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러면 현과 떨어지게 되잖아. 현은 나와 떨어지는 게 싫지 않아?”
“내가 왜 떨어져?”
강현이 말했다.
“같이 가자.”
그의 말에 제시는 기쁨과 함께 걱정이 되었다.
“연구는?”
“왔다갔다하면서 하지 뭐. 돈도 많은데 전용기가 하나 살까?”
“현!”
제시는 감동했다. 꿈과 사랑. 둘 중 하나를 버려야 될지도 모른다고 각오를 했지만 어느 것도 버릴 필요가 없었다.
다음 날 제시는 프랑스 생물 연구소에 답장을 보내고 사표를 제출했다. NASA는 뒤집어 졌다.
HJ세포의 개발자인 그녀가 떠나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해했다. 그녀가 원하는 연구환경을 NASA에서 마련해 주기에는 어려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NASA는 우주 개발이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현은 다르다. 강현은 희대의 천재였고 그가 개발한 기술들과 결과물들은 우주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공 광합성 칩은 물론이거니와 아즈삭을 이용한 궤도 계산은 기존의 컴퓨터보다 빨랐으며 미처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마저 짚어내는 엄청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현이 내는 기부금으로 인해서 얼마나 예산이 풍족해 졌던거? 석유 제조 기술의 로열티의 일부만으로도 NASA의 재정이 풍족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제시가 떠난다? 그것도 강현과 같이?
“현! 프랑스로 간다는 게 사실이야?”
언제나 강현의 신변에 민감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잭의 귀에 제시의 프랑스 행 소식이 바로 들어왔고 잭은 급하기 강현에게 달려왔다.
“응.”
잭은 속으로 맙소사라고 외치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여자따라가는 거야?”
하아.. 이래서.. 잭은 상부에 미인계를 건의 했어야 올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인이면서 과학을 좋아하고 또한 과학에 재능이 있으면서도 정보부에 투신할 만큼의 인재를 찾기란 하늘에서 별따기였다.
잭은 설마 제시에게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것은 미 정보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아.. 연구 욕심으로 다른 나라로 떠난다니..’
NASA에서는 제시의 결정을 만류하여 설득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인프라를 제공하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법적인 절차나 시설이야 돈을 처바르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인력이란 인프라만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너 아즈삭은 어쩌고? 또 여기에 벌려 놓은 일들은 어쩌고?”
“놔두고 가야지.”
“너 겨우 이 정도의 인간이었냐?”
잭은 도발을 감행했다. 어떻게 자신이 벌려놓은 일들을 놔두고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갈 수 있느냐. 니가 그러고도 연구자냐? 라면서 자존심을 건들여 붙잡아 놓으려는 순간적인 기지였다.
그러나 강현의 잭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말고 아즈삭을 제대로 다룰 만한 사람도 없어. 그리고 네가 남겨놓은 연구를 누가 이어 받아서 하는데? 아무도 할 만한 사람이 없어.”
“아아. 그런 말이구나. 걱정하지마 연구실은 그대로 유지할 거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연구실이야 많으면 많을 수록 좋으니까. 그쪽에는 생명 공학 연구실을 따로 짓고 여기에는 메카트로닉스 연구실 전용으로 사용되면 되지.”
“.... 그, 그럼 아주 가는 것이 아니야?”
“아, 이민? 내가 귀찮게 왜?”
강현이 프랑스에 가려는 이유는 제시였다. 그러나 이왕 가는거 좀 더 생산적인 일도 겸하는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동안 NASA에서 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어도 제시와 사브리나가 사용하는 연구실을 같이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에 생물학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에 전용 연구실을 하나 짓는 것도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
물론 지금이야 메카트로닉스에 빠져 이족 보행을 연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 생명 공학을 연구하고 싶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 아닌가?
“아, 그래?”
잭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강현의 마음이 미국에서 떠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강현의 존재로 미국이 득을 본 상황에 심취한 나머지 강현이 미국을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냉철하게 판단하지는 못했다. 물론 미국만큼 천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곳도 드물었기에 그다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잭은 강현이 미국 국적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프랑스에 있게 되면 프랑스에서 어떤 식으로 강현의 환심을 사려고 들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려면 시간 계획은 어떻게 세울 건데?”
“시간계획?”
“응. 프랑스엔 얼마 동안 있을 거고 또 얼마동안 돌아와 있을 것인지.”
잭은 일단 강현의 시간 계획을 물어보았다. 그것은 연구를 같이 하는 동료로서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글쎄.. 아직 계획이 없는데?”
잭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렸다. 그것은 프랑스에 오래 있을 수록 강현의 마음이 미국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언제 떠나는데?”
“흐음.. 일단 지금하는 이족 보행 연구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나면?”
“알았어.”
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상부에 이 일을 알렸다. 그의 경험상 강현이 성과를 내는 것은 최소 6개월.
아즈삭의 경우에는 구상 자체를 한국에 있을 때부터 시작한 것이라 오래 걸렸고, 석유 제조 기술은 강현이 무리해서 연구를 한 것이라 더 빨리 걸렸다. 즉, 보통 강현이 연구를 완성하는 것은 평균 6개월 정도였다.
그러니 상부에서는 그 6개월을 기준으로 앞으로의 대처를 어떻게 해야할 지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럼 빨리 연구 마무리하고 와. 기다릴게.”
