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리지의 몸으로 빙의를 할 수 있습니다. ]
드디어, 한없이 오른던 호감도가 다 차오른 듯 차원의 앞에 안내창이 떠올랐다. 7대장에게 있어 리지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했으니 쉽게 죽이지는 못했을 거다.
‘구하려면 지금 밖에 없어.’
우선 당장에는 주변에 이교도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원은 곧바로 리지의 몸으로 [빙의]를 시전했다. 그의 시야에 비치던 동료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모습은 흐릿해지더니 검은빛 안으로 사라졌다.
철컹
이윽고 그의 손에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자신의 팔을 묶고 있었다. 느낌만으로도 수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차원이 빙의한 리지는 사지가 철창에 묶여 있는 채 외로이 독방에 갇혀있었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다, 이런 곳에 혼자 있다니, 흘러오는 소리마저 얼어붙어 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이윽고, 시야에 집중하니 바로 앞에는 리지가 남긴 듯한 글이 적혀 있었다. 글자는 다행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니, 울프릭의 동생답네.’
리지의 용맹함에 감탄하던 차원은 그녀가 남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메시지는 차원 일행과 함께 있는 프렌테와 테란, 7성군 기사들이 세뇌마법에 걸려있으니 그곳에서 계획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라는 내용이었다.
리지는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차원에게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아무래도 차원이 자신의 몸으로 빙의할 수 있도록 하늘에 떠있는 별이 다 떨어지도록 빌었던 것이겠지.
“그런데 메시지는 무슨 수로 남긴 거지.”
어쩐지 수상했던 7성군 기사들의 반응의 이유를 메시지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허나 궁금한 건 리지가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남겼는지였다. 리지의 팔다리는 모두 묶여 있는 상태였으니까. 마법을 이용해서 글을 쓰기라도 한 건가?
차원은 당장 리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몸을 둘러보았으나,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고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대악마를 깨우기 위해 사용된 리지니까. 바로 그때, 차원은 리지 바로 앞에 있는 제단를 발견했다. 역시나, 이교도들은 리지를 제물로 바칠 생각인 듯하였다. 세뇌가 풀렸으니 이제 쓸모없다는 건가.
그뿐만 아니었다. 제단에는 이미 각 대륙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들의 개체들이 올려져 있었는데 차원이 게임 플레이어 시절 모두 다뤄봤던, 무력으로 치면 로울로의 바로 아랫급 정도는 될만한 몬스터들이었다.
‘저것들을 벌써 모아두다니.’
저것들을 다 모아두고, 제단가 있는 것을 보인 이곳이 대악마를 깨우는 장소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어디선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에게 난 소리는 아닌데. 차원은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 제단 반대편에는 리지와 동년생으로 보이는 한 소년이 리지처럼 묶여 있었다. 이어서 소년은 차원과 눈이 마주치자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모조리 죽어버린 듯 공허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타고난 팔자는 결코 이들을 벗어날 수 없나 보군. 신성력이라는 게 고작 이렇게 쓰이다니…
“너, 이름이 뭐냐.”
소년은 어둡지만 확실히 들릴 만큼 또렷하게 대답했다.
-알렌도르. 쿤시한테 잡혀 왔다.
알렌도르라면...! 이름을 듣자마자 차원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과거 [사자의 기억]을 통해 쿤시가 그를 리지의 대항마로 키우려 한다는 것을 봤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이어 그는 리지에게 원한이 있는 듯 쓰디쓴 약을 먹은 것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불이 다 꺼진 야경을 바라보듯 침침한 모습이다.
“네 인생의 불행을 왜 날 탓하는 건데?”
-전부 너 때문이니까. 네가 대악마를 먼저 깨울 거라는 강박 때문에 쿤시 그놈이 날 들들 볶은 것도, 흑화 속도가 느리다고 제물로 버려진 것도 전부!
알렌도르의 말만 들어도 리지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허나 차원은 그의 이야기에서 다른 곳에 집중하였다.
‘아직 흑화되지 않은 건가.’
이 소년은 자신의 입으로 버려졌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다행히 이 소년은 예전의 리지처럼 흑화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잘만 하면 이 소년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차원은 곧바로 [빙의]를 해체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차원의 모습을 본 알렌도르의 눈동자가 물결이 일렁거리듯 커져 갔다. 대륙에서 차원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알렌도르 또한 차원의 이야길 익히 들어 왔기에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멀리서 응원했습니다.
“응원?”
-저 또한 이교도가 무너지길 바라니까요.
알렌도르의 눈은 어느새 자신의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에 차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이교도 세력에 세뇌를 당하지 않고 맨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째서 아직 흑화 당하지 않고 맨정신일 수 있는 거지?”
