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학의 군림자-55화 (55/241)

55화

그러나 농산물은 다르다. 농산물은 그 자체가 최종 생산물로서 농부들이 최종 생산자였다.(가공식품은 좀 다르다.) 그러니 그 상품의 판매에서 생기는 부가가치 대해 농부들과 유통업자는 그저 양자간의 협의로 배분을 조율할 수 있었다.

물론 유통업자가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이득을 차지할 수 있으나 적어도 그 과정에서 생산자는 유통과정에서 일어나는 비용과 실제 마진에 대해 투명하게 알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팔 상품이 있어야 이 모든 계획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제현 그룹에서는 면밀하게 농산물을 납품해줄 농부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한미 FTA에 의해서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었기에 적어도 경쟁력이 있고 능력있는 농부들이 필요했다. 단지 농약과 비료를 언제 잘 쳐야되는지만 아는 단순히 부지런한 농부는 그들에게 기준 미달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제현 그룹의 의도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경쟁력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가를 포섭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보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농민들은 기존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니 대기업들의 경쟁 사이에 끼어 고래싸움에 중간의 새우 꼴이 나는 것을 우려했다.

이들을 설득하는 방법은 그들을 안심시킬 진정성 밖에는 없었고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늦어졌다.

[회장님. 자금이 필요합니다.]

“보내드릴게요.”

제현 그룹의 대표이사인 카랄니 킴은 일정에 맞추어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강현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강현은 대량의 달러를 투자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일이 더디면 돈을 쏟아붓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는 일이었고 어떤 일은 투자금액보다 타이밍이 더 중요한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샘성 전자에서 벌어지는 일도 모두가 정신이 없을때 유통업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구축해야 했다.

이에 금융당국은 죽을 맛이었다. 원화 가치 절하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량의 달러가 푸욱하고 들어오니 원화를 찍어내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달러가 대량으로 들어와 원화의 가치가 상승하면 수출기업에게는 악재였다. 그런데 제현 그룹에서는 수출기업인 주제에 달러의 소중함을 모르고 마구 시중에 풀고 있었다.

수입기업에게는 좋지만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기업들에게는 더 안 좋았다. 특히 미래 자동차는 가격 경쟁력으로 먹고사는데(자신들은 품질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원화가치가 상승하면 외제차가 더 싸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이! 우릴 죽이려고 하고 있어!”

전해진 미래 그룹 회장은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저번 수출 계약을 위반할 위기는 어떻게든 돈을 쏟아붓고 직원들을 닦달해 모면했다.

하지만 이번에 원화가치 상승으로 외제차의 가격이 싸지자 대번에 매출이 급감했다. 젊은 소비자들에게 국산차보다는 외제차가 더 좋은 이미지였고 제현 자동차에서 외제차 A/S서비스를 신설해 외제차 구입에 대한 구입비, 유지비에 대한 부담감이 더 줄어든 덕분이엇다. 옵션만 많아진 미래 자동차로는 (그것도 내수용 차로는)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미래 자동차의 악재 소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어 제현 그룹과 아우디의 합자 회사인 아우디JH의 공장 라인이 90%까지 완공되었다는 소식에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미래 그룹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방법 밖에는 없다고 결론짓고 정치권에 로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정치권에서는 세무조사에 압력을 가한 정치인들이 크게 다쳤기 때문에 제현 그룹을 건드는 것이 꺼려졌다.

저 타협없는 기업을 한 번쯤 눌러줘야 한다는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 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나서기는 꺼려졌다. 세무조사를 하도록 압력을 가한 변상득 의원의 비리를 그렇게 자세하고 신속하게 알아낸 제현 그룹의 정보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돈있고 힘있는 이들이기에 총알받이는 절대로 사양이었다.

전해진 회장은 답답했다.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가?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의 독점적인 지위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답은 그렇다였다. 아우디JH의 초기물량이 나오자 모조리 팔려나갔다는 사실은 미래 자동차의 독점시장체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있다는 증거였다.

초도 만대 가량의 분량이 순식간에 계약되고 구매자의 시승기가 올라와 미래 자동차와 견주어 전혀 떨어지지 않는 가격과 품질이라는 평에 점차 자동차 시장이 개편되기 시작했다.

잠시 원화 가치가 증가하여 외제차의 맛을 알게 된 소비자들, 그리고 새롭게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잠식해오는 제현 자동차에 미래 자동차는 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저들이 단순 완제품 제조업이라면 여러 분야를 통해 방해할 수 있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못받게 한다던가, 중소기업을 압박해 부품을 얻을 수 없게 한다던가, 정치권에 부탁해 세무조사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던가.

그러나 이미 제현 그룹은 독자생존의 틀을 맞춰놓았다. 세컨드 밴드 연합은 제현 그룹의 보호를 받으며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고 10만이 넘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제현 그룹에 열렬한 소비자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구축한 농산물 및 식료품 판매구조는 농부에게는 더 많은 이득을, 소비자에게는 먹을 것 만큼은 풍족할 수 있도록 싼 물가를 약속하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고 기존의 농산물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에 중간 유통 상인들이 제현 그룹이 중소 상권을 침입한다며 연일 시위를 벌였지만 제현 그룹에서는 다음과 같이 일축했다.

