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석유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이들이 언제 이렇게 저자세가 되어 본 적이 있었나? 하지만 지난 한 달간의 치열한 협상은 석유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기업과 국가들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망할 수 밖에 없다.’
애시당초 이런 일찍이 없었던 사상 최대의 라이센스 컨소시엄은 저 희대의 천재의 ‘배려’였다. 막말로 그는 몇몇 힘 있는 석유 카르텔하고만 손을 잡아 라이센스를 제공해도 문제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면 강현이 손을 잡은 석유 카르텔에 반대된 입장의 기업과 국가들은 끝없이 유출되는 자본에 이미 경제 위기가 왔을지도 몰랐다.
또한 그 지난한 협상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마주하다 보니 알게 된 또 하나의 사실도 있었다. 저 천재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힘의 크기도..
그러니 겁 없이 라이센스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일방적으로 배분하겠다는 데드 라인도 통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 라이센스의 배분은 컨소시엄이 구성 되었을 때의 세계 석유 생산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최대한 기존의 질서를 붕괴시키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강현의 설명은 현상 유지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환호성을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이들에게는 분노와 아쉬움을 자아냈다. 물론 록팰러와 국제적 석유 기업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럼 천천히 훑어보시고 의문 나는 사항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참가자 각자에게 배분된 디스플레이에서 연단의 화면과 동일한 파일이 전송되었다. 그것은 라이센스에는 연간 생산 비율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각 기업과 국가들에게 배타적 수출 지역과 판매 가능한 비율 역시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적혀 있었으니,
‘현 배분 비율은 4년을 주기로 이해 당사자들간의 협상안이 타결된다면 그에 따라 재 배분 될 수 있다.’
이것은 강현이 지지 부진한 협상을 일찍 종료시키고 도입이 미지근한 석유 제조 기술의 도입을 촉진하는 수준까지만 간섭하겠다는 의도였다.
참가자들은 스스로가 속한 국가와 조직에 배분된 비율과 양을 가늠해 보았다. 특별히 불이익은 없었다. 다만 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되어 갑갑할 뿐이었다.
[의문이 없으시다면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제조 시설은 자유롭게 짓고 싶으신 곳에 지으시되 제가 파견한 사람들의 철저한 감수를 받으셔야 합니다. 생산량에 대한 데이터는 암호화되어 자동으로 송신될 것이며 한계를 넘은 생산은 불허됩니다.]
강현의 말에 몇몇 국가들은 똥 씹은 표정을 했다. 솔직히 제조 시설만 건설되고 그 유전자 변형 녹조류의 샘플만 받는다면 협약이고 뭐고 몰래 생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철저하게 관리를 한다면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질문이 없나요?]
“이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왜 리비아에는 배분이 없습니까?”
[리비아?]
강현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려 밑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록팰러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 록팰러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리비아가 왜요? 당신과 관련있습니까?]
“리비아도 엄연히 산유국입니다! 그러니 리비아에도 라이센스 배분을..”
[잠깐만요. 댁은 누구길래 리비아를 걱정하는 겁니까?]
“주미 리비아 대사 사르도라고 합니다.”
[왜 리비아 정부 사람이 여기에 있죠? 허락한 적 없습니다만..]
“....”
태연한 강현의 말에 사르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왜, 왜입니까?”
[카다피가 저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카다피. 리비아의 대통령이자 40년이 넘도록 독재를 해온 독재자였다.
강현의 말에 회장 안이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계시는 몇몇 분들 중에서는 아시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이 석유 제조 기술을 개발한 이유는 저를 죽이려고 한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록팰러는 소름이 끼쳤다. ‘응징(punish)’이 아니라 ‘처리(dispose of)’란다. 굉장히 직설적이고 이해하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제가 개발한 배터리 기술로 꽤나 손해를 보게 된 그들은 개인적인 일탈, 혹은 조직과 국가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으로 저를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연구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사르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마 배터리 기술로 유가가 꽤나 떨어졌기 때문이겠죠. 제가 관련 기술을 하나 더 내 놓으면 석유 업계 전반이 망가질까봐 걱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석유 시장을 붕괴 시킬 기술을 만들어 내고자 했고 결과는 보다시피..]
강현이 좌중을 훑어 보았다. 모두는 깨달았다.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석유 업계는 시장 붕괴까지는 아니라도 아비규환과 같은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란 것을..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온건한 사람입니다. 불필요한 희생을 만들 필요는 없었죠. 그래서 저는 저를 제거하려고 했던 이들을 찾아내 그들을 처리할 만한 이들에게 자료를 건네 주었습니다.]
아! 그래서였던가? 강현의 석유 제조 기술이 발표되고 나서 유난히 석유 업계의 유명인사들이 많이 실각하고 법정에 서는 등,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좌중의 사람들이 강현의 말을 들으며 표정을 굳히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피식 웃었는데 그로 인해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경쟁자들이었다. 그들이 강현의 자료를 받아들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었는지 지금도 그때의 흥분을 떠올리면 하물이 불끈했다.
[하지만 리비아와 같은 독재국가는 다르죠. 과연 카다피와 관련자들을 실각 시킬 수 있나요? 그래서 저는 라이센스 배분에서 제외한 것입니다.]
“이익! 가, 각하가 그랬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증거가 필요해요? 말씀하시지.]
그러면서 강현은 태연히 자신의 노트북을 조작해 폴더 하나를 열었다. 폴더명이 ‘Exclusion list’였다. 제거 명단이라니... 하지만 다행이도 파일은 ‘카다피’라고 적힌 압축파일 하나만 있었다.
