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학의 군림자-78화 (78/241)

78화

즉, 그녀의 자신에 대한 감정은 순수했다. 아무런 야료도 부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인 강현이라지만 자신을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는 매몰차게 굴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면서까지 정보를 모았던 것이 그에게는 마음의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제시를 잊지 못하는 자신이 더 좋다니 할 말조차 없었다.

‘하아~... 샐리. 당신을 절대로 내게서 어떤 사랑의 감정도 보상받지 못할 겁니다.’

‘그냥 곁에 있게 해주세요.’

도대체 지난 학기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강현은 갑작스런 그녀의 애정공세가 부담스러웠다.

강현은 그녀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은 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녀는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어째 강현에게 하는 행동은 친구가 아니라 연인에게 하는 행동과도 같았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그녀의 행동에 강현은 직설적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이렇게 행동하는지 물었다.

샐리는 혀를 빼죽 내밀면서 강현을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고백을 했으니 강현으로서는 답답했다.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냥’이었다. 자신의 경우에도 제시를 그렇게 좋아하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으니 이유를 더 캐물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샐리는 정직했다. 강현에게 말했던 대로 샐리는 강현이 그냥 좋아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강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강현의 약지에 끼워진 두 개의 반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턴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녀는 계속 강현의 얼굴이 생각났고, 그의 제시에 대한 변치않는 순정이 마음에 들었고, 제시가 부러웠고, 아무튼 여러 생각과 고민 끝에 강현을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 역시 애시당초 강현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별로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강현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그것은 행동 뿐만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지키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목표는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옆이었다.

사랑을 얻진 못해도 사랑하면 된다. 그것이 그녀의 결심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녀의 결정을 미인계를 계획한 CIA의 작전팀에게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샐리와 강현의 관계에 섣불리 손을 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수방관하자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연인이나 가정이란 족쇄를 강현에게 달지 못하는 한, 강현이라는 존재는 언제든 다른 나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현의 우정과 샐리의 일방적인 사랑의 관계는 시작되었고 강현은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샐리에 대한 감정은 제시에 대한 감정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도무지 그녀의 마음에 보상할 수 없으니 계속 빚이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샐리. 이제 그만 다른 좋은 남자를 찾으면 안 될까요?”

“옆에 있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

샐리가 입을 뾰족하게 내밀며 대답하자 강현은 왜 자신이 그런 약속을 했는지 후회했다. 멍청한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왜 그렇게 대답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혼자살기로, 고독 속을 즐기기로 마음 먹었지 않았는가? 그런데 새삼 샐리에게 옆을 내어주겠다고 말을 하다니..

“제가 허락한 건 친구 관계까지입니다.”

“왜요? 이런 친구 한 명쯤 있으면 좋잖아요.”

애인같은 여성 친구? 말이 되는가 싶지만 인간관계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던 강현은 그런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샐리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하아..”

강현은 한 숨을 짓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도무지 그녀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 = = = =

“K 전술기의 성과는?”

[압도적입니다.]

마이클은 무인화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각종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을 살폈다. 그 중에는 중동에 투입된 전술 통제용 모빌아머와 K 시리즈 4 대를 한 유닛으로 묶은 전투병력은 역시나 시가전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었다. K 시리즈는 전술 통제용 모빌아머를 철저하게 보호하면서 화망을 구성하며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했다.

집기들을 모두 부수며 도탄을 만드는 강력한 화기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는 미군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씌워주었다. 전투에서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는 군대라는 이미지는 미국내의 거센 반전 여론을 잠시나마 막아줄 수 있는 벽이 되어 주었다.

마이클은 K 전술기와 그 유닛에 의한 전과를 보고 받고는 역시나 생각대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지능, 뛰어난 IT기술에 의한 전장 통제는 미군에게 압도적인 힘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힘은 미국이 곧 정의라는 말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힘이 곧 정의라는 말은 폭력주의자라는 오해를 살 수 있었지만 마이클은 정말로 힘이야 말로 정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이클이 힘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마이클은 과거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일반적인 그런 경험이었다면 마이클이 펜타곤에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당한 괴롭힘에 마이클은 침묵과 인내로 대항했다. 그리고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향한 동정어린 시선. 그러나 그 중에 누구 하나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왜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어째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을까?

집에 돌아간 마이클은 침대에 파묻혀서 고민했다. 그리고는 그래픽 노블의 영웅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들은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무리는 알아주는 꼴통들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물리치지도 못하고 그들의 표적이 되어버리면 마이클처럼 되어버릴 수 있었다.

