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제4화
선우는 물끄러미 눈앞에 째깍거리는 시간을 바라봤다.
마치 은행 지점에 가면 볼 수 있는 전자시계처럼 초 단위로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 전 선우가 들었던 알림.
“24시간 뒤에 레벨이 1 오른다는 거면… 이 시간이 다 되면 레벨업을 한다는 건가?”
선우는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걸 보며 잠깐 고민했다.
“가만 있자… 24시간 뒤에 레벨이 오르는 거면 그 전까지 내가 사냥을 아무리 해도 경험치는 안 오른다는 건가?”
선우는 실험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평소 날마다 찾던 사냥터로 갔다.
퍽!
토끼 한 마리를 잡았다.
“…….”
역시나 경험치 알림은 들리지 않았다.
다른 알림이 들려왔다.
[플레이어의 특성상 경험치는 부과되지 않습니다.]
[시간에 의해서만 레벨업이 가능합니다.]
선우는 알림을 듣고 자신이 각성한 클래스가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역시 경험치가 오르는 건 여전히 불가능하네. 사냥을 해도 경험치는 못 먹지만 24시간 뒤에는 자동으로 레벨이 오르는 특성이면….”
사냥을 해서 경험치를 올리는 시스템이면 1시간에 많은 몬스터를 잡으면 그만큼 레벨업의 속도가 빨라진다.
반면 선우는 정반대였다.
경험치 획득은 여전히 불가능했고 24시간 뒤에 레벨이 1씩 올랐다.
이 말은 선우가 아무리 많은 몬스터를 사냥해도 24시간 전까지는 경험치와 레벨업이 불가능하다는 뜻.
“이걸 좋아해야 되는 건지… 말아야 되는 건지….”
인피니티 로드는 초반에 장비와 사냥터 선택부터 클래스의 특성 파악과 빠른 레벨업을 위한 공략집이 서점에 가면 불티나게 팔리는 게임이었다.
선우가 만약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정상적인 레벨업이 가능했다면 1년간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가만있어도 레벨업 한다고 좋아할 건 아니잖아… 시간이 곧 돈인데… 젠장, 망했다.”
인피니티 로드에서 초반 성장이 빠를수록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특히 레벨이 오르면서 획득하는 스킬이나 각종 퀘스트로 스트리밍을 방송하면 그 자체로 인기몰이는 부족한 게 없을 정도였다.
“남들은 24시간이면 정말 빡세게 렙업 하면 못해도 2~3렙은 가능할 건데. 한 달이면 50에서 60렙까지도 가능할 거고….”
인피니티 로드 커뮤니티에서 초고속 레벨업 인증 샷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특히 길드에서 상위 랭커들이 버스를 태워주면 30일이면 100레벨까지 가능하다는 걸 날마다 영상 촬영과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인증해낸 플레이어까지 있었다.
“30일 만에 100 레벨 찍은 플레이어는 공략집 써서 100만부 넘게 팔렸지.”
인피니티 로드의 레벨링 시스템은 기존의 게임들과 달리 레벨의 제한이 없었다.
다른 게임에서 99 혹은 999레벨이면 속칭 ‘만렙’ 이라고 불렸지만 인피니티 로드에서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계속 새로운 레벨업 신기록이 매년 등장했고 그때마다 플레이어들과 팬들은 엄청난 관심을 가졌었다.
“24시간이면 하루에 1레벨씩 오른다는 건데 30일이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30레벨까지밖에 성장을 못한다는 뜻이잖아. 다른 플레이어들이면 나보다 20~30레벨은 더 많이 올릴 수 있는데….”
선우는 처음에 흥분했던 감정이 짜게 식는 걸 느꼈다.
“가만? 아니지… 처음엔 느려도… 혹시 이거 고렙이 되도 하루에 1씩 오를 수 있는 거면?”
인피니티 로드 역시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고레벨이 될수록 레벨업의 속도가 더뎌졌다.
10레벨 대의 플레이어가 24시간 사냥을 해서 경험치를 버는 것과 100레벨 대의 플레이어가 버는 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800레벨을 넘기 시작하면 고가의 장비와 출입 제한이 걸려 있는 고위험 사냥터와 던전을 돌면서 1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했다.
필수적으로 길드의 상위 랭커들과 파티 플레이로 사냥을 해야만 하루 혹은 이틀에 1 레벨이 올랐다.
