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07-복수>
뛰어난 영업직원들은 물론 주주와 안면이 있던 사원들이 총동원되어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
제현 투자회사가 30%에 해당하는 주주에게 전방위적이고 신속한 로비활동을 벌여 이미 샘성 전자에 대한 경영권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태라 샘성 계열사 중 금융업을 하는 샘성 증권이나 샘성 생명에서 경영권 방어를 하기 위한 주식 매집을 할 수도 없었다. 매물이 있어야 살 것이 아닌가? 게다가 요동치던 주가가 경영권 싸움이 벌어진다는 찌라시가 나돌자마자 천정부지로 솟았으니 여유자금을 모두 쏟아부어도 목표치만큼 주식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기존 주주들을 포섭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총수 일가의 대기업 지배에 마침표가 다가오나?]
게다가 각종 언론에게 이 사태를 파악한 듯이 기사를 쏟아내자 각 계열사에서 샘성 전자를 지원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왜냐면 샘성 전자는 알짜배기 중의 알짜배기라 그것이 쏙 빠지면 다른 계열사의 위치가 어찌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주가가 더욱 떨어졌기 때문이고 이때 각 회사의 경영권을 방어하지 못하는 자금이 풍부한 제현 그룹에 의해서 어느 회사가 하나둘씩 빼앗겨버린다면 순환출자로 이어지는 지배의 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이었다.
샘성 전자가 다른 계열사의 지원을 받지 못한 원인은 결국 세계와 경쟁하는 회사가 끼어있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의 차이는 곧 브랜드 가치와 직결되기 때문에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30%의 위임권이 순식간에 넘어간 상태였다는 보고에 이견호 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나? 훌륭한 경영인을 앉히고 회사를 튼튼하게 일으켜 세워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배당금도 섭섭지 않게 배당했다. 물론 편법 승계와 탈세같은 짓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불안한 지배구조를 튼튼히 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것이 주가나 이익에 어떤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기업이 절세를 하면 오히려 이득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뒷통수를 맞다니...... 강현이라는 이름값이 삼성을 압도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사실이 그러했다.
강현이라는 존재는 이미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첨단 기술 문명 시대에서 어린 나이에 뛰어난 연비를 가진 엔진을 개발한 실력, 그리고 그 엔진을 포함해 전기 문명의 필수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배터리 기술을 무료로 배포한 배짱과 너그러움.
그러면서 저명한 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뛰어난 학문적인 이론을 보이고 결과물을 만들어 냈으며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이들에게 전 세계적인 규모로 제제를 가한 카리스마까지.
그 와중에 석유 업계의 갑의 위치에 자리매김을 했으니 겨우 단말기를 파는 회사와 차원이 다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런 이의 손에 다국적 기업인 샘성 전자가 들어간다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올지 이익에 관심이 있는 모든 주주들이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그래서 순식간에 30%의 위임권이 넘어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샘성 그룹에서 안간힘을 쓰고 주주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장수를 잡기 위해 말을 쏘려고 했는데 금적금왕이 되버렸네.”
강현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짧은 감상평을 내었다. 원래 목적은 재벌로 대표되는 기득권 최고의 방패인 대기업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말을 죽이는 것보다 빼앗는 것이 쉬운 상황이 되어 버렸기에 대기업 중 알짜 기업을 빼먹으려는 시도로 표적을 총수 일가에 한정시켰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샘성 전자의 주주들이 무척이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정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강현은 자신이 말한 내용에 어울리지 않게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어쩔 수 없는 타협임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샘성을 무너뜨릴 자신은 있었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또 그 와중에 어떤 변수가 튀어 나올지도 몰랐다.
신속하게 재벌들을 압박하고 기득권층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어야 했다. 때문에 18%에서 주식 매집을 멈추고는 자신의 이름 값을 이용해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샘성 전자에게 총수 일가를 깨끗하게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결코 샘성의 주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박사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좋은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래.”
강현의 원수들은 아직 수면 아래에 잠자고 있었다. 과거 도청으로 알아낸 5명의 이름은 알아냈지만 거기에서 그쳤을 뿐이었다. 중간 연락책은 누구였으며 실행자는 누구이고 또 조력자는 누구인지 모두 색출할 가능성이 없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궁지에 몰수록 그들이 더욱 애가 타겠지.”
밝혀진 그 5명은 군 장성, 군납 브로커, 정치가, 전 국정원장과 당시 국무총리 실장을 지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거대한 카르텔에서 어느 정도 힘은 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때문에 하루 하루 피를 말리듯이 기득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은 강현의 표적이 자신들임을 알아도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 기득권층에 일어난 거대한 혼란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이상 마녀사냥 이상의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척들까지.. 바로 얼마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이들에 의해서..
때문에 그들은 더욱 조용히 태연한 척하면서 그 일에 관련된 이들의 입을 막아야 했다. 그리고 강현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입단속을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바퀴벌레 로봇이 24시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원수들을 잔뿌리 하나 남김없이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박사님. 슬슬 이쯤되어서 기존의 재벌들에게 손을 내미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가 있습니다.]
