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제140화
독고현의 말에 선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증명할 거? 그게 뭔데?”
“흑두맹은 사파에서 가장 뛰어난 문파들만 모여 있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암묵적인 원칙이기도 하지.”
독고현이 차를 후루룩 마시면서 말을 이어갔다.
“따라서 김선우 널 흑두맹에 받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 흑마천의 지분을 가져갈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고 싶다면 다른 멤버들에게 네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증명이 필요하다는 거다.”
흑마천의 위치는 흑두맹의 맹주 독고현 다음인 서열 2위였다.
서열 2위의 자리를 단지 맹주의 영향력만으로 올라가는 건 한계가 있었다.
자칫 잘못 하다가는 정파 연맹의 비웃음을 살 수도 있었으니까.
“좋아, 무슨 말인지 감 잡았어. 뭘 보여줄까?”
선우는 만두를 마저 씹으면서 동파육 한 접시를 자기 앞에 끌어당겼다.
독고현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8대 정파가 가입한 무림맹에는 너도 알다시피 쟁쟁한 고수급 플레이어들이 있다. 그리고 정파 소속 플레이어들에겐 상징적인 존재가 무림맹이기도 하고.”
“응, 그런 건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김선우 네가 무림맹의 8대 정파 중 한 곳의 장문인을 제거해줘야겠다.”
뒤에서 먹고 있던 코딱충이 사례가 걸려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불나방이 말없이 자신의 접시를 재빨리 가려서 보호했다.
선우는 동파육을 먹으면서 물었다.
“무림맹 중에 누굴 쳐야 하는데?”
“누구든 상관없어. 8대 정파의 장문인 중 한 놈만 골라서 없애라. 단, 캐릭터 삭제를 건 결투로 없애야 한다.”
“캐삭빵을 하라고?”
독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8대 정파가 소속된 무림맹.
정파 쪽 플레이어들이라면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조직이었다.
무림맹 소속의 8대 장문인 중 하나라면 정파의 거두 중 하나.
그런 존재를 선우가 제거해야 했다.
캐릭터 삭제를 건 결투로.
“잠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맹주님. 무림맹 소속 장문인 이라면 대형 문파들인데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캐삭빵을 무슨 수로 하죠?
코딱충이 기침을 진정시키고 나서 독고현에게 물었다.
독고현이 싱긋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거야 너희들 대장이 알아서 하겠지. 김선우의 주특기 아니던가?”
선우는 동파육을 다 먹은 뒤에 가재의 살을 발라내 소스에 버무린 볶음밥 접시를 자기 앞에 가져다 놓았다.
“딱충아, 걱정하지 마라. 얘 말대로 내가 알아서 하면 되니까.”
독고현이 거들었다.
“들었지? 알아서 한다고 하니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코딱충은 마지못해 물러났다.
자신의 테이블에 앉은 뒤 불나방과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는 코딱충.
독고현이 왜 무림맹의 장문인 중 하나를 선우에게 제거하라는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선우가 그걸 직설적으로 꺼냈다.
“독고현 네가 말한 8대 정파 장문인 중 하나만 캐삭빵으로 닦아버리면 되냐?”
“물론이다. 그러면 널 흑두맹의 2인자 자리에 앉혀놔도 그 누구도 감히 반기를 들 생각조차 못할 거야.”
“흐음~”
선우가 고민하는 척을 했다.
볶음밥을 훌훌 마시듯이 먹으면서 이리저리 생각의 각을 재는 시늉을 하는 선우.
여기에 독고현이 저도 모르게 걸려들었다.
“너무 고민할 것 없어. 이건 그냥 흑두맹에서 네 지분을 차지하고 조직의 실권을 장악하게 해주기 위해 내가 도와주는 거니까.”
선우는 볶음밥을 먹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무림맹의 장문인 중 하나를 없애라….’
8대 정파 중 한 곳을 골라서 캐릭터 삭제를 건 결투를 하는 것.
그것이 선우가 흑두맹의 서열 2위 지분을 차지하는 조건이었다.
볶음밥을 다 먹고 옆에 놓인 계란 국물을 후루룩 마시는 선우.
국물을 마신 뒤 다시 볶음밥 한 접시를 또 끌어당겼다.
엄청나게 먹어대는 선우를 흐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왕륜과 독고현의 측근들.
볶음밥을 떠먹으려던 선우가 갑자기 대뜸 입을 열었다.
“내가 정파 연맹에 갈까봐 쫄리는 거냐?”
“뭐?”