이마저도 위로 오를수록 더 어려워졌고 대형 길드에서 스타플레이어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기 위해서 매달 특정 기간 동안 버스를 태워가면서 성장시켜도 하루에 1레벨 올리는 건 극도로 어려웠다.
물론 천재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기발한 발상으로 희귀 던전과 사냥터, 혹은 유니크 퀘스트를 받고 레벨업을 할 때가 많았고 이러한 노하우는 저마다 극비였다.
“지금은 느릴 순 있어도 시간이 갈수록 무조건 내가 앞서갈 수 있어.”
선우가 다시 오른쪽 상단에 옮겨진 시간을 확인했다.
[22:51:02 남음]
그 사이 1시간 넘게 시간이 흘렀다.
알림에 따르면 22시간 뒤에 선우는 레벨업을 하게 된다.
문제는 남은 시간 동안 뭘 하냐는 거였다.
“일단 감각 좀 살릴 겸 사냥이나 좀 해볼까?”
경험치를 얻지 못하는 건 여전하지만 이제 레벨업이 가능했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우는 사냥터로 나갔다.
가볍게 토끼를 잡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야! 거기 잠깐!”
선우를 불러 세운 놈들은 블러드 스컬의 길드원들이었다.
꼬마 NPC를 폭행하던 양아치 플레이어들.
‘젠장… 저 새끼들을 또 만나네.’
선우는 눈썹을 구겼다.
아까는 둘이었는데 지금은 셋이었다.
못 보던 얼굴 하나가 끼어 있었다.
“형, 저놈이야. 아까 우리한테 시비 털었다고.”
선우에게 한 번도 공격을 먹이지 못한 놈이 뒤따라 오는 플레이어에게 조잘거렸다.
“네가 내 동생한테 시비를 걸었었냐?”
플레이어는 한쪽 가슴에 피에 얼룩진 해골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블러드 스컬의 공식 길드원.
“기수야, 쟤 맞아?”
“맞다니까. 형, 저 새끼가 갑자기 날 쳤다고.”
기수라는 놈은 말하는 꼬라지만 봐도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으로 느껴졌다.
반면 그 형이라는 놈은.
허리에 찬 장검을 든 전사 클래스로 꽤 상위권의 랭커로 느껴졌다.
“난 얘 형 오기환이라고 한다. 네가 뭐 때문에 내 동생을 쳤는지 이유는 물어봐야겠는데. 대답은 준비 됐냐?”
“미안한데, 네 동생이 저기 어떤 꼬마 NPC를 먼저 까고 있었어. 난 그걸 말렸을 뿐이라고. 손 댄 적은 없어. 진짜야.”
오기환이 동생을 힐끔거렸다.
“우, 웃기지마! 네가 날 먼저 쳤잖아. 형, 저 새끼 지금 죽을까봐 수작 부리는 거야.”
“어쨌건 얜 내 동생이라서 네가 쳤으면 대가는 치러야겠다. 이해는 해줘라. 길드의 강령이란 게 있어서 말이지.”
오기환은 선우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스릉.
장검을 빼어든 오기환이 선우를 향해 깔끔하게 검을 휘둘렀다.
“…….”
선우는 검을 슬쩍 회피하고 옆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오기환은 물끄러미 선우를 노려보며 물었다.
“듣던 대로 제법 하는 놈이구나. 레벨이 높아보이진 않고… 초보 같은데… 혹시 재육성 하는 중이냐?”
“알 거 없잖아.”
“하긴 뭐, 그럼 나도 진짜로 하지.”
오기환의 눈이 번쩍였다.
장검이 오기환의 손을 따라 곡선을 그리며 선우의 목을 향해 나아갔다.
선우는 뒤로 한 발 물러나며 칼끝을 흘려보냈다.
오기환은 속으로 당황했다.
‘뭐지? 이놈.’
오기환이 선우를 다시 노려봤다.
‘내 검을 초짜가 이렇게 방어한 적이 없었는데….’
선우의 민첩성을 느낀 오기환이 물었다.
“너 뭐하던 놈이냐?”
“그냥 생계형 게이머다. 신경 끄고 가던 길 가시지. 난 엮이고 싶지 않거든.”
“푸흣. 어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넌 이미 내 동생 앞에서 날 망신 줬어. 그러니까 좋든 싫든 결판을 내야지. 안 그러냐!!”
오기환이 바닥을 차면서 장검을 공중에 휘둘렀다.
