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04-안드로이드>
샐리는 MIT에 입학했고 한 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장학생이 되는 조건 중에 인턴 생활을 하는 것이 포함되어 이곳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MIT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고 방학 중에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하는데 환경이 혼자서 공부를 하기 어려운 곳인데 마친 강현이 아는 분야를 공부하길래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서 강의는 언제부터 해줬는데?”
“오늘로 딱 일주일.”
그럼 그동안 내게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안 한거야?
제시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참았다. 둘의 대화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둘의 대화는 생명체의 구성원리, 우주의 신비,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토론이 대부분이었고 시시콜콜한 각자의 사생활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둘다 그런 지엽적인 것에 대해서 대화를 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현이 가르쳐 주는 건데?”
“신세 진 것도 있고 해서.”
“신세?”
“응. 그 양과자 집에서 과자를 사다주는 심부름을 해줘서.”
“뭐? 겨우 심부름 한 번 해준 것가지고 일주일 동안이나 가르쳐 줬단 말이야?”
“응? 일주일 아닌데?”
“그, 그럼.”
“원래 사무보조를 맡던 캐롤라인 씨가 휴가를 가고 나서이니까 한 20일쯤 됐어.”
‘그럼 그동안 먹은 간식이 그 여자가 사온 거란 말이야?’
제시는 살짝 충격을 먹었다. 어쩐지 골라오는 센스가 갑자기 좋아졌다 했다.
“뭐? 그걸 왜 인턴한테 시킨 건데?”
“그 인간 얼굴 보기 싫어서. 갈 때마다 친한 척 한단 말이야.”
“그럼, 앞으로 내가 사올테니까,”
“안돼! 그건 더 싫어.”
제시는 머리가 아파졌다. 그래, 막심이란 인간을 알게 된 것은 실수였다. 아니 딱 잘라 인연을 끊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질투하는 남친의 모습이 보기 흐뭇해서 잠시 이성을 상실했던 것이 분명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잖아. 우리는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인간이랑 접촉할 필요가 없고 샐리는 공부에 도움을 받고.”
도움 안 되는 인간은 당연히 막심을 뜻한다.
강현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제시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심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강현의 옆에 자신이 아닌 젊고 이쁜 여자가 붙어 있는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대신 내가 가르쳐 줄게. 보아하니 생물학을 전공책이던데 그게 전문인 내가 더 잘 가르쳐 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럼 나야 좋지.”
강현은 샐리에게 약간 빚진 느낌이 있어 기꺼이 가르쳐 주었지만 슬슬 연구를 마무리 할 때가 되어서 일부러 시간을 내기 어려워질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여친이 대신 해주겠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어? 그런데 제시는 안 바뻐?”
“아아. 괜찮아.”
제시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바쁘기는 하지만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그의 옆에 샐리같은 미녀는 붙여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러면서 다시는 강현에게 질투심을 유발하는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녀의 결심대로 이성이 결정한 것처럼 잘 따라간다면 이 세상은 평화로웠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결정은 내렸지만 이미 감성은 질투로 꽉찬 그녀는 행동이 조금 이상해졌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강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웃는 횟수가 적어졌다. 그리고 미소가 어딘지 모르게 비틀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적극성이 떨어졌으며 성행위도 정신적인 유대감보다 육체의 쾌락에 치중되었다.
“제시. 요즘 뭐 문제 있어?”
“아니.”
“.....”
문제는 있었다. 강현은 그것을 직감했지만 제시의 단호한 대답에 더 캐물을 수 없었고 혼자 끙끙 앓았다.
요즘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 그러다가 문득 샐리의 존재를 깨달았다. 벽창호가 아닌 그는 제시가 혹시 질투라도 난 것인가 생각했지만 이미 제시가 샐리를 맡기로 했기 때문에 그 문제는 제시가 이미 처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철저히 이성적인 강현이 복잡한 여심의 마음을 깨달을리 없었고 그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저에게 빅토리아 박사님이 왜 그러는지 추측해 보라구요?”
샐리는 보나마나 질투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에게 과외를 해주는 제시의 경계어린 눈초리를 보면서 모르면 눈치가 없는 것이다.
샐리는 솔직하게 답을 가르쳐 주었지만 강현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이미 해결된 거 아니었어?”
제시가 강현 대신에 샐리에게 과외를 해주는 것으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믿은 강현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박사님.”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치정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샐리는 그러면서 차근 차근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여기서 뭐해?”
얼음장 같이 차가운 목소리. 제시가 느닷없이 나타나 둘의 밀회(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를 적발했다.
샐리는 서둘러 어설픈 핑계를 대면서 그 자리를 떴고 강현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왜지?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그날부터 제시의 태도는 점점 냉정해시고 살살 강현의 성질을 긁는 대화가 이어졌다. 제시는 이래서는 안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지만 강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심사가 뒤틀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흥! 또 내게 말도 없이 그 여자를 만나?’
강현은 제시에게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나서야 샐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날부터 제시의 기분과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
난생 처음 시구를 읽어주면서 애교를 부린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냉각기를 거친 두 사람의 사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에.. 그러니까 여기.”
“풋! 그게 뭐야?”
집에서 갑자기 얌전하게 정장을 입고 반지 케이스를 내민 강현의 행동에 왠지 웃음이 터져버린 제시였다.
아무튼 강현의 프로포즈 후에 완전히 기분이 풀린 제시는 그와 뜨거운 밤을 보냈고 둘의 사랑이 변치 말자는 맹세를 했다.