아즈삭이 조언했다.
“안돼. 그들은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원인을 알게 되어도 순순히 그들을 넘겨주지는 않을 거야. 주모자들에게 희생양을 강요하면서 가족들만은 보호해주겠다며 설득하고는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겠지. 내게는 이쯤에서 원수를 갚았으니 됐지않냐고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야.”
당연한 일이다. 일을 벌인 주모자의 집안, 혈족을 뿌리째 뽑으려고 하면 서로 공유하는 은밀한 사실들에 의해서 서로가 다치게 될 것이다. 이 거대한 카르텔은 상대방을 완전히 쳐내려고 하면 얽히고 섥힌 인맥으로 인해서 자신들도 상처받는 촘촘한 그물망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 촘촘하고 꼼꼼한 그물망이야 말로 기득권의 정체였고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이들의 힘이었다. 안되는 사업도 이 그물망의 도움을 받으면 척척 돌아간다. 정부 기관이 국민의 세금으로 투자해 주는 것은 물론이요, 유통망을 장악한 재벌들의 일감 몰아주기로 알짜배기 시장을 잠식해 들어갈 수도 있었다.(세컨드 밴드에 들어온 기업들 중 적지 않은 하청업체가 이런식으로 대기업에게 뒷통수를 맞아 살기 위해 들어와 있다.)강현은 이 그물망을 완전히 찢어버리지 않고서는 완전무결한 복수를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슬슬 경영권에 대한 위기감 가시화 시켜줄까?”
[제이슨 사장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강현의 수족들. 강현이 언급한 비전에 공감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의 기득권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득보다는 권력,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그들의 시나리오는 3차에 걸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1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인 돈, 그리고 그 돈이 나오는 시장을 잠식하는 것이다. 가장 오래 걸리고 시일이 걸리며 가장 격렬하게 저항을 받을 수 있는 단계다.
2차는 언론의 장악이다. 시민들을 일깨우고 기존의 기득권에 대항하도록 명분을 생산하는 것이다. 지금은 겨우 인터넷 포털 하나에 불과해 방어만할 수 있을 뿐이었다.
3차는 미국 언론지의 사설에 나온 것처럼 권력의 장악이었다. 그리하여 권력에 빝붙은 망자들을 쓸어버리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기득권과 그들의 프레임에 반감을 가지는 정치세력의 육성이 필요했다. 그건 독재시대를 거치며 세뇌 교육을 받은 이들이 있는 사회에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완료되어야 복수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단계에서도 운이 닿으면 얼마든지 복수를 행할 수 있었다. 3단계의 시나리오는 그저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 미끼에 불과했다.
그리고 강현은 복수가 미리 완료되어도 이 시나리오를 완성시키고 자신들을 위한 이들을 위해서 그 동안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은 사업체와 영향력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왜냐고? 자신은 한국이란 코딱지만한 땅의 권력이 필요없었다. 다만 자신의 복수를 위해 노력해 준 이들은 설령 강현의 본의를 모르고 일했더라도 그만한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강현에게 대한민국의 가치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아, 그리고 동시에 그걸 진행하자.”
[유통시장 장악말이죠?]
“구입 원가에 최대한 마진을 줄이면 되지. 직구입 직판을 하는거야.”
[중간 단계가 없으면 기존보다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을 겁니다.]
강현의 의도는 매우 단순했다. 중간 단계를 없에 마진을 최대한 줄인다는 것.
하지만 유통업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상업활동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는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생기는 이득을 어떻게 조율하고 소비자를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가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때 제현 투자회사의 인재들이 빛을 발했다. 아즈삭의 정보를 기반으로 몰락한 유통업자와 관련업 종사자를 찾아 심층 면접을 거친 후에 제현 그룹 유통 사업부를 확장했다.
시작은 농산물부터였다.
사업부에서는 특이하게 이익 공유제라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얼마전 분배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정치권에서 논의되었던 제도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정부에서 논의 되던 법안이 실행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또 논의가 되고 있는지조차도 더 이상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유명한 대기업 회장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공산주의적인 제도를 만든다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고 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산품의 경우 원 재료에서부터 생산비, 부품 구입지, 판매 마케팅 비용 등 최종적인 부가가치에서 하청업체의 기여가 얼마나 큰지 가치 산출하는 것은 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 있기에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기 때문이었고 이 문제에서는 제현 그룹조차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리고 막연히 이득을 공유하자는 것은 정당한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위험도 있었다.
또한 제현 그룹이 하청업체가 최종 부가가치에 기여한 비중을 정확히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심을 잃는다는 것을 뜻했고 그 말은 세컨드 밴드 연합의 신뢰를 잃어 전 사업영역에서 제현 그룹의 영향력이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선심성 정책조차 금물이었다. 때문에 제현그룹 역시 다른 공산품에 대해서는 이익 공유제를 도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