공항에서 강현은 제시를 배웅했다. 몇 개월 동안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강현은 남은 연구를 마무리하고 제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제시를 배웅하고 다시 돌아온 강현은 휑한 집을 보았다. 둘이서 같이 살 집으로 구입했었는데 한 사람이 사라지니 허전했다. 물리적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이 집의 인테리어에서 제시가 차지하는 부피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것이 심리적 부피인가?’
그는 새삼 제시의 의미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상념이 이제는 없는 부모님에게 향했다.
그의 상실감이 생각난다. 그러나 실감 되지는 않았다. 시간은 그때의 상실감과 괴로움마저 마모시켰다. 자신이 과학에 몰두에 괴로움과 현실을 잊으려고 했던 세월 동안 그 괴로운 사건은 힘을 잃었다.
시간이 약인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그만큼 성숙해 진 것인가?
강현은 알 수 없었다.
강현이 출근을 하고 잭이 점심 시간에 데리러 오고 아즈삭은 자신을 보좌해 이족 보행 로봇의 설계를 도우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프랑스에서 걸려오는 제시와의 화상 통화는 그런 일상에 파고들었다. 과거의 강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빈자리가 커져가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제시와의 대화를 바라는 강현이 마음도 점점 커져갔다.
[… 그래서 말이야 막심이라는 이 남자가 자꾸 나한테 집적거리는 거 있지?]
“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강현이 뚱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 보았다. 제시는 그런 강현의 얼굴을 보면서 키득 댔다.
막심이라고? 요즘 제시에게 집적거린다는 잘생긴 이탈리아 계의 미국인 출신 프랑스 이민자란다.
뭔가 꽤나 복잡해 보이는 정체성이지만 확실한건 매너 좋고 잘 생겼다는 것이다. 한국에 들어가면 여고생들이 꺅꺅 소리를 지를 정도라나?
그런 남자가 자신의 여친과 접촉이 잦다는 것에 기분이 좋을 남자는 없었다.
[그러니까 빨리 연구를 마치고 오라고. 여기에 오면 새롭게 영감이 생길거야.]
파스퇴르 연구소. 평범한 화학 전공자였던 파스퇴르의 이름을 딴 연구소이다. 파스퇴르는 실상 화학에서는 그리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광학 이성질체를 최초로 발견한 화학자였다.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농업국가이고 와인이 특히 유명했다.
와인의 침전물에서 얻어지는 타타르산은 편광 성질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발달하는 기초 과학에 의해서 합성 타타르산이 제조 되었으나 기존의 와인 침전물에서 얻는 편광 성질이 나오지는 않았다.
파스퇴르는 끈질긴 결정 분리 작업 끝에 인공 합성 타타르산에는 서로 거울에 비친 것 같은 결정구조를 가진 타타르산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론만 있던 광학 이성질체를 최초로 실증했다.
여기에서부터 파스퇴르는 백조 플라스크라고 불리는 세균설 실증 실험, 그리고 살균법과 혐기성 세균의 발견까지 생화학자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그것은 농업이 중요한 국가 산업인 프랑스의 배경이 크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는 생물학, 특히 박테리아와 미생물 분야에서 최첨단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HJ세포를 개발한 제시는 무척이나 크게 자극을 받았다. 어떤 생명체도 결국은 세포를 기반하기에 그런 작은 미생물의 세계에 집중하는 연구소의 분위기와 쌓인 노하우는 HJ세포를 개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느껴졌고 또 이미 충분한 가능성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남친 역시 여기에 오면 생물학에 대한 영감이 무럭 무럭 쏟아 오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퍼튜니티니 큐리오시티니 하는 로봇과 기계, 전자 공학, 천문 물리학으로만 뒤덮힌 환경에 있으니 생물학에 대한 강현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강현의 재능과 관심이 생물학에 없을 수도 있지만 제시는 과감하게 그런 가능성은 생략했다.
자신이 보기에 강현은 생물학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관심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인공 광합성 칩만 보더라도 그것은 미세 가공 공정의 극치일 뿐만 아니라 일련의 생물학적 작용의 기제를 완벽하게 이해한 결과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HJ세포를 만들 때 필요했던 시약을 비롯해 제한 효소와 접합 효소들을 거의 다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이는 강현이 생물학에도 깊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생명 공학적인 작품이 겨우(?) 석유 제조 공법에 필요한 유전자 조작 녹조류 하나 뿐이라는 것은 생명 공학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NASA의 환경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로망에 의해서 강현이 빨리 프랑스로 오도록 질투심을 유발하는 짓도 벌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로망? 별것 아니다. 그저 천재 생명 공학 부부로 인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것 정도?
[나 아직 인기 많은가봐.]
“인기 많아서 좋겠네.”
제시는 뚱한 남친의 질투에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의 심리란..
[후후, 강현도 인기 많아.]
“나 인기 없어.”
글쎄.. 과연 그럴까? 제시는 ‘강현을 원하는 상류층 미녀들은 넘쳐 난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꾸욱 참고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이족 보행 연구 언제 쯤 마무리 될까?]
“글쎄? 설계만 하는 것이면 한 달이면 족하지만 필요한 신소재가 생기면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강현의 대답에 제시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외로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의 그녀가 화면 저편에서 강현에게 말했다.
[아. 나 외로운데.. 설계만 하고 오면 안 될까?]
“안... 될 것 없지.”
강현은 ‘안 돼’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제시의 표정이 그의 마음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