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사실 강현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제시가 유일했다.
그리고.. 강현의 괴랄한 사고력이 별의 별 상상을 순식간에 해버렸기에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외로운 제시.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집적거리는 막심이라는 놈팽이.
강현 자신이 연구 도중 필요한 신소재의 아이디어가 생각나 프랑스 입국을 미루고, 제시는 더욱 외로워하고 그런 그녀에게 그 놈팽이가 접근하고 제시와 그 놈팽이가 술 한 잔을 하고 제시는 술에 취하고 그런 제시를 그 놈팽이가 데리고 자신의 숙소로....
강현은 상상을 멈추고 아즈삭에게 지시를 내렸다.
“HW 설계도 32번을 불러와.”
[지시를 실행합니다.]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는 생활을 시작했다.
= = = = =
강현의 이족 보행 로봇은 어쩌다보니 안드로이드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인체를 모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족 보행을 가장 완벽하게 할 수 있는 형태는 역시 인체의 구조라는 강현의 직관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현의 설계는 설계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SF영상물의 아이디어 노트에 가까웠다. 세분화된 설계도와 철저하게 입력된 치수 데이터가 없었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왜냐면 현존하는 기술로 재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흐음... 많은 기술들이 필요하네..”
공학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공학 설계에서 필수적인 덕목은 목적을 위해서 얼마나 타협을 할 수 있냐는 것이고 타협의 대상에는 시간, 돈, 현존 기술 수준 등이 있었다.
그러나 강현의 설계도는 그런 타협이 전혀 없었다. 순전히 그의 자기 만족을 위한 설계였기 때문이다.
“일단 필요한 건 센서와 근육, 그리고 동력인가?”
강현은 이 인공 관절에서 모터를 사용하는 방법은 완전히 배제했다. 왜냐면 모터는 원운동을 하기 때문이고 이 원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바꾸기 위한 기계적 설계는 이족 보행의 핵심인 밸런스 유지에 치명적이 었기 때문이다.
원운동을 직선 운동으로 그리고 직선 운동을 원운동으로 바꾸는 기계적 설계는 이미 증기 기차가 나왔던 시절에 설계가 끝나 있었고 강현이 생각하기에 피스톤과 바퀴 사이에 동력을 전달하는 막대기의 존재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터를 가지고는 미묘하게 힘의 가감을 조절할 수 없었고 또한 체중을 지탱할 충분한 힘 역시 얻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방법은 인공 근육을 만드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인공 근육을 이용하기 위한 충분한 동력도 공급되어야 했고 또한 뼈대에 붙인 무수히 많은 근육을 조절하기 위한 센서 역시 필요했다. 물론 수가 많이 필요했다.
걷기 위한 제어 장치는 아즈삭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은 그 세 가지가 강현이 스스로에게 남긴 숙제였다.
“흐음.. 역시 폴리머가 좋겠지? 종류는 펩티드 결합의 섬유가 좋을까.. 아니면 탄소 나소튜브? 아니면 그래핀을 가져다가 만들어 볼까?’
강현의 머릿속에는 벌써 인공 근육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실제 생체의 근수축은 필라멘트 활주 이론으로 설명한다.
근섬유는 미오신 단백질 필라멘트와 액틴 필라멘트가 교차되어 구성되어 있고 근육을 수축하라는 신호가 오면 미오신 필라멘트의 미오신 단백질의 머리가 ATP를 이용해 액틴 필라멘트에 달라붙는다.
미오신 단백질의 머리 부분은 원래 구부려져 있는데 이 단백질에 ATP가 공급되면 ADP와 인 이온으로 변하면서 쭈욱 펴진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액틴에 달라붙고 다시 ADP와 인 이온이 떨어져 나가면서 구부려지는데 이때의 힘으로 수축하는 것이다.
이 미오신 단백질의 머리는 무수히 많아서 근수축시에 미오신 단백질의 행동이 마치 카누 단체전에서 노젓기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때문에 무거운 물체를 가만히 들고 있는 행위에도 에너지가 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도로 뒤로 가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강현은 이런 복잡한 미시적 세계의 움직임을 열역학적인 관점에서 간단하게 정의했다.
근수축 전 = 섬유간의 표면 에너지 낮음근수축 후 = 섬유간의 표면 에너지 높음 그리고 이 공식이 의미하는 것은 에너지를 주입하면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섬유간 접촉 면적이 늘어나야 하고 이는 마치 필라멘트 활주 이론처럼 섬유가 섬유를 당기는 힘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발상이 가능했다.
비록 미시적 세계에서 화학 에너지를 이용하는 단백질의 복잡한 행동은 흥미로웠지만 강현은 그것을 모방하고 싶지는 않았다.
뉴턴의 제1법칙처럼 힘을 받지 않는 물체는 그 운동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물체를 들고 가만히 있는 것에도 에너지가 소비되는 근육의 구조는 그에게는 참으로 불합리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라멘트의 교차적인 구조는 본 받을 만 했다. 강현이 구상하는 인공 근육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근원섬유의 액틴 필라멘트로 미오신 필라멘트의 교차구조와 동일했고 표면 에너지의 조절을 이용해 수축의 정도를 조절하려고 하는 강현의 아이디어에서 표면적을 극대화하는 구조는 출력면에서 반드시 필요했다.
[박사님. 비행기 표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다시 구상에 빠져드려는 강현의 정신을 아즈삭의 스피커 음성이 불러왔다.
“아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삼일 후에 좌석이 있습니다.]
“그걸로 예약해 줘.”
[네, 박사님.]
인터넷 시대에 대부분의 생활 정보를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서 아즈삭은 매우 유용한 비서였다.
강현은 제시를 만날 생각에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 강현을 모습을 보면서 잭은 한 숨을 내쉬었다.
