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런데 이상한 소식을 알게 되었다. 김청송의 집안이 거덜났다는 것이다. 사업에서 밀리고 사기를 당해 재산을 날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청송은 어디론가 납치당했다가 식물인간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집안이 망해서 그 뒤로는 어찌됬는지 알길이 없다는 것이다.
홍일헌은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대만으로 간 채경환, 의원직을 내려 놓고 요양을 한다며 필리핀으로 간 이상용에게도 연락을 했지만 역시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채경환의 집은 강도를 당했고 이상용 역시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집안은 차후에도 화재, 교통사고, 사기, 고소, 고발, 묻지마 폭행 등 여러가지 액을 당하면서 망해버렸다고 한다.
홍일헌은 이제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강현의 원수들이 차근차근 제거되고 있었다. 설마 설마 했던 것이 확실해졌다. 강현이 노리는 것은 복수였다.
“사, 사실이오?”
박기호 대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국내에 남은 이들은 자신들 2명 밖에는 없었다. 아니 주변에 그 일과 관련된 몇이 더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책임은 그저 잠시 눈을 감거나 관행대로 일을 처리해 주었을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연루된 이들은 이미 각자의 몫을 받고 입을 다물고 외국으로 이민을 갔거나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렇소. 그의 목표는 확실하오.”
바로 자신들..
홍일헌의 확신에 박기호 대장이 턱을 앙다물었다. 설마 과거의 일이 십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렇게 목을 조여 올 수 있다니..
“어떻게 하는게 좋겠소?”
“....”
박기호 대장의 질문에 홍일헌은 침묵했다. 자신도 그리 신통한 방법이 없었다.
“자수.. 는 어떻소?”
“그가.. 자수 정도로 우리를 놓아주겠소?”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들이다.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법의 심판을 받은 것만으로 일을 마무리 하겠지만 강현은 평범한 소시민이 아니다. 거대한 부를 가지고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권력자였다.
또한 외국으로 도망간 이들의 가족들까지 철저하게 무너뜨려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현 그룹을 통해 보여준 집요한 의지는 타협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했다.
때문에 둘의 판단은 동일했다.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신속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저번에 김청송이 말했던 것, 기억하오?”
홍일헌이 입을 열었다.
“.... 미쳤소?”
박기호가 기겁을 했다.
“그외에 방법이 있소?”
자신들이 강현을 어찌할 방법은 없다. 그보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권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는 앞서간 3명처럼 될 것이 분명했다.
쿠데타는.. 최소한 자신들의 안전을 지킬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도망친 것 만으로도 파멸한 세사람에게는 끔찍한 형벌이다. 그러나 강현은 그정도로 용서하지 않고 기어코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홍일헌과 박기호는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쿠데타는 최소한의 자위책이었다.
그렇다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언인가?
나치의 친위쿠데타는 게르만 민족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혼란를 수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렇다. 명분이다. 두 사람에게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힘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명분은 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분을 지어낼 정도의 힘은 없었다.
때문에 힘있는 자들의 힘을 끌어낼 명분이 했다. 이른바 명분을 위한 힘이 아니라 힘을 위한 명분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들은 고뇌를 거듭하다가 아주 낡은 명분을 선택했다.
‘이 나라를 빨갱이에게서 지키자!’
그 표적은 제현 그룹이었다. 제현 그룹의 경영 행위는 자본주의와 대치점이 많았다. 회사의 발전이 아닌 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방식은 기존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세력이 보았을 때에는 공산주의와 다름없는, 빨갱이와 다름없는 방식이었다.
분명 한국의 보수세력들은 이런 제현 그룹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홍일헌과 박기호는 자신들이 아는 보수세력들을 돌아다니면서 제현 그룹에 대한 불만 세력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제현 그룹은 ‘빨갱이 기업’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빨갱이 기업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개소리인가? 공산주의에 물든 자본주의의 꽃이라.. 멍청한 소리였다.
당연히 제현 그룹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주류 신문들, 권력의 나팔수가 된 언론에서는 제현 그룹을 빨갱이 기업으로, 급기야는 나라의 근본을 해칠 악성 종양으로 몰아세웠다.
제현 그룹 경영진은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메카시즘에 물든 이들의 발악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대한민국 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그들은 어떤 여론 공격을 받아도 끄떡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분위기가 점점 요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일 자신들이 애국보수우익 세력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반 제현 그룹, 반 빨갱이를 외치며 가두 행진과 시위를 벌였다.
반 빨갱이 시위라니? 북한이 쳐들어 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정말로 웃긴 일은 강현이 남한을 공산화 하기 위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라는 소문이 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 들으면 미친 놈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말이었고 강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극진한 보호를 받는 강현이 왜 북한의 명령을 받는단 말인가? 강현은 북한이 싫었다. 그런 독재체제 아래에서 마음껏 연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이 이해하지 못할 사태에 그는 침묵했다. 경영진에게도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알리지 않았다.
