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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면 레벨업-95화 (95/200)

# 95

제95화

오징어 맥주집의 모든 구경꾼들은 선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선우는 이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뜸을 들일수록 지켜보는 모든 이가 속이 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걸 즐겼다.

“에헴. 레비아탄 길드는 나랑 한 패가 아니야. 그건 신경 쓰지 마라.”

열혈독사는 더욱 의심이 커졌다.

‘아니라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하긴 생각해봐. 레비아탄 길드랑 손잡았는데 이 자리에서 자기 입으로 했다고 말하진 않을 거잖아.’

선우는 레비아탄 길드를 만난 적도 없지만 이미 열혈독사의 머릿속엔 온갖 추측이 결론을 짓고 있었다.

그건 결국 협상 테이블에서 열혈독사가 불리해진다는 뜻.

열혈독사의 머릿속을 거세게 흔들수록 선우는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었다.

“레비아탄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걱정 마. 진짜야.”

선우가 방긋 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웃으면서 한 번 더 레비아탄과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열혈독사와 아누비스 길드원들은 더 큰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아누비스 길드원들이 귓속말로 미친 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X발, 저 새끼, 레비아탄하고 같은 편이네.

-아놔! 독사 형 어쩌냐? 그냥 여기서 일어나자고 할까?

-틀림없어. 김선우 레비아탄이랑 한패야. 빌어먹을 새끼!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줄 아냐?

한편 열혈독사는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 틈을 선우가 노렸다.

“야, 독사라고 했지? 내가 딴말 필요 없고 핵심만 정리해준다. 먼저 너네 길드의 모든 아이템 대여권을 무료로 내게 개방해라. 둘째, 아누비스 길드가 독점하고 있던 모든 사냥터와 던전의 출입은 아르콘 대륙의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전면 무료로 개방해라. 셋째, 콜로세움에서….”

선우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조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구경하던 플레이어들이 너도나도 환호를 했다.

“우와! 김선우 파이팅!”

“저렇게만 되면 진짜 아르콘에서 게임 할 맛 나지.”

“진짜로 저게 가능할까?”

플레이어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고 선우가 조잘거리는 말들이 묻혀갈 즈음.

콰앙!

선우의 도발적인 조건을 미친놈처럼 킥킥거리며 듣던 열혈독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내려친 테이블이 우들우들 떨렸다.

흥미롭게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깜짝 놀라더니 더 주목했다.

“야, 한판 붙나봐.”

“그럼, 그렇지. 열혈독사가 그냥 가만히 듣고 있을 놈은 아니지.”

“저기서 PVP 뜨고 김선우가 발라줬으면 좋겠다.”

열혈독사가 너무 빨리 일어나서 옆에 있던 아누비스 길드원들은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이들은 귓속말로 싸워대느라 미처 열혈독사를 잡지 못했던 것.

“저… 형님. 여기서 결투하기에는 아무래도 그림이 안 나올 건데요.”

“시끄럽다. 너희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이 자식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꾀꼬리처럼 울어대는 걸 듣고도 가만있는 거냐? 앙? 니들이 먼저 나서야 되는 거 아냐?”

열혈독사는 이미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아누비스 길드원들이 멀뚱멀뚱 선우의 말을 듣고만 있었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형. 잠깐 애들하고 귓말 하느라.”

“뭐? 귓말? 야, 지금 이 마당에 귓말 할 생각이 들어?”

열혈독사가 아누비스 길드원들을 타박하는 순간을 선우가 포착했다.

“야, 독사야. 너무 그러지 말어. 왜 그렇게 맨날 길드원들 못살게 구냐. 그러니까 애들이 불만이 많지. 맨날 길드 탈퇴하고 레비아탄 가고 싶다고 그러고.”

“뭐라고?”

선우의 말에 잠자코 욕만 먹던 아누비스 길드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열혈독사가 싸늘한 눈빛을 뿌리며 자신의 길드원들을 노려봤다.

“아, 아닙니다! 형. 절대 아니에요! 저 새끼가 지금 우릴 모함하는 거라고요!”

“형님. 저는 김선우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저 스파이 아니에요.”

얼떨결에 아누비스 길드원들은 열혈독사에게 스파이가 아니라는 해명을 시작했다.

선우가 가볍게 찔러본 말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이미 오징어 맥주집에 몰려든 모든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웅성거렸으니까.

“야, 쟤들 뭐 켕기는 게 있나봐. 갑자기 스파이 아니래.”

“그러게. 도둑이 제 발 저리나보네.”

“김선우가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말을 뱉을 리가 없어.”

어쩌냐?