NASA에서는 강현을 보내는 것을 장기 출장, 혹은 장기 휴가 정도로 처리할 방침을 세워두웠다. 하지만 되도록이면 안 가기를 바랬지만 결국은 가고마는 것이다.
그리고 잭은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에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짜낸 계획이란 바로 미남계.
얼마 전 강현과 제시가 대화를 나눌 때 거론되었던 막심이라는 남자가 바로 미 정보부의 요원이었다.
발상은 간단했다. 제시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게 만들어서 강현이 프랑스에 있을 가능성을 없애게 하는 것.
거기서 더 발전된 작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시에게서 강현의 마음이 떠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방법에는 강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도 거론되었으나 잭의 보고서로 폐기되었다.
혹시나 해서 잭이 강현과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다.
‘혹시 제시가 너를 버리면 어쩔거야?’
‘내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만약 제시가 어떤 일을 당해서 너를 떠나야 한다면?’
‘못 보내.’
‘그럼 말이야.. 이건 좀 극단적인 상황인데. 만일 제시가 강간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거야?’
‘범인을 죽일 거야. 가장 잔혹하게.’
잭은 담담하게 답하던 강현으로 인해서 식은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강현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농담은 강현과 가장 거리가 멀었고 입에 발린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은 말할 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담았다.
‘하. 하. 하. 법대로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
‘법 따위에 복수를 맡겨 둘 수는 없어.’
‘그, 그러면 네가 감옥에 가게 되는데?’
‘완전범죄는 없지 않아.’
그래서 제시를 망가뜨려 떨어뜨리는 방법은 완전 폐기 되었다. 그리고 강현은 위험인물로 인식되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 법 질서를 어느 정도 어기는 것은 정보부들의 특징이다. 다만 안 걸리면 된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그런데 강현은 국가를 위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법을 무시하고 있으니 건전한 시민이라고 분류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극단적인 상황일 때 극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 강현에게 붙여졌다.
“여어. 닥터 강. 잘 다녀 오라고.”
잭은 잘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보고.”
강현은 확답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생각했고 프랑스에 간 그대로 눌러 앉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결코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았다.
강현의 대답에 잭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그의 등을 보며 썩소를 지었다.
역시나 천재는 만만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그러나 잭은 강현이 미국과의 연을 아주 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단 컴퓨터 개발부의 알렌을 비롯한 직원들과 안면이 있었고 아즈삭을 매개로 서로에게 친분이 있었으며 강현이 몇 년 동안 정을 붙인 실험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명작인 아즈삭이 있었다.
잭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프로메테우스. 출발.]
하지만 정보부는 조직이다. 잭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으며 여러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강현을 회유해 자국민으로 만들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으며 불행하게도 그럴 개연성은 너무나 높았다.
그래서 정보부는 작업에 들어갔다.
“샐리 양?”
“네. 그런데 누구시죠?”
미국 MIT에 입학한 샐리 클린턴은 전 미 대통령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건 없었다.
다만 샐리는 그 해 입학한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빼앗은 귀여운 미녀였다. 또한 MIT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머리의 재녀이기도 했다.
“저는 한슨 재단의 칼 마손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칼 마손이라고 밝힌 남자가 샐리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샐리는 머뭇거리면서 명함을 받았다.
“저희 재단에서는 장래가 뛰어난 인재들을 선정해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여러 기회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샐리 양이 선정되셨습니다.”
“그, 그래요?”
한슨 재단이라니 들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일단 이번 여름 방학에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에 인턴으로 생활해 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파스퇴르 연구소라면 세균학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네! 좋아요!”
샐리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그녀의 집은 화원을 하는 농가였다. 어릴 때부터 꽃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어느 날 과학 만화를 보게 되었고 식물에 대한 관심이 과학적 관심과 결합하여 생물학도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리고 파스퇴르 연구소는 매우 유명한 연구소였고 그런 곳에서 인턴으로 생활했다는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프랑스’이지 않은가? 샐리의 눈앞에 넓게 펼쳐진 포도 농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여기 계약서이니 잘 보시고 서명하세요. 내일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칼 마손이라는 정장 남자가 차를 타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좋아서 계약서를 들고 기숙사로 돌아온 샐리는 계약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흥분이 식으니 냉정함이 돌아온 것이다.
계약서를 훑어본 결과 조건이 정말로 좋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단 등록금은 전액 지원되었고 생활비 역시 학과 성적에 따라서 어느 정도 배분 되었는데 이상한 것은 성적이 좋을 수록 생활비 지원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그 조항에는 친절하게 설명도 달려있었는데 혹시 생활비 버느라 공부에 소홀할까 봐 그런다고 한다.
물론 좋은 성적을 얻거나 다른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으면 그에 대한 포상금이라고나 할까, 격려금이 지급되기에 결론적으로 받는 돈은 비슷할 것 같았지만 그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할 정도로 샐리가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장학생의 권리는 당연히 성적이 떨어지면 박탈이 되었는데 특이사항은 ‘반드시 방학에는 재단에서 지정한 연구소에서 인턴을 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뽕빨물이란 것이 흔히들 그렇듯 빨리 질립니다. 저도 질려서 한 동안 봉인. 그 동안에는 자유인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사실 자유인을 쓰다가 생각난 소재가 완전히 재 취향에 크리티컬 직격이라 자꾸 그게 생각이 나서 말이죠. 빨리 자유인을 끝내고 그걸 쓰고 싶어요.
하아.. 근데 자유인은 이제 초입부란 말이죠. 최소 100편은 되는데... 하루에 4편씩쓰면 한달 안에 완결이 될 수 있을지.. 그런데 하루 4편은 정말 무리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