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제94화
모두의 주목을 받고 들어온 선우.
초반부터 기선 제압은 성공적이었다.
선우가 앉으면서 물었다.
“뭐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한 거냐?”
열혈독사가 선우를 따라 앉았다.
“나는 너랑 대화를 하고 싶다. 김선우.”
“대화? 무슨 대화?”
“일단 동맹을 맺는 게 어떠냐? 아누비스 길드랑 손잡으면 네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들을 누릴 수 있어.”
열혈독사의 제안에 위에서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동맹? 방금 열혈독사가 김선우한테 동맹을 제안한 거 맞지?”
“맞는 거 같은데. 아닌가?”
“동맹 맞는 거 같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와, 대박. 아누비스 길드가 저렇게 먼저 나서서 동맹 맺자고 하는 경우는 없었잖아?”
“없었지. 그 악명 높던 레비아탄 조차 아누비스한테 먼저 동맹을 제안했었으니까.”
“근데 지금 저 아누비스가 김선우만 예외적으로 동맹을 제안한다는 거야? 김선우가 얼마나 대단한 플레이어길래 이러나 했는데 장난 아니네.”
“쟤 진짜 알면 알수록 무서운 플레이어야. 별거 없는 거 같은데 방송 영상 보면 조회수가 실시간 1위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니까.”
“진짜 난 놈이지.”
“부럽다. 나도 아누비스가 저렇게 한 번 굽히고 들어오면 얼마나 짜릿할까?”
“아르콘 대륙 랭킹 1위의 길드인데 완전 구름 위를 뒹구는 기분일걸?”
“근데 이렇게 되면 아누비스 길드 보면서 레비아탄 길드도 뭔가를 김선우한테 제안할 거 같은데.”
플레이어들은 모두 선우와 열혈독사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주목했다.
열혈독사의 말에 선우는 듣기만 하고 있었다.
“어떠냐? 이만하면 너에 대해 예우는 충분히 해준 거 같은데.”
“으음~”
선우는 가벼운 감탄사만 대충 흘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열혈독사의 눈엔 선우의 모든 행동이 다 거슬렸다.
‘건방진 놈.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선우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그건 좀 약해.”
“뭐라고?”
선우가 말을 툭 내뱉자 열혈독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약하다고? 야, 김선우. 장난 하냐?”
“열혈독사라고 했지? 잘 들어봐. 네 제안이 왜 약한 줄 아냐?”
선우의 말에 열혈독사가 다시 차분해졌다.
“뭐가 약하다는 건데?”
“먼저 네가 말한 사냥터 무료 이용. 이건 말이 안 되지. 사냥터는 원래 누가 독점하라고 만든 것도 아니잖아? 근데 여기를 공짜로 쓰게 해준다는 게 특권이냐?”
“뭐라고? 야, 네가 우리 길드가 어느 사냥터를 어디까지 독점했는지 몰라서 그러나본데.”
“그리고 두 번째로 길드의 아이템을 돈 내고 빌려주겠다. 이건 뭔 소리냐? 내가 너네 길드에 돈 내는 게 특혜냐?”
열혈독사가 눈썹과 입술을 달싹였다.
옆에 앉아있던 아누비스 길드원들이 열혈독사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속삭였다.
“형. 참으세요. 이건 무조건 참으셔야 합니다.”
“아우… 저게 진짜….”
“형, 여기서 폭발하시면 길드 이미지 엉망이라고요. 김 비서님도 틀림없이 이걸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회장님 귀에 또 한 번 들어가면 그땐….”
“야, 조용히들 해라. 알고 있으니까.”
“예, 형님.”
아누비스 길드원들이 속삭거리는 걸 빤히 쳐다보던 선우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원하는 조건을 너한테 제시하지. 들어봐.”
“뭐? 야, 김선우.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조건을 제시하라 마라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열혈독사야. 열혈독사. 대 아누비스 길드의 마스터라고.”
“알아, 그건 나도 아니까 진정하라고. 일단 내 말은 들어본 다음에 하든지 말든지 결정하면 되잖아?”
선우의 능글맞은 웃음.
열혈독사는 뒤가 켕겼지만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좋아, 말해봐. 뭐냐?”
“먼저 아누비스 길드의 모든 아이템은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무료로 쓸 수 있게 해줄 것.”
덜컹!
“형! 참아요!”
“앉으십쇼! 형님. 진정하세요.”
“팔에 힘 좀 풀어요. 형!”
“아으… 야, 좀 놔봐 이거.”
“참으시라구요.”
열혈독사의 급한 성질이 폭발하고 있었다.
위층에서 플레이어들끼리 마구 수군거렸다.