독고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표정 관리를 시작했지만 선우의 눈을 빠져나갈 순 없다.
‘역시.’
독고현의 눈빛이 흔들거리는 것을 선우가 봤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툭 하고 내뱉었는데 독고현의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하, 하하… 그게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아니야? 내가 정파 연맹으로 가지 못하게 이런 조건을 내건 줄 알았는데.”
선우가 입에 숟가락을 넣고 쪽 빨았다.
독고현의 입술이 바들거렸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뭐야? 이놈. 설마 그 사이에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독고현은 다시 헛기침을 한 뒤 말문을 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난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어차피 김선우 네가 흑두맹에 들어와서 서열 2위가 된다면 정파 연맹과는 섞일 수 없는 적이다. 그 외에 다른 의도는 없어.”
독고현과 달리 선우는 이미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가만 있자…. 흑두맹의 2위 자리를 주는 조건이 이 정도면… 무림맹은 어느 조건을 줄까?’
선우가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조건을 받고 무림맹에 가서 머릴 좀 더 굴려봐야지.’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선우가 독고현의 제안을 수락했다.
“정말로 할 수 있냐?”
“물론이지. 8대 정파 중 아무 곳이든 상관없다고 했지?”
독고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언제까지 캐삭빵을 해야 하지?”
“일주일을 주겠다.”
“시간을 넘기면?”
“뭐~ 흑두맹 서열 2위 자리는 물 건너가는 거지.”
“오케이. 간다. 내 스트리밍 방송 잘 지켜봐.”
선우가 일행들에게 손짓을 했다.
객잔을 빠져나가는 선우 일행을 묵묵히 지켜본 왕륜이 독고현 에게 물었다.
“맹주님. 정말 김선우가 무림맹의 일원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글세.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만약 김선우가 일주일 안에 해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서열 2위 자리가 아니라 다른 조건을 제시해야겠지.”
독고현은 차를 마시면서 선우가 나간 객잔의 입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선우…. 정말로 무림맹에 단신으로 도전할 수 있을까? 얼마나 배짱을 부릴 수 있는지 한번 감상해보지.’
* * *
선우는 코딱충, 불나방, 왕소륜, 오초백과 모여 있었다.
“야, 김선우. 너 진짜로 무림맹에 쳐들어갈 생각 하는 거냐? 아니지?”
코딱충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선우의 표정을 살폈다.
“흑두맹주 독고현이 정말로 너한테 서열 2위 자리를 순순히 내어줄 거라 생각 하냐? 저놈은 지금 널 낚는 거야. 절대로 흑두맹 2인자의 자리를 내주지 않을 거다.”
왕소륜이 선우에게 열변을 토했다.
“흑두맹주 독고현이 왜 무림맹의 8대 장문인 중 하나를 제거하라고 했을지 생각은 해봤냐? 안 해봤을 거야.”
오초백은 반쯤 기대를 접은 눈빛으로 선우에게 빈정거렸다.
불나방은 묵묵히 이들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아무 생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김선우. 내 이야기 듣고는 있는 거냐?”
“뭐라고 대답이나 좀 해라. 아무 리액션이 없어.”
“니네들 8대 장문인들 정보 좀 말해봐.”
“너, 진짜로 독고현 떡밥을 물겠다는 거냐?”
“일단 알려줘 봐 인마. 촐싹거리지들 말고.”
코딱충과 왕소륜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가장 먼저 왕소륜이 말문을 열었다.
“일단 무림맹 소속의 8대 정파는 화산파, 소림, 무당파, 곤륜파, 아미파, 개방, 모산파, 공동파가 있다.”
“그중에서 서열은 어떻게 되는데?”
“가장 입김이 센 건 누가 뭐라 해도 소림, 무당파, 화산파, 개방 애들이지. 여기 모여 있는 길드원들 평균 실력도 가장 좋고.”
선우는 8대 정파들 중 해치웠을 때 파급력이 가장 막강한 장문인을 고르고 있었다.
어차피 공격할 거면 센 놈을 골라야 돈이 된다.
코딱충은 이런 선우의 속내를 이미 간파한 뒤였다.
“김선우. 행여나 스트리밍 방송 틀어놓고 어그로 끌겠다고 제일 센 문파 쳐들어갈 생각 하지 마라. 네가 잘못 엮여버리면 우리들도 다 줄줄이 알사탕으로 끌려가서 죽는다고.”