강현은 노리고 있었다. 일이 시작되기를..
“흐음..”
김하진 변호사가 자신의 앞에 앉은 이를 보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오래간만입니다. 김 총장님.”
과거 검찰 총장이었던 그의 앞에서는 홍일헌 비서실장이 앉아서 차를 권하고 있었다. 김하진 변호사는 아직 검찰에 있는 후배의 권유를 받아 홍일헌 비서실장을 만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제현 그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찾아왔습니다.”
“.....”
김하진 변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과거 강현의 부모가 당한 교통사고에 압력을 가한 일은 지금 상황에서는 악수 중의 악수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아시지 않습니까? 제현 그룹이 왜 탄생했는지.”
“다 자네들 때문이 아닌가!”
김하진 변호사가 호통을 쳤다. 그러나 홍일헌 비서실장은 이미 예상을 했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압니다.”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나를 만나러 온 건가?! 강현, 그자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압니다. 모두 파멸 시켰더군요.”
“응? 그게 무슨,”
“외국으로 피신했던 이상용 의원, 김청송 전 국정원장, 군 출신인 채경환의 가족들이 모두 철저하게 파멸당했습니다. 재산은 사라졌고 그 자신들은 누군가의 습격을 당해 반신불수나 식물인간이 되어서는 모두 비참하게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 그게 사실인가?”
김하진 변호사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사실입니다. 그자의 목적은 확실합니다. 복수입니다.”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나?”
“설마 일이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김 총장님이라도 예측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김하진 변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설마 그 어린 천재가 이렇게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을지는 그로서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과학기술을 천대하며 이공계를 마치 돈을 벌기 위한 노동력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에서 과학기술이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힘이자 부이자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리가 없었다.
설사 자신이 홍일헌의 입장이었더라도 어이가 없고 당황했을 것이다. 상대는 그만큼 규격 외의 존재였고 그런 규격 외의 존재가 증거를 모두 지운 일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확실한 복수의 대상마저 색출하고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할 건가?”
“제현 그룹을 몰아낼 생각입니다.”
홍일헌의 말에 김 총장은 비웃음을 날렸다. 불가능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무슨 재주로? 그들은 이미 대한민국에 단단히 뿌리를 박았어. 결코 뽑아낼 수 없을 걸세. 설사 대한민국의 재벌들이 합심해서 그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그들의 뒤에는 바로 강현 그자가 있네. 그가 세계에 석유 제조 기술로 벌어들이는 자본이 얼마인줄 알기나 하나? 돈만 생각해도 무시무시하네. 그리고 정유 회사 지분을 가진 기업들이 결코 협조하지 않을거야.”
“굳이 재벌들로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부가 제현 그룹에 제제를 가할 겁니다.”
“미쳤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이 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야. 정부가 그런 식으로 표적을 지정해 괴롭히면 국민들의 여론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리고 제현 그룹의 돈을 처먹은 의원들이 제현 그룹에게 불리한 법이 제정되는 것을 보고나 있겠나?”
“그런 의원들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
김하진 변호사는 이상한 말을 들은 듯이 말을 늘였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각오한 홍일헌의 표정을 보고는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네들..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건가?”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강현 그자가 우리를 이렇게 몰아넣지만 않았다면..”
“무슨 짓을 하고 있냐니까!”
“외국으로 도망간 세사람의 가족들마저 비참하게 만든 자입니다. 저희가 항복을 한다고 해도 그자가 가만이 있을 것 같습니까? 그는 이미 복수의 화신입니다.”
“대답해!”
“정권의 탈취.”
홍일헌의 대답에 김하진 변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돈이 안 된다면 권력으로 그자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또 그짓을 하려는 것인가? 미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일세.”
“과거에는 그랬겠죠. 하지만 냉전은 끝났습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새롭게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정권의 탈취가 성공한다면 미국은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네 미쳤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뭐든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미치광이 입니다. 납치되었다가 다시 발견된 세사람의 머리에 어떤 자국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두개골에 무수히 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마치 그 세사람의 뇌에다가 무슨 실험을 한 것처럼 말입니다!”
“....”
김하진 변호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일을 강현이 했다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증만으로 복수가 이루어졌다고 추측하기에는 일의 아귀가 너무 잘 맞아 떨어졌다.
“상대는 복수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작자입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들만 넘기고 상황을 마무리 할 수도 있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참한 삶을 살게 된 이들이 있습니다. 그자가 그 일에 일말의 도움을 준 김 총장님을 가만히 놔둘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