“와, 열혈독사 성깔 봐라. 저러니 아르콘 대륙에서 개망나니로 욕이나 처먹지.”
“야, 쉿. 들을라.”
“들으면 어때? 지가 여기까지 올라와서 팰 거야?”
3층에서 수군대는 플레이어들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어이, 지금 우리 길드장 뒷다마 깠냐?”
“예? 아니 저기… 그게 아니고….”
뒤를 돌아보자 아누비스 길드의 문양이 가슴에 새겨진 플레이어가 사납게 노려본다.
“아누비스 길드가 우스워 보여?”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한 번은 실수니까 넘어간다. 입 조심해.”
“예, 고맙습니다.”
열혈독사는 선우가 제시한 오징어 맥주집의 각 층마다 자신의 길드원들을 미리 깔아뒀었다.
혹시나 선우가 무슨 짓을 할지 신경 쓰였으니까.
열혈독사는 분을 간신히 삭인 뒤에 다시 앉았다.
“후우, 야, 김선우. 아누비스 길드의 아이템 대여는 철칙이 있다. 길드원이라고 해도 돈을 내고 써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 아이템의 주인과 친분이 두터우면 개인적으로 무료로 빌려줄 수는 있지. 그렇다고 모든 아이템을 다 무료로 빌려줄 순 없는 거야. 주인이 다 다르니까. 뭔 말인지 알아 듣냐? 멍청아.”
아누비스 길드에는 콜로세움에서 쓰일 수 있는 온갖 아이템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누비스 길드원이 되면 길드의 모든 아이템들을 일정 금액을 내고 대여할 수 있었다.
대여료는 문제가 안 된다.
빌린 아이템으로 콜로세움에서 더 큰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아누비스 길드의 자금으로 구입한 아이템들부터 길드의 간부들이 소유한 아이템 콜렉션까지 다양했는데 이걸 선우는 모두 무료로 쓰게 해달라고 한 것.
열혈독사가 날뛰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선우는 그런 걸 신경 안 쓴다.
어차피 아누비스 길드와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선우는 의도적으로 아누비스 길드를 떠 보는 중이었다.
“그런 건 길드 마스터인 네가 알아서 해야지. 너 길드장이잖아? 길드 안에서 그 정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길드장은 왜 하냐?”
선우는 열혈독사의 자존심을 벅벅 긁었다.
열혈독사의 성격을 이미 파악해버렸으니 선우가 할 일은 간단했다.
무조건 자존심만 찔러대기.
열혈독사는 성질이 급하기에 흥분을 하면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다.
선우는 그 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명색이 대 아누비스 길드 마스터라며? 그 정도 권한은 걸어야지 나랑 동맹을 맺지. 고작 사냥터 무료 이용 이게 뭐냐? 찌질하게.”
“뭐? 찌질?”
“형님! 참으세요!”
“일단 손에 힘 좀 풀어요. 형.”
열혈독사는 부들부들 떨었다.
자존심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선우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 툭툭 침 뱉듯이 말을 꺼냈다.
“솔직히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실은 여기 오기 전에 내가 누굴 만난 줄 아냐?”
“뭐? 그게 뭔 소리냐?”
“레비아탄 길드가 너보다 먼저 날 찾아왔어. 오는 길에 잠깐 늦은 게 그거 때문이지.”
“뭐라고?”
열혈독사를 비롯한 아누비스 길드원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선우 양 옆에 앉아있던 본 브레이커 길드원들은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빠르게 주고받았다.
-야, 선우 얘 지금 뭐라는 거냐? 레비아탄을 언제 만났어?
-몰라. 레비아탄 애들 오면서 못 봤는데.
-선우야. 너 지금 뭐라는 거야? 레비아탄 애들을 오면서 언제 만났는데?
영문을 모르는 본 브레이커 길드원들.
하지만 선우의 의중을 파악한 라비트가 길드원들을 단속했다.
-야, 조용히 해. 지금 선우가 일부러 트릭을 쓰는 거라고. 미끼를 던져야 열혈독사가 물지.
-아~ 그런 거였어? 난 또 진짜 만난 줄 알았네.
귓속말을 잠자코 듣기만 하던 선우는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레비아탄 길드가 날 먼저 만나서 뭐라 했게?”
사실 레비아탄 길드를 만난 건 거짓말이다.
선우는 이걸 미끼로 열혈독사를 낚아버릴 생각이었다.
레비아탄 길드를 오면서 만났다는 선우의 말에 열혈독사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
‘뭐냐 이거. 이 자식 지금 날 만나러 오는 길에 레비아탄 놈들을 만났다고? 왜? 뭐 때문에? 설마 레비아탄과 먼저 손을 잡은 건가?’