그렇게 둘의 사이가 회복되고 나서야 강현은 안심하고 미국행 미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계획했던 인공 근육 연구까지 미뤘었기 때문이다.
강현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자 노심초사 했던 정보부는 한 시름 놓았다. 잭은 강현의 복귀가 반가우면서도 귀찮았다.
회계부의 한 직원과 썸씽을 즐기고 있던 그가 다시 강현에게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잭이 신경쓸 일은 별로 없었다. 강현은 무서운 기세로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개월 안에 연구를 마무리하고 상견례도 하고 결혼 날짜도 잡고..’
가족이 생긴다는 것. 그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오우! 결혼!?”
간만에 점심시간에 그를 데리러간 잭은 강현과 제시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이, 이봐. 결혼을 그리 서두를 필요가 있어?”
“어차피 할 건데 미룰 필요도 없잖아.”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결혼도 안 해본 잭이 어떻게 알아?”
“......”
씨알도 안 먹힌다. 정말로 진심으로 제시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인생 경험 적은 어리숙한 천재의 성급한 판단일까?
석유 시장을 주름잡는 이들에게 하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후자는 아니었다. 그 말은 그만큼 제시가 소중하다는 건데...
잭은 제시가 프랑스 국적을 받았다는 소식을 떠올렸다. 원래 그렇게 쉽게 부여되는 국적이 아니다. 분명히 제시와 강현과의 관계를 보고 부여한 것이 틀림없다.
‘쩝. 가만히 놔두라니까..’
정보부의 성급한 미인계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진척시키고 말았다. 프랑스에서도 중요한 연구 시설에 미국인 인턴이 그리 쉽게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프랑스 정보부와 모종의 거래로 대가를 치루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으니..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인간들이 작전을 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강현은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고 미국에서는 대책을 수립할 수 밖에.
강현은 일단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인공 근육에 개발에 가시적인 성과를 3개월 이내에 형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흐음...”
섬유간의 표면 에너지를 조절해 힘을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근육은 긴 섬유로 만들어 지지 않았다. 짧은 길이의 섬유들이 세포마다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현은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섬유를 구성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긴 섬유를 이용하게 되면 섬유간의 엉킴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다. 섬유가 길어질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해져서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방법은 근섬유의 한쪽만을 섬유로 만들고 다른 쪽은 그런 섬유를 잡아두는 몰드의 형태로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강현은 일단 충분한 길이의 탄소 나노 튜브가 필요했다. 길이가 긴 섬유를 이용한다는 것은 한번 끊어지면 그 부분의 섬유는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현존하는 섬유 중에서 가장 질기고 튼튼한 탄소 나노 튜브를 선택했다.
이 탄소 나노 튜브는 전기 전도성이 있었기 때문에 전기로 수축을 조절하려는 강현의 의도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다행이 길이가 긴 탄소 나노튜브를 제조하는 공정이 있었기에 강현은 외주를 주어서 약 50cm의 탄소 나노튜브 다발을 얻을 수 있었다. 약 1kg에 만 달러가 넘어가는 돈이 들었지만 탄소나노튜브의 길이가 길 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생산 비용을 생각할 때 오히려 싸게 구한 것이다.
강현은 장갑을 낀 손으로 탄소 나노 튜브를 이쑤시개 만한 굵기 정도로 집은 다음 끝을 매듭을 지어 단단하게 묶었다.
그리고 그 매듭을 어떤 장치에 매달아 빗질을 시작했다. 그 장치에는 매듭이 지어진 다른 탄소 나노 튜브가 여러개 매달려 있었고 삐죽한 가시가 잔뜩 달린 커다란 크기의 바퀴가 돌아가며 탄소 나노 튜브를 밑으로 쓸어내리며 빗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치는 일일이 손으로 빗질을 하기 귀찮아한 강현이 하루만에 뚝딱 만든 장치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각 가닥의 엉킴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빗질을 하면 마찰 전기가 일어나 섬유 가닥들이 가닥가닥 일어나서 더 엉망이 되겠지만 각 탄소 나노 튜브를 고정한 못과 금속 재질의 빗질 바퀴는 실험실에 있는 수도에 접지가 되어 있어 여분의 정전기를 제거하고 있었다.
강현은 빗질이 되고 있는 동안 어떤 용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비커에 불투명한 용액을 반쯤 붓고는 다른 용기를 꺼내 스포이드로 다시 비커에 집어넣고 잘 섞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빗질 장치에서 가장 오래 빗질을 한 탄소 나노 튜브 다발을 핀셋으로 집어 엉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집어 넣고는 매듭 부분에 전극을 연결했다.
탄소 나노 튜브를 담근 용액은 전기 전도성 플라스틱의 일종으로 강현이 특별히 재조합한 단량체 용액이었다. 따로 스포이트로 첨가한 액체는 경화제로 단량체가 고분자를 이루게 만드는 촉매의 역할이었다. 즉 이 전기 전도성 플라스틱이 탄소 나노튜브를 붙잡아 둘 몰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탄소 나노 튜브를 일일이 플라스틱이 감싸야 한다. 즉 탄소 나노 튜브 다발이 이 단량체에 잘 젖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젖는다는 현상은 실로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한다. 친수성이니 소수성이니 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관계가 있다. 주로 이런 젖음 현상은 표면 에너지가 결정을 하는데 젖는 액체의 표면 에너지가 젖어야 하는 물질의 표면 에너지보다 작을수록 더 잘 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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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이야기가 상승합니다. 본격적인 갈등 구조에 돌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