[생산자가 풍요로워야 더 많은 생산물이 생기고 모두가 풍족해진다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모든 경제 성장의 기반은 생산성의 향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타협은 없었다. 제현 그룹은 비난 받았다. 정치권에서는 이때다하고 생각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상권 침해에 대한 규제에 대한 법안이 발의 되었다. 그들은 이제 제현 그룹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손을 내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현 그룹은 시큰둥 했다. 법안이 발의되자마자 유통 사업의 확장을 정지했다. 아직 정치에 손을 대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기존의 정치가와 짝짜꿍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왜 시나리오를 3단계로 나누어 놓았겠는가? 그리고 이미 영향력을 발휘하기 충분할 정도로 거점을 확보했다. 이 거점들을 잘 운영해서 시장을 잠식하는 방법도 무척이나 좋은 방법이었다.

정작 난리가 난 곳은 대기업이었다. 골목 상권 진출도 제현 그룹 이외의 대기업이 훨씬 많이 한 상태였으며 빵집이나 카페, 편의점이나 대형 슈퍼마켓 등 큰 리스크 없이 돈이 되는 업종은 점차 키워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야심만만하게 일을 진행했던 정치권에서는 정작 같은 편인 재벌에서 자중을 요청하자 당황하고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 정도로 멍청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람이라는 족속은 원래 머리를 굴리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는 인지 능력과 이해력이 무척 떨어지는 동물이고 정치가라는 족속은 어떻게 하면 국회의원을 오랫동안 헤쳐 먹을지만 궁리를 하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 인종이었다. 게다가 대기업이라는 곳은 선거 시절만 되면 이 진영, 저 진영에 정치비자금을 대주는 물주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무튼 기존 재벌들의 반발에 법안은 표류되었고 그때를 틈타 제현 그룹에서는 농부들과 직계약을 통해 농산물 시장을 야금 야금 잡아먹었다. 식품 산업에 회사를 가지고 있던 대기업들이 급하게 농부들을 잡아두려고 했지만 제현 그룹의 긍정적인 이미지와 자본공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 기존 하청업체를 빼돌려 세컨드 밴드 연합을 만든 상황의 재판이었다.

이런 식으로 제현 그룹은 대한민국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생산자와 유통망, 그리고 수십만의 우호적인 고객 덕분에 제현 그룹은 이제 기득권으로서도 완전히 몰아낼 수 없는 든든한 기반을 마련했고 기득권층은 현실을 인정했다.

이제 제현 그룹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싸우거나 타협해야한다.

그러나 제현 그룹의 실 소유주나 마찬가지인 강현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0.4% 차이의 의결권으로 간신히 경영권을 지켜낸 샘성의 총수, 이견호 회장이 직접 강현을 만나서 부디 봐달라고, 사실상 항복을 요청하러 갔지만 만나지도 못했다. 철저하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어? 뭔가 이상하다.’

그때 이견호 회장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제현 그룹에 세워질 때 세상은 드디어 천재가 본격적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현 그룹은 정작 세계가 아닌 한국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샘성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서 샘성에 부품을 납품하지 않는 등 완전히 적대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또한 기존의 힘있는 사람들과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천재 과학자의 어떤 실험, 혹은 주체할 수 없는 돈을 소비하기 위한 헛짓거리, 사회 공헌을 위한 고귀한 책임 등 온갖 추측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재벌들도 각자 테스크 포스 팀을 가동해 강현을 분석하고 그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들을 갖추기 위해 강현이 정말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고심했다.

그들은 강현이라는 존재를 분석했다.

실용적이다. 타협을 모른다. 용서를 모른다. 선을 지킬 줄 안다. 정치적 조건을 이해할 줄 안다.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다. 법을 그리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고.... 등등 특징적인 행동 패턴이 있었다.

확실한 것은 강현이 결코 어떤 불타는 정의감이나 젊은 혈기에 의해서 제현 그룹을 만들고 대한민국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NASA 연구소의 응접실에서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강현을 만나지 못하고 헛걸음을 한 이견호 회장은 강현의 문전박대에서 ‘적의’를 느꼈다.

그렇다. 원한이 없고서는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인 자신을 이렇게 문전박대할리 없다. 그렇게 집요하게 경영권을 박탈하려고 돈을 쏟아부을리가 없다.

이견호 회장은 자신이 한 일이 저 천재의 심기를 어떤 부분에서 거슬리게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영향력이 클수록 책임도 많아진다. 그러니 원한도 많이 살 수 있었다.

설마 반도체 제조 공장 백혈병 발병과 관련이 있나? 아니 그럴리 없다. 강현과 관련있는 이를 그런 식으로 관리할리가 없었다.

강현의 신변에 관한 것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고 국내 석유 기업의 목줄을 죄고 있는 이였기 때문에 결코 그와 원한을 살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샘성을 적대한다?

‘아니다! 샘성 뿐만이 아니다!’

제현 그룹의 전신이었던 한회 그룹의 일가를 완전히 그저 그런 졸부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재벌이라는 권력의 자리에서 추락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미래 자동차의 경우를 보아라. 유통망을 빼앗기 위한 공격적인 투자를 보아라. 그리고 용서없이 정치가의 비리를 포털을 통해서 공격적으로 드러낸 것을 보아라.

그것은 제현 그룹이 자리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강현이 이 나라의 기득권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의 표출이었다.

============================ 작품 후기 ============================

너무 우울해서 며칠 쉬어볼까 합니다. 자꾸 글이 담담한 문체에서 우울한 문체로 가고 있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