똑같이 힘없는 이들을 동정하고 돕고 싶어하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왜 그러지 않는가?

차이는 한 가지. 힘이었다. 마이클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 아이들은 마이클을 괴롭히던 일당들을 물리칠 힘이 없었다. 때문에 불의에 침묵했다. 용기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힘없는 용기는 만용이라고 불린다.

그렇다. 아무리 정의롭고 싶은 이라도 힘이 없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다. 이 화두는 마이클의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펜타곤에 들어왔다.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테러란 무엇인가? 테러는 당하는 입장에서는 극악한 범죄였다. 하지만 테러를 저지르는 이에게 테러란 약자가 할 수 있는 전쟁의 수단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고 목적을 이루는 것이 바로 테러였다. 공포를 조장해 약한 자신들을 강자로 위장하는 것이 테러였다.

때문에 미국이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미국은 강자의 입장이었고 강자는 강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해야했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국제 사회에서 고립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군도 사람이다. 총을 맞으면 죽는다. 전장의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었다.

그렇다. 미국과 다르게 군인은 약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테러리스트들과 같았다. 급조폭발물, 자살테러. 스스로의 목숨을 도외시하는 카미카제식 공격으로 수많은 희생이 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통관을 철저하게 하고 국가 안보를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한다. 그 방면에서 전혀 여유롭지 않으며 때로는 잔혹한 짓을 벌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약자일 수록 잔혹해진다.

포로 수용소에서 포로들에 대한 가혹행위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포로에게 범죄를 저지른 미군들은 그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며 그들에 대한 공포와 적대감을 누그려뜨리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정말로 미군이 강하다면 여유가 있고 여유가 있으니 관용이 생길 것이며 가혹행위도 없고 미군이 욕을 먹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마이클의 머리속에 담긴 논리였다.

타인에게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생리라는 발상으로 보자면 마이클의 인간관은 성선설에 가까웠다. 그러나 힘이 없으면 잔혹해진다는 사고 방식은 성악설에 더 가까웠다.

어찌보면 모순적일 수는 있지만 그의 논리는 보편성을 빼고는 그리 지적할 만한 것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제우스의 개발과정은 어떻게 되고 있지?”

제우스란 무인화 프로젝트에서 무인병기의 제어를 맡을 전술 통제 인공지능의 이름이었다. SNP의 성능에 힘입어 컨테이너 반 정도의 크기로 약 100여대의 무인 병기를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렇다면 차량이나 비행기에 실어 언제든 전장에서 직접 제어할 수도 있는 것이 제우스의 장점이었다.

[소프트웨어 개발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강현 박사가 만들어준 개발툴이라면 완성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공헌한 인물은 다름 아닌 강현이었다. 강현의 SNP가 없었다면 프로젝트를 시작조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 개발을 위한 알고리즘 툴을 제공해주어 제우스의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100테라가 넘어가는 개발툴은 제우스 제작팀의 시간과 노고를 크게 줄여주었다. 하지만 강현은 그 두가지를 제공한 것 이외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 개발을 계속하게.”

[네, 부장님.]

그리고 한 달 후, 제우스의 프로토 타입이 나왔다. 그리고 사고가 터졌다.

= = = =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원인 불명으로 제우스의 사고 회로가 폭주했다.

“빨리 원인을 분석해봐!”

“저, 접근을 거부합니다!”

제우스 개발팀은 갑작스런 에러 메시지에 사색이 됐다. 지금까지 짠 인공지능이 날아가게 생겼다.

그러나 개발팀의 생각보다 사태는 더 심각했다.

우우웅!

제우스를 완성한 후 실험을 위해서 펜타곤 무기 실험장 기지 안에서 가동 실험을 하던 무인화 병기가 연구원의 제어를 벗어난 것이다.

[적을 제거할 것.]

[명령확인.]

암호화된 전파로 명령을 수신한 탱크, 헬기 한 쌍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탱크에 장비된 중기관총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던 연구원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불꽃이 뿜어졌다.

투르르륵!

연구원은 육편이 되었고 노트북은 박살이 났다. 가동 실험 중 사격 실험도 있었기에 실무장을 시켜놓은 것이 큰 참사를 불렀다. 그나마 연구 실험 단계라 탱크 한 대와 헬기 한 대만 무인화 시켜 놓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탱크의 중기관총이 연구원을 짓이기고 나자 이번에는 무인 헬기가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헬파이어 미사일이 실험을 하는 격납고의 문을 부숴버렸고 무인 헬기가 격납고를 벗어나 인근 도시로 향했다. 도시의 건물들에게 헬파이어 미사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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