열혈독사는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오르지만 정리가 되지 않고 난잡했다.
안 그래도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열혈독사였다.
‘아으… 골 깨지겠네 진짜. 김선우 뭐 이런 자식이 아르콘 대륙에 들어오고 지랄이냐고!’
열혈독사와 선우의 테이블에서 열리는 협상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까지 수군거렸다.
“야, 대박! 레비아탄 길드가 먼저 손을 썼어.”
“지렸다. 언제 그런 타이밍이 있었지?”
“누굴까? 여기까지 오면서 시간이 좀 있다고 해도 촉박했을 거 같은데.”
“혹시 김선우가 공개한 그 스파이 중 누가 몰래 만나러 온 거 아닐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이미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추측은 협상을 지켜보던 레비아탄 길드를 당황케 했다.
불독상어는 실시간으로 플레이어들이 촬영 중인 선우의 협상 방송을 보고 있었다.
“야, 저게 대체 무슨 말인데? 김선우를 내 허락도 없이 누가 만나러 간 거야?”
“형, 저거 혹시 우리 길드에 심어둔 아누비스 스파이 아닐까요?”
“인마! 아누비스 스파이면 독사한테 가야지 왜 김선우한테 가? 말이 안 맞잖아.”
불독상어 옆에서 팔짱 끼고 있던 코딱충이 입을 열었다.
“저건 아누비스 스파이가 아닌 거 같다.”
“뭐? 딱충아. 그게 무슨 말이냐?”
“상어 형. 잘 생각해봐. 김선우가 열혈독사를 만나러 가면서 우리 쪽 사람을 만났다고 했지?”
“그랬지.”
“그런데 처음에 김선우는 아누비스랑 우리 쪽 길드에 서로 심어놓은 스파이들이 있다고 했어.”
“그랬지.”
“자,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어. 양쪽에 스파이를 보냈다고 하는데 우리 쪽은 스파이를 아직 못 찾아냈지. 그리고 형이 길드원들한테 김선우 손대지 말고 물러나 있으라고 했는데 이걸 누가 어기고 김선우를 몰래 만났다? 길드장의 명을 어기고? 그러면 답은 나온 거야.”
“뭔데?”
“김선우가 심어둔 스파이야.”
“뭐어?”
코딱충의 말에 불독상어와 레비아탄 길드원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들의 반응을 본 코딱충이 신이 난 것처럼 계속 떠들었다.
“이건 틀림없어. 김선우는 우리 쪽하고 아누비스 양쪽에 모두 스파이를 심어뒀을 거야.”
“야, 잠깐만. 딱충아. 그러면 아누비스 애들이 우리 쪽에 스파이 보낸 게 아니라는 거냐?”
“그건 모르지. 아누비스가 보낸 스파이들 속에 김선우의 스파이가 있을 수 있다 이거지.”
“우와, 그러면 이거 뭐냐, 그러니까 이중 스파이라는 거네?”
“그런 셈이지.”
“와~ 김선우 이 무서운 놈. 언제 이렇게 치밀하게 스파이를 보낸 거야?”
“김선우의 스파이가 아니면 저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지금 열혈독사랑 협상하면서 김선우가 실수로 우리에게 허점을 드러낸 거라고.”
완벽한 착각 속에서 코딱충은 자신 있게 손가락을 딱 하고 치면서 감을 잡았다고 여겼다.
“야, 그러면 우린 어떻게 해야 되냐?”
“일단 김선우가 독사랑 협상을 어떻게 끝내는지 지켜보자고. 우린 그 다음에 움직여야 돼.”
* * *
선우의 말에 이제 완전히 넘어 와버린 열혈독사였다.
아누비스 길드원 조차 선우의 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들은 본 브레이커 길드처럼 서로 귓속말을 정신없이 주고받는 중이었다.
-야,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냐? 레비아탄 애들을 먼저 만났다고?
-이런 x발!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독사 형하고 만나기로 했으면 중간에 샛길로 빠지는 거 반칙 아니야?
-야, 아무래도 이거 판을 들어 엎어야 하지 않을까? 김선우가 레비아탄 애들을 만나고 여기를 온 거면 뭔가 심상치 않아.
-독사 형한테 말해야 되는데 어떻게 말할 건데?
-몰라 나도! 아 젠장, 아르콘 대륙 와서 이렇게 골 터지는 일은 또 처음이네.
귓속말을 주고받느라 말없이 표정 관리만 하는 아누비스 길드원들.
열혈독사는 혼자서 분을 삭이면서 물었다.
“야, 김선우. 너 사실대로 말해라. 레비아탄 길드랑 한 패였냐!”
열혈독사의 외침에 협상 장소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선우를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