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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군림자-29화 (29/241)

29화

택시가 멈춘 곳은 한 성당. 그곳에서는 제시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현은 입구 옆에 서서 들어가지 않고 멀찍이 모이는 관만 보고 있었다.

“현. 들어가자.”

잭이 한숨을 내쉬며 강현을 팔을 잡았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뿌리쳤다. 그 행동이 워낙에 과격했던지라 잭은 다시 강현의 팔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들어가자고 해도 강현의 반응이 없어 듣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장례식을 계속 되고 제시와 그 가족들과 친분있는 사람들의 흐느낌도 이어졌다. 강현은 멍한 눈빛으로 그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당신이 바로 강현이군요.”

제시의 부모가 강현을 알아보았다. 딸이 사랑하는 남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과학자.

그러나 부모의 말에도 강현은 대답이 없었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저, 저기 잠시만 이쪽으로.”

잭은 제시의 부모에게 강현이 제시를 잃은 충격으로 다시 자폐증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오! 저런 불쌍하게도!”

“흑!”

과연 자신들 만큼이나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있었던 모양이다.

제시의 부모는 강현을 데리고 다니면서 장례식을 치루었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나서 강현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잭은 강현이 이상한 선택을 할까봐 따라다녔고 강현이 간 곳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과연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향을 선택한다는 것인가?’

잭은 강현의 행동을 그렇게 생각했지만 강현은 단지 부모님의 무덤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처음 찾은 부모님의 무덤. 남 몰래 돈을 들여 관리해주는 사람을 고용하기는 했지만 직접 찾아 오는 것은 수 년만이었다.

그만큼 상실의 고통은 컸다. 하지만 왜 이제와서 오게 된 것일까? 강현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건지.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과학으로 도피했고 이번에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왜냐면 과학으로 도피하기에 상실감이 너무나 컸다.

그녀를 잊는 것도 싫었다. 상실감이 아프다고 그녀를 잊는 고통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부모님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오고 싶었다. 그때의 상실감을 다시 떠올릴 수는 없지만 참고할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강해진 걸까 아니면 무감각해진 걸까?

강현은 점차 사고가 또렸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는 당장 묘소 근처에 있는 집을 구매했다. 그리고 거기서 기거하며 매일 부모님의 산소를 방문했다.

그것은 강현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무엇을 중요시 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강현의 사색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자랑. 희대의 천재. 아즈삭의 개발자. 석유 기업들을 주무르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배후의 지배자 등등 여러 별명을 가지고 있는 강현과 안면을 트고 싶은 정치인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보게. 강 박사. 나로 말할 것같으면..”

“강 박사. 부디 국가를 위해서..”

그런 그들은 강현에게는 짜증 그 자체였다. 강현이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은 그 어떤 시간보다 마음 아프고 경건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소위 국회의원이라는 좆같은 것들이 그의 소중한 시간을 더럽히고 있었다.

“잭. 한국이지?”

[응.]

잭은 강현을 따라 한국까지 왔다. 하지만 혼자 있고 싶다는 강현의 요청에 따라서 근처의 호텔에서 묶고 있었다.

“여기 버러지들 좀 치워줘. 너무 시끄러워.”

[그걸 왜 나한테,]

“알잖아.”

[….. 그래?]

잭은 들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곧장 한국 지부에 연락을 해서 강현을 경호하기 위한 요원들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미 들킨 잠입 요원은 더는 대상의 주변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잭이 강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호의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보낸 경호 요원들은 강현의 집앞에 진을 치고 있던 정치가들을 가만히 놔두고 억지로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개념없는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내 보냈다. 그리고 강현이 부모님 묘소로 갈 때 따라붙는 국회의원들을 가로 막았다.

“야! 너희들 누구야! 여기는 대한민국 땅이라고! 감히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을!”

그러나 요원들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쟈켓을 열어 품안에 있는 가스총을 보이면서 더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 이러면 한미 관계에 별로 좋지 않을 거요!”

하지만 정보부에서는 한국 정부와 갈등이 생기는 강현의 편을 들 것을 이미 결의한 상태였다. 한국 전체보다 강현의 가치가 더 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강현의 주위에 첩보망을 깔아둔 상태여서 이상한 오해를 받을까봐 걱정인데 마침 강현이 도움을 요청했다. 미 정보부에 좋은 이미지를 심을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경호원들이 대신 국회의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강현은 부모님의 무덤에 난 잔디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거칠었다.

과거 포근하고 부드러웠던 어머니의 품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아버지의 턱에 난 까끌한 수염과 더 비슷했다.

강현은 생각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살아야 하나? 살자. 왜? 과학이 있으니까. 아직 즐거운 의미가 삶에 남아 있으니까?

제시는? 잊지 말자. 영원히.

그녀의 죽음은 정말로 사고였을까? …...아마.

점점 정신을 차리면서 강현은 제시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음모가 아닌지 떠올렸다.

제시가 죽으면 가장 이득을 볼 주체는 누구인가? 미국? 아마 그럴 것이다. 제시로 인해서 강현이 프랑스에 남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그것을 위해서 강현과 절대 화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 리스크에 비해서 얻는 이득이 너무 없었다.