“걱정 마라. 딱충아. 너 내 마공을 우습게 보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닌데 정파 연맹 애들이 결속력 있게 모여버리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아무리 네가 익힌 무공이 절세마공이라고 해도 혼자서 어떻게 다 쓸어버릴 거냐? 그게 말이 되냐?”
“안 될 건 또 뭐냐?”
오초백이 끼어들었다.
“이봐, 김선우. 일단 독고현이 8대 정파 중 아무 곳이든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러면 개방 놈들 어떠냐?”
“개방?”
“무림을 떠도는 거지 클래스의 플레이어들이지. 개방 길드의 간부들 빼고는 길드원들이 죄다 뿔뿔이 흩어져서 다니거든.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것도 그 때문이지만. 심지어 개방의 방주라는 놈도 혼자서 여기저기 잘 다닌다고.”
“오~ 그러면 혼자 있을 때 시비 걸어서 캐삭빵까지 쭉 갈 수 있네.”
“바로 그거야. 게다가 쪽수가 적을 때가 많으니까 일단 뒤탈도 없을 거고 방주 놈을 없앤 다음 흑두맹으로 오면 되잖아.”
오초백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선우가 물었다.
“근데 초백아. 너 아까 객잔에서도 잠자코 있다가 왜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이냐?”
“생각해 보니까 흑두맹에 네가 들어간다면 아무래도 내 문파에도 도움이 많이 되지 않겠어?”
오초백이 손바닥을 쓱쓱 비벼대면서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런 오초백을 왕소륜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뭐? 뭐? 할 말 있냐? 소룡문주?”
“개방 놈들은 뿔뿔이 흩어진 것 같아도 쪽수를 금방 불러 모아. 게다가 방주 놈하고 캐삭빵을 한다고? 아마 김선우가 방주를 이긴다 쳐도 그쯤이면 개방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개떼처럼 모여 있을 걸?”
“상관없어. 일단 초백이 말대로 개방을 친다.”
선우가 스트리밍 방송을 갑자기 켰다.
“야, 방송은 왜? 뭐하려고? 너 설마 이걸 동네방네 떠벌리고 시작하겠다는 거냐?”
“아니. 일단 구경이나 해라.”
스트리밍 방송을 켜자 조금 뒤에 많은 시청자들이 몰려들었다.
-방장님. ㅎㅇ
-오 ㅋㅋㅋㅋ 방장님 흑룡당 패버리는 거 재미있게 잘 봤으요~! ㅋㅋㅋㅋ
-흑마천 사라지는 걸 보니 내 묵은 체증이 다 사라지는 거 같아서 넘 짜릿했어요 ㅋㅋㅋㅋ
시청자들은 선우가 흑마천을 해치운 것에 대해 아직도 열광하고 있었다.
선우는 처음에 시청자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슬슬 본론을 꺼냈다.
“자, 시청자님들. 지금 제가 아주 흥미로운 첩보를 입수해서 이렇게 여러분들과 한번 썰이나 풀어볼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선우의 말에 시청자들이 급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첩보? 무슨 첩보인데요?
-이번엔 또 무슨 짓을 꾸미시려고 ㄷㄷㄷㄷㄷㄷ
-방장님. 흑마천 없앴는데 사파 애들이 보복 안 한다고 하심?
-어라? 이 방장님 아직까지 살아서 방송 하는 게 신기하네 ㄷㄷㄷㄷ
-다들 조용! 김선우 님께서 지금 이야기 하려고 하잖아.
선우가 말문을 열었다.
“제가 얼마 전에 들은 첩보에 의하면 모종의 세력들이 살수를 모집하여 8대 정파의 장문인들을 노린다는 것입니다.”
독고현의 제안을 제 3의 세력들의 음모로 꾸며서 일종의 떡밥을 투척했다.
스트리밍 방송으로 선우의 떡밥이 퍼져 나간다면 정파 연맹의 귀에도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
“그러면 시청자님들. 곧 정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번 기대해 보자구요.”
방송을 짧게 마친 선우에게 코딱충이 물었다.
“야, 방송에다 그런 떡밥을 왜 흘려?”
“너희들 생각 좀 해봐라. 개방 애들이 정보 수집을 잘한다며? 내가 이런 떡밥을 던지면 걔들이 듣고 무슨 생각 하겠냐? 나한테 물어보려고 접근을 해올 거 아니냐?”
“그러면 개방 방주한테 더 빨리 접근하려고 이런 거냐?”
“물론이지. 이제 곧….”
선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이~~ 거기 너희들. 잠깐만 이리로 와봐.”
낯선 플레이어들이 나타나 선우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