선우는 그런 말을 아무 생각도 이유도, 개념도 없이 잘 뱉는데.

더군다나 열혈독사가 자신의 길드원을 다그치는 타이밍을 노린 건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길드 마스터와 길드원 간의 불신의 싹이 트고 있었으니까.

“야, 너희들 내가 물어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스파이 타령은 왜 하냐?”

“예? 아뇨. 김선우 저 자식이 갑자기 우리더러 아누비스를 탈퇴하고 레비아탄 가고 싶다는 둥 모함을 하잖아요! 딱 봐도 스파이 모함이죠. 그러니까 아니라고 한 겁니다.”

선우가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은 딱 한 마디였다.

그 한마디를 반박하기 위해 아누비스 길드원들은 각자 수십 마디를 떠들어야 했다.

열혈독사는 이제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길드원들이 어쩌면 선우의 눈짓 한 번으로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젠장, 믿을 놈이 하나 없어. 도대체 어떤 놈을 믿어야 하지?’

의도치 않게 선우의 심리전은 잘 먹히고 있었다.

선우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냐? 열혈독사 네가 결정해라. 난 기회를 줬다.”

열혈독사는 이제 선우의 손바닥 위에 놓인 꼴이었다.

“기회 같은 소리하네. 누가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제안을 받아들이냐? 남의 길드 말아먹을 일 있어?”

“이미 말아먹고 있는 거 같은데.”

“이게 진짜!”

“형! 참으세요!”

“비켜 인마!”

참다못한 열혈독사가 앉아있던 선우한테 달려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곁에 있던 체로키와 라비트가 열혈독사의 손목을 붙들었다.

“에이, 독사 형. 이건 아니지. 일단 놓고….”

“어쭈? 니들 많이 컸다? 이제 막 내 손도 잡고 그러네?”

선우는 열혈독사가 자신의 멱살을 잡는 순간까지도 역이용했다.

“아!! 아아아! 아아아~!!”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일부러 선우는 자신의 멱살을 쥔 열혈독사의 손을 감싸 쥐면서 더 거칠게 흔들며 몸을 휘청거렸다.

“아누비스 길드면 다냐? 협상하러 왔는데 사람을 잡으려 하네!”

목청껏 떠들어대는 선우를 보며 열혈독사가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야! 인마. 안 닥쳐? 고작 멱살 잡은 걸 갖고.”

“아야야! 아아!! 내 목! 아!!!!”

열혈독사의 눈썹이 구겨졌다.

고막이 먹먹해질 정도로 고음으로 엄살을 부려대는 선우.

하지만 위층에서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심각하게 바라봤다.

“와, 열혈독사 양아치라고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 보는 눈들 많은데 막 패려고 하네.”

“진짜 개쓰레기 길드야.”

플레이어들 틈에 끼어 잠자코 선우와 열혈독사가 옥신각신하는 걸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김 비서님. 아무래도 열혈독사에게 후원하는 건 끊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거 지금 촬영하는 애들이 몇 명인데 저딴 식으로 행패를 부립니까?”

“후우~ 회장님께 말씀드려. 아누비스 길드와의 후원 계약은 없던 걸로 하는 게 좋겠다고.”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안경을 쓰면서 오징어 맥주 집을 나갔다.

한편 선우와 열혈독사는 계속 멱살잡이 중이었다.

선우는 절묘한 각도로 열혈독사의 손목이 아닌 손등을 감싸고 자신의 멱살을 더 말아쥐게 했다.

“어쭈? 야, 너 이거 네가 더 쇼를 하네? 야~ 이거 봐봐. 김선우가 지금 구라치는 거라고. 지가 내 손 잡아서 멱살을 말아 올리고 있….”

“아아!!!”

선우가 비명을 질러가며 열혈독사의 해명을 덮어버렸다.

플레이어들이 참다못한 나머지 야유를 퍼부었다.

“야~ 열혈독사 네가 그러고도 길드 마스터냐!”

“양아치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겸손할 줄 알았다. 실망이다 이 새끼야!”

“앞으로 아누비스 길드가 CF 찍은 상품들 다 불매한다.”

“엘리트 양아치 새끼여 저거.”

오징어 맥주 집의 여론이 심상치 않았다.

“김선우를 놔줘라!”

“맞아! 놔줘! 김선우보다 레벨 높으면 장땡이냐?”

“순 돌깡패새끼.”

“돌깡패가 아니지. 뱀깡패지. 저거는.”

“왜? 뭘 째려봐? 나도 칠거야? 야, 쳐라! 쳐! 쳐봐!”

“나도 쳐라!”