초승달 형태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선우가 크게 도약하며 있던 곳을 벗어났다.
검기가 바닥을 파헤쳤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먼지를 헤집고 오기환이 나타났다.
“응? 어라? 어디 갔어? 이 새끼.”
흙먼지를 통과하던 사이에 선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야, 이 새끼 어디로 갔냐?”
“콜록 콜록. 모, 못 봤는데.”
검기가 만든 흙먼지는 바람을 타고 오기환의 동생까지 덮쳐버렸었다.
“후우… 이 다람쥐 같은 새끼가… 날 쪽팔리게 하고 튀었다 이거지… 일단 생겨먹은 꼬라지는 내가 확인했으니까 몽타주 그려서 수배 내려야겠어. 인피니티 로드로 돈 벌긴 글렀다 이 새끼.”
* * *
선우는 켄트 마을로 피신해 있었다.
“휘유… 젠장… 초반부터 피곤한 놈들하고 엮여버렸네. 이거 당분간 마을 밖으로 나가기 애매해졌는데.”
인피니티 로드에서 켄트 마을은 유일무이하게 P.K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초보 플레이어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켄트 마을을 제외한 고레벨의 플레이어들이 많이 가는 마을들은 특정 조건 하에 유저들간의 결투가 가능했다.
선우는 안전한 켄트 마을로 숨어들어 있었다.
“후아… 이제 사냥도 못 하고, 해봤자 22시간 전까지는 경험치도 없고 레벨업도 없고… 나 그럼 뭐 해야 되냐?”
선우가 고개를 젖히는 순간.
“킁킁? 응?”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났다.
냄새를 따라간 곳은 켄트 마을의 유명한 먹거리 골목이었다.
“아, 그렇지.”
선우는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해 게임 속에서 여러 콘텐츠를 즐길 여력이 없었다.
인피니티 로드의 음식들은 현실의 것과 판타지 속에서 볼 수 있는 상상의 것들로 나뉘었다.
“이걸로 시간이나 좀 죽여야지.”
선우는 먹거리 골목으로 들어갔다.
먹거리 골목은 온갖 음식을 팔고 있는 NPC들과 플레이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닭꼬치가 지글거리며 익어가고 있는 걸 선우가 물끄러미 보자 NPC가 물었다.
“이보슈, 거 손 빠르게 생겼는데 이리 와서 나 이것만 도와줄 수 있소?”
닭꼬치를 정신없이 구워가며 땀을 뻘뻘 흘리던 주인 NPC가 선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갑자기 알림이 들려왔다.
띠링.
-퀘스트가 생성됐습니다.
먹거리 골목의 닭꼬치를 20년째 굽고 있는 닭꼬치 장인 볼드에겐 일손이 필요하다. 몰려드는 손님들과 타들어가는 닭꼬치로 정신이 없는 그를 도와 닭꼬치를 구워라.
등급: F
완료 조건: 닭꼬치 굽기 (0/100)
실패 시 페널티: 없음
보상: 스킬 사용권 1장 지급
선우의 눈에 쏙 들어오는 문구가 보였다.
“스킬 사용권? 이게 뭐지?”
이번에도 처음 들어보는 내용.
인피니티 로드의 스킬은 각자 클래스마다 쓸 수 있는 범위가 달랐다.
선우는 일단 퀘스트를 달성하고 보상을 받아보기로 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닭꼬치 주인이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내어줬다.
선우는 토끼와 다람쥐를 잡던 노련한 손놀림으로 닭꼬치들을 빠르게 뒤집으며 굽기 시작했다.
“우와, 저 사람 뭐냐?”
“손이 안 보인다. 손이.”
“타짜 출신인가? 볼드 아저씨보다 손이 더 빠른 거 같은데?”
닭꼬치를 먹으려고 줄서있던 플레이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우의 손놀림은 닭꼬치가 절대 타지 않고 완벽하게 익도록 했다.
구경하던 플레이어들이 하나 둘 늘었고 결국 줄을 서서 닭꼬치를 사먹고 있었다.
늘어나는 손님들을 본 주인 NPC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자네 정말 고맙네!”
100개의 닭꼬치를 굽고 나자 퀘스트가 완료됐다.
[닭꼬치 장인 볼드가 플레이어에게 감격 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스킬 사용권 1장이 지급됐습니다.]
선우는 볼드와 인사를 하고 먹거리 골목의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