강현은 그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몇몇 문서 파일을 열었다.
[카다피의 해외 비밀 계좌에서 빠져나간 의뢰 대금입니다. 이것은 그 자금의 흐름을 추적한 것이고요.]
“어, 어떻게 이, 이런 것을.. 서, 설마 해킹이라도 한 것입니까! 그것은 불법이요!”
할 말을 잃은 사르도가 발악을 했지만 강현은 태연했다.
[증거 있어요?]
“.....”
사르도의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소리쳤다.
“당신이 그 유명한 아즈삭의 개발자라는 것을 아오! 그렇다면 은행의 비밀계좌 정보도 빼낼 수 있는 충분한 크래킹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래서 제가 그 능력을 남용했다는 증거가 있어요?]
“그,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오!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오!”
[제가 얌전히 연구실에 있다가 이런 일로 세상을 둘러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저같이 돈 많은 변호사를 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눈 가리고 아웅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라는 것을요.]
“.....”
적나라한 말에 사르도는 할 말을 잃었고 참석자들 중에 좀 찔리는 사람들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책임자인 카다피가 처벌 받지 않는 리비아에게는 어떤 라이센스도 배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그리고 강현이 경비에게 눈짓을 하자 경비가 사르도에게 다가가 양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사르도는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건장한 사내 둘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으아악! 저주받을 지어다!”
[그럼 더 질문 하실 분 없으신가요?]
억지로 끌려나가는 사르도가 악담을 했다. 하지만 강현은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고 무시했다.
.....
잠시간의 침묵.
“저기 이 배분된 라이센스와 그에 따른 조건 조항들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리비아에 배분되지 않은 라이센스는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하지만 곧 질문이 시작되었다. 사르도와 리비아의 일은 결국에는 남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기업과 국가의 이득을 위해서 라이센스의 조건 조항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필수였다.
물론 사르도와 강현의 대화는 인상 깊었고 기억에 잘 저장해 두었다. 세기의 천재, 강현의 성향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 =
[석유 제조 기술의 개발 배경이 밝혀져!]
[경악! 누가 세기의 천재를 죽이려고 했는가?!]
[리비아! 석유 업계에서 퇴출 직전!]
[천재! 석유 시장을 주무르다!]
역시 기자들은 대단했다. 언론이 귀찮았던 강현은 컨소시엄 회장에 일체 언론의 출입을 통제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홀에 있었던 일들이 세어나갔다. 하지만 수백 명이 넘은 이들의 입을 일일이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강현이 억지로 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강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소란에서 벗어난 채 다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비아서는 석유가 수출되지 않아 경제적인 파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활고를 불러왔고 다시 독재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그래서 결국 리비아에서는 카다피를 몰아내기 위한 내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강현은 관심이 없었다.
“휘유! 이제 말 붙이기도 겁나네.”
잭은 과장스레 휘파람을 불었다. 정보부 요원인 그는 이미 NASA의 연구실에서부터 강현의 집까지 쫘악 깔린 수상한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 바이어나 헤드헌터, 각국의 외교관 등으로 위장 했지만 잭은 그들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음습한 느낌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밀을 취급하는 자들에게서만 나는 관조적인 태도와 조심스러운 몸짓에서 풍겨나오는 일반인은 눈치 채지 못하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강현이 석유 제조 기술의 개발 배경을 밝히자 미 정부는 곤혹스러웠다. 세상에는 밝힐 일이 있고 밝히지 말아야 할 일이 있었다. 특히 권력의 이동과 기존 질서에 관한 대중의 불신을 가져올 일은 되도록이면 감춰야 했다.
강현이 겪은 일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세상에! 강현 같이 중요한 인물이 테러와 살해의 위협에 노출되다니! 그리고 거기에 미국의 석유 회사도 끼어있었다니!
록팰러 그룹의 스탠다드 오일의 이사가 실각되고 청부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일이 다시 재조명되었다. 덕분에 스탠다드 오일은 또다시 진통을 겪었지만 관련자는 이미 모두 쫓겨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책임 추궁은 없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학자!’
‘미국 과학도들이 가장 되고 싶은 과학자!’
히어로 물이 넘쳐나는 미국답게 미디어를 운영하는 기업들에게 사람을 우상화하는 데에는 천부적인 자질과 노하우가 있었다.
강현은 연구비 때문에 조국을 배신하고 떠난 이기적 과학자가 아니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택한 자유의 상징이 되었고 이는 세계화라는 트랜드에 섞여 정당화 되었다.
‘한국은 세계화를 받아들인 나라다.’
‘한국은 다문화 정책을 수용한 나라다.’
‘그러니 한국의 국민 역시 세계화의 흐름속에서 자신이 충성을 바칠 국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다문화 정책으로 다른 민족의 충성을 받기를 바라면서 타국으로 이민한 한국인이 여전히 한국에 충성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다. 닥터 강은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라 소중한 미국의 시민이다.’
온라인으로 강현을 비난하는 이들은 주로 한국인이었고 그런 그들은 강현을 옹호하는 미국 네티즌들의 압도적인 댓글 파도에 쓸려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폭풍 속에서 중심인 강현은 조용히 연구에 집중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하아 하아.. 밤을 세워 각각 두 편 연참.. 2만자.. 하, 하얗게 불태웠어..
PS- 리비아 2011년까지 카다피의 독재가 있었지만 소설 속에서는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물론 금방 사라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