강현은 차라리 미국 입장에서는 제시에게 그녀와 강현을 위한 전용 연구소를 지어주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제시와 강현을 미국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생명 공학 연구 단지를 위한 계획도 있었다.

그렇다면 제시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인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강현은 그녀의 죽음으로 혹시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기 때문에 확실하게 매듭짓지 않았다. 그래.. 자신의 상상 밖에서 누군가 모종의 이득을 취할지 혹시 아는가?

강현은 그렇게 좀 더 부모님 묘소를 방문하며 조금만 더 쉬려고 했다. 그래, 조금만 더. 살아갈 기력이 생길 때까지..

따르르릉. 따르르릉.

강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따로 떨어져 지내기 전 잭이 주고 간 전화다. 원래 강현은 휴대폰이 없었다. 그의 생활은 연구소, 집, 연구소, 집이었기 때문에 딱히 휴대폰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혼자서 일상과 떨어진 생활을 하기 시작하니 잭이 연락을 위해서 강현에게 억지로 떠넘긴 것이었다.

그래서 강현은 잭이 전화를 한 것인 줄 알고 전화를 받았는데 전혀 다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을 봐서는 한국인인것 같았다.

[여보세요. 강현 박사님 전화가 맞습니까?]

“네. 접니다만..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샘성 전자의 이한호 이사라고 합니다. 박사님을 만나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죠?”

[… 샘성 그룹 쯤 되면 그 정도 정보는 알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저는 할 말이 없군요. 이만 끊겠습니다.”

[자, 잠시만,]

강현은 전화를 닫았다. 그리고 한 마디 내뱉었다.

“지랄한다.”

뭐? 그 정도 정보는 알아 낼 수 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잭은 미 정보부 요원이다. 그런데 그런 잭이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마음대로 여기저기에 알리고 다닐리 없었다. 분명히 뭔가 야료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고 그로 인해 강현의 의미있는 시간이 방해받았다.

‘혹시..’

강현은 별의별 상상을 다했다. 혹시 다국적 기업인 샘성이 제시의 죽음과 뭔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가 없는 상상이라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제시의 죽음에 집착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며칠 간격으로 계속 엉뚱한 곳에서 문자와 전화가 오길래(그중 태반은 대출 광고거나 휴대폰을 팔아먹기 위한 광고였다.) 강현은 짜증나서 전화기를 꺼두었다. 그러나 매일 강현이 자살하지는 않나 걱정한(천재의 복잡한 심리 상태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잭은 매일 안부 전화를 했고 결국 강현이 전화를 받지 않자 처들어 왔다.

정보부에서 보낸 요원들이 있지만 잭은 동료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신원 확인 후 곧바로 통과되었고 도리어 잭의 황급한 태도에 강현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하고 따라 들어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잭에게 한 소리를 들은 강현은 슬슬 기력을 되찾아 세상과 다시 소통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인터넷을 했다. 아즈삭과 통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시뮬레이션 연구는 언제든 할 수 있어서 적당한 방법이었다.

인터넷을 뒤지던 강현은 그러던 중에 왜 자신의 폰에 그런 광고가 왔는지 알게 되었다.

통신망 업체에서 고객의 개인정보 데이터가 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회사의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변상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귀찮은 짓을 벌리지는 않았다. 단지 통신망 업자를 바꾸는 것 만으로 조용히 넘어 갔다.

‘개인 정보 또 유출.’

하지만 사고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또다시 강현의 폰으로 짜증나는 문자들과 통화가 오기 시작했다.

왜 이럴까? 강현이 만든 아즈삭이면 보안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데. 고객 정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결국 또다시 통신사를 바꾸었다. 하지만 통화 품질이 엉망이었다. 제대로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았고 또 바뀐 전화번호로 광고 문자가 날라왔다. 이쯤되면 조직적인 범죄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하아...’

강현은 짜증나서 그냥 전화기를 꺼버렸다. 잭이 켜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자신의 평온한 사색을 방해하는 것들을 접하기가 더 이상은 싫었다.

그리고 다시 잭이 쳐들어 왔다.

“현!”

“왜?”

“전화기 꺼두지 말랬잖아.”

“엉뚱한 곳에서 계속 전화가 오니까 그렇지.”

“그래도....”

“자살 안 할 테니까 걱정마.”

“.....”

잭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울증보다 무서운 것이 조울증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너무나 우울해서 자살할 의욕도 없다. 하지만 조울증을 가진 사람들은 기분이 확 확 변하기 때문에 자살할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기분이 우울해지면 자살 시도를 하게 된다.

잭은 강현의 지금 상태가 제시의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씨. 이 나라의 통신사들은 뭐가 그리 엉망인지..”

강현이 아즈삭이 있으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잭이 생각했다. 이 나라의 통신망 업자들은 고객 정보 보호를 위해서 그 정도 투자할 생각도 없나?

잭은 결국 CIA에서나 쓰는 위성 전화를 강현에게 넘겨 주었다.

“정말로.. 이젠 사람 걱정 시키지마.”

“응. 고마워.”

“제시의 죽음은 너의 탓이 아니야. 그냥.. 운이 없던거야.”

“.... 정말일까?”

강현의 멍한 대답에 잭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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