹고 사는 수많은 파파라치와 언론사들의 존재는 돈 많은 이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지내게 만들었다.
그들은 연예 스타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본가’란 귀족이다.
“자본은 이미 하나의 계급이죠. 자본가들이 언론사를 하나 둘 집어삼키며 자신들의 존재를 밝히려고드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고 있죠. 월 스트리트 저널이 머독에게 인수 당하고 난 뒤에 심층취재가 사라진 것 역시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탐욕을 그대로 대중에게 드러나는 탐사 보도만큼 돈을 굴리는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도 없었다.
“아무튼 현재 자정주의가 대두되어 점점 세력을 불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런 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엄청난 폐해가 배경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상황을 그린 사람은 따로 있었죠. 강현, 바로 당신입니다.”
옐리가 강현을 지목하자 강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짐작하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강 박사.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자정주의의 바람 역시 기득권층에 의해서 한낱 미풍에 그치거나 시민 운동에 그치게 될 뿐이었죠. 하지만 당신이 끌어들인 제현 투자회사, 그리고 막대한 투자금은 자정주의 세력을 결집시키고 힘을 모으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골치 아픈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옐리는 커피를 한 모음 머금으며 입을 축였다.
“그런데 말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던 게 있더군요. 세상에 별로 관심이 없어하던 사람이, 왜,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말입니다. 하루 아침에 세상에 관심을 가졌다? 사람의 성향이 그렇게 쉽게 바뀌던가요?”
“그래서, 이유를 물으러 오셨습니까?”
“그렇죠.”
강현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정주의와 전통보수주의의 갈등, 인재 영입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권력과 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강현은 옐리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학자의 기풍이었다.
이쯤 되자 강현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을 벌였는지 말이다.
“알고 싶으시면 제가 묻는 내용에 먼저 답을 해주시죠.”
“무엇인가요?”
“연구 감시 기구. 왜 만들려고 하신거죠?”
직설적인 강현의 말에 옐리는 말을 더듬거렸다.
“왜, 왜 그걸 저에게 물어보십니까?”
옐리는 언론에서 막 그런 여론을 만들어 내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현의 말이 더 빨랐다.
“월가의 거물, 모건. 그리고 미국 증권 거래 위원회 부위원장, 라이펀. 아시지 않습니까?”
공모자들의 이름이 나오자 옐리는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실 도착하기전 추론을 통해서 강현의 이번 일을 천재의 일탈이나, 어떤 호기심, 아니면 젊은 나이의 치기 어린 책임감 정도가 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모호했기에 확인차 방문했다. 하지만 이건...
“응.. 징입니까?”
“경고죠.”
“허. 허, 허.”
강현의 말에 옐리는 마른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목이 타는지 식은 커피를 벌컥 벌컥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설마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아무튼 왜 그러셨죠?”
옐리는 먼저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강현이 그런 이야기를 해줄 리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자본의 균형이라고요?”
강현은 의외라는 듯이 놀라워했다.
“자본가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니 국가, 민족, 인종, 역사, 수 많은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죠. 때문에 똑같은 자본가 계급이라고 해도 결코 뭉칠 수 없는 세력이 존재하죠.”
세계화는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자본의 탐욕을 자국의 국민에게 향하게 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자멸하지 않으려면 넘치는 자본력을 밖에서 소모할 필요가 있었다.
“세계에는 몇가지 자본세력이 있습니다. 메디치가, 흔히 프리메이슨이라며 음모론의 주체로 삼는 유럽 자본, 그리고 미국의 대두와 산업의 성장으로 나타난 미국 자본, 철강왕으로 유명한 카네니, 석유왕 록팰러 등이 여기에 속하죠. 그 밖에 중동의 아랍 자본, 화교 자본, 그 외에 각 국가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중소 자본가 세력이 있습니다.”
각 자본은 그 태생에 따라서 성향과 가치관이 다 다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힘, 자본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고분분투한다는 점이다.
“이런 자본 세력들이 연합해 카르텔을 이루기 시작하면 그 피해를 보는 건 약한 자들이 입게 됩니다. 카르텔이란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주는 것이 그 본질이기 때문에 자본의 탐욕이 서로가 아닌 아래로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죠.”
그래서 옐리는 꾀를 내었다. 자본의 탐욕을 같은 자본가에게 향하게 하는 방법은 없는가? 있었다. 약자를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자본의 손익 이해와 부합하면서 문화적 차이를 적개심으로 만들어 주고 이쪽의 덩치를 키우면 상대적으로 약한 이를 자동적으로 물어 뜯게 된다.
“흐음..”
강현은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일이 저절로 굴러가도록 일을 꾸몄다는 점에서 자신과 다른 점이 없었던 것이다.
“강 박사의 연구를 감시하는 일을 꾸민 건 미국 자본과 유태계 자본이 손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였죠. 그들에게는 돈이 걸린 일보다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강현의 연구를 감시하여 나오는 정보를 통해 이익을 공유하고 신뢰를 쌓아 발을 넓히는 화교 자본에 대항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화교 자본이 그렇게 위협적인가요?”
“네. 아무래도 민족주의에 기반한 그들의 습성은 무척이나 배타적이니까요.”
그러나 배타적 습성과 다르게 이익이 된다면 적과도 손을 잡는 것이 그들을 더 우려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들에 대한 미국 자본의 인식은 ‘평소에는 신뢰할 만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특히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그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손을 잡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중화사상을 기반으로한 그들의 민족주의적인 특성 때문에 손을 잡는 것이 거북스러웠다.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군요.”
강현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인터넷을 꽉 잡아도, 각국 첩보 조직에 스파이 로봇을 심어도 옐리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알지 못했다. 다만 자본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 내밀한 사정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는 복잡하고 비밀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일은 당사자들도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공격의 빌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완전히 우위에 올라서기전에는 겉으로는 다른 이야기를 하죠.”
“참 힘들게 사는 군요.”
강현의 말에 옐리는 쓰게 웃었다. 자본의 논리에 연연하지 않는 강현이 그들의 고충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기술 문명에서 기술을 꽉잡은 강현은 현물을 꽉 잡은 카르텔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튼 이해는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옐리 씨는 그런 일을 하는거죠? 자신에게 별로 이득이 없을 텐데.”
“호기심이죠.”
옐리는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젊었을 적의 열정, 자본의 탐욕을 목격하고 난 후의 갈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결의와 그런 결의의 마모, 그리고 그 마모 이후 세상의 흐름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남아있는 책임감의 결합.
그것은 그가 왜 자본과 자본의 충돌을 일으키는 일을 하는 지에 대해 강현이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진실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했다.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 연구실에 함부로 발을 들이민 것은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이해관계가 자신이 정한 선을 넘는 순간 타협은 어렵다.
“해서, 모건과 라이펀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옐리 씨. 당신은...”
옐리의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 일의 목격자가 되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 그러니까 사건의 전모를 알 사람만 알게 하는 역할입니까?”
이대로 모건과 라이펀이 상류층에서 퇴출 당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강현의 영향력만을 말해줄 뿐이었다. 어째서 그 둘인지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에 강현의 연구실에 발을 딛고 싶어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