2층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갑자기 우르르 내려와서 열혈독사에게 몰려들었다.

선우는 비명을 질러대다가 좌우로 곁눈질을 한 뒤에 재빨리 손을 풀었다.

열혈독사가 선우를 가볍게 뒤로 밀치면서 멱살을 놓는 순간.

“으~어이쿠!”

선우가 할리우드 액션을 절묘하게 선보이며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는 와중에도 생선을 발견한 고양이의 눈매로 테이블 끝을 손으로 잡으면서 아예 난장판을 만들었다.

와장창!

쨍그랑!

“와, 김선우 놔주랬더니 그냥 던져버리네.”

“이야, 아누비스 길드 멋있어. 그렇지~ 그냥 놔주는 건 쪽팔리지. 남자답게 패기 넘치게 던져야지.”

“아으으….”

선우는 바닥에 누워서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이를 지켜보던 본 브레이커 길드원들은 자신들이 뭘 어찌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야, 이거 우리가 뭐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되냐?

-몰라,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서.

본 브레이커 길드원들이 멀뚱거리며 서 있자 선우는 라비트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멍청아. 가만히 보지 말고 날 부축하면서 소란을 떨라고.

선우의 귓속말에 뭔가 알아차린 라비트가 체로키에게 전달했다.

“서, 선우야! 괜찮아?”

한 박자 늦은 타이밍이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아…으으… 야, 지금 당장 열혈독사한테 시비 까라.”

“뭐?”

“시비 까라고. 아무 욕이나 하던지. 빨리.”

선우가 시키는 대로 체로키와 라비트가 열혈독사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X발! 아누비스 길드장이면 다냐?”

“양아치 길드로 간판 바꿔라, 너도 열혈독사라 하지 말고 뱀대가리 하는 게 어떠냐?”

선우에게 어깨 너머로 배웠던 표현법을 쓰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열혈독사가 눈에 살기를 띄고 테이블을 옆으로 걷어치웠다.

콰장창!

체로키와 라비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열혈독사가 순식간에 선우를 부축하던 라비트의 목을 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 선우가 말리는 척 끼어들면서 열혈독사에게 멱살 잡힌 척 가까이 들러붙었다.

“이 새끼가 또….”

선우는 열혈독사만 들을 수 있게 뭔가를 속삭거렸다.

“뭐? 그건 뭔 소리냐?”

선우는 대답 대신 연기를 펼쳤다.

“아아!! 내 손가락! 열혈독사가 내 손가락 꺾었어.”

열혈독사는 손가락에 붙은 벌레 털어내듯이 선우를 밀쳤다.

다시 바닥을 뒹구는 선우.

이 모든 것은 촬영 하던 플레이어들이 스트리밍 방송으로 업로드를 하고 있었다.

“야, 일단 후퇴한다. 가자.”

“아니, 형. 이거 수습 안 하고 그냥 가시면….”

“빨리 따라와. 쪽팔리니까.”

열혈독사는 본전도 못 건지고 도망치듯 맥주 집을 빠져나갔다.

뒤로 울려 퍼지는 야유 소리.

“젠장! 김선우 저 자식은 그냥 미친놈이 아니야. 초 미친놈이야.”

* * *

열혈독사는 선우와 협상으로 뒤통수 준비했다가 10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후우… 인피니티 로드 하면서 이렇게 힘든 건 처음인데.”

선우는 열혈독사가 경험해본 적 없는 패턴의 유저였다.

“젠장, 이거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처음 보는 위기에 몰린 열혈독사.

그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으니.

“형님. 레비아탄의 불독상어가 얼굴 좀 보자고 하는데요.”

“뭐? …들어오라고 해.”

아지트 문을 열고 레비아탄 길드원들이 들어왔다.

불독상어가 들어오면서 열혈독사와 마주보며 앉았다.

“뭐 때문에 왔냐?”

“본론부터 말할게. 열혈독사. 내가 엄청난 걸 알아버렸다. 우리가 동맹을 맺으면 김선우를 잡을 수 있어. 우리가 준비를 해온 게 있으니까 들어봐.”

“준비?”

열혈독사의 귀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조금 전 맥주 집에서 나오기 전에 선우가 자신만 들을 수 있게 속삭거렸던 말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레비아탄 애들이 널 위해 준비를 열심히 한 게 있다. 곧 알게 될 거야.’

열혈독사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 준비를 하셨어? 레비아탄이 날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셨을까? 너무 궁금하네.”

불독상어는 코딱충과 눈치를 주고받았다.

‘뭐야, 이 자식. 동맹하러 왔는데 분위기가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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