-신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제단으로 버려졌지만.
알렌도르는 약을 먹고 사탕을 입에 문 듯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널 이용해 대악마를 깨우려던 것이 아니었나?”
-대악마를 깨우기 위해선 완전히 흑화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제 신성력을 흑화시키지는 데 실패했고 지금쯤 다른 사람을 구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겁니다.
“그들의 계획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다른 세계로 영력을 모으기 위해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 혹시 지구라는 곳인가?”
-맞습니다! 그들 말로는 이 세계의 영력이 지구라는 곳의 영력보다 약하다 하더군요.
이들이 한 걸음 갈 때마다 그들은 두 걸음씩 걸어가듯 따라잡는 것에 조급해졌다.
‘지구로 넘나드는 걸 넘어 영력까지 얻고 있을 줄이야. 더욱 빨리 움직여야겠어.’
***
리지의 몸에 빙의했던 차원은 다시 울프릭한테 접속하여 감옥에 있는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뭔가 알아낸 게 있어?
목소리에 힘이 빠진 데린이 물음을 있는 힘껏 던졌다.
“리지가 엄청난 걸 남겼더라고.”
이들의 시선은 모두 차원에게로 향했다. 전부 각기 다른 눈이지만 뜻하는 바는 같은 눈이었다.
“이교도들은 이미 게이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그곳을 통해 지구를 오가고 있어.”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 아니야?
“잘 들어, 데린. 당신이 놓친 게 있을 테니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에 허탈해한 데린이었지만, 이어진 차원의 말에 그를 아리송하게 쳐다봤다.
“현재 그들은 지구로 넘어가 대악마를 깨우기 위한 영력을 구하고 있어. 리지는 제물로 바칠 생각 같고.”
-그럼 리지를 살릴 방법은 없는 건가요?
“생각 중이지만 당장은 이곳에 모인 이교도 세력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야.”
-7대장 중 다섯 명이나 집결한 상태에다 몸도 묶인 상태인데 무슨 수로?
“이 지하수로 들어오는 입구에 모든 병력을 집결시킬 거야. 이미 프랭크를 시켜 모든 왕국의 기사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시켰어.”
-충분할까요?
“지구에 사는 세력들도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으니 병력은 충분할 거야. 거기다 엄청난 지원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거든.”
지금 이곳에 있는 저들이 소속된 기관. 이차원은 7성군들을 바라보았다.
“7성군 기사들.”
기뻐하는 내색 조금은 보일 줄 알았는데. 그들은 7성군좌들이 프라하성으로 온다는 말을 듣고도 조금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끄덕일 뿐이었다. 이를 본 데린은 눈썹을 조금 꿈틀거리며 그들을 지켜보다 차원과 눈이 마주쳤다.
“참, 리지가 죽기 전에 참회를 하고 싶다며 그때 일은 사과하더군.”
차원은 이번엔 코웰과 데린을 향해 말하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 일과 연관되는 말을...? 데린은 그제서야 차원의 말을 알아듣고 낮은 탄식을 뱉었다.
-무슨 일이요?
“그때 일 있지 않나. 그때 일.”
-아아, 그때 일.
데린은 차원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반응을 해주었다.
-대체 그때 일이 뭔데?
-그때 일 있잖아. B급 기사단장인 널 바보로 만든 일.
-맹세코 그런 일은 내 평생 없었어.
어우, 이 눈치 없는 기사 같으니라고. 코웰 또한 데린의 말에 정색을 하며 서로가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한편, 울프릭의 몸에 있던 차원은 이번엔 코웰의 몸에 빙의를 사용해 이동하였다. 정신을 차린 울프릭은 차원을 보자마자 다친 곳은 없냐고 그를 먼저 챙겨주었다.
“난 괜찮으니 앞으로 계획에 대해 들어. 프랭크를 시켜 모든 병력을 프라하성 지하로 집결시켰다. 7성군 기사들까지도. 그들을 습격하는 것이 지금의 계획이야.”
차원은 이들에게 앞서 설명한 내용을 듣지 못한 울프릭에게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핵심만 골라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금방 이해할 수 있던 울프릭은 차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지는 다친 곳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차원의 말에 울프릭은 크게 안도하듯 혼이 빠져나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몸 상태보다 리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나 보군.
“계획은 확실히 들었지? 당신들을 구하려고 7성군 기사들이 온다고.”
이어서 차원은 여전히 넋이 나간 7성군 기사 둘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키도록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들은 입으로 되뇌며 차원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처럼,
-7성군 기사가 온다. 지하도로 집결한다.
“좋아. 조금만 힘내자. 곧 다시 돌아올게.”
차원은 그 말을 끝으로 코웰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얼마 뒤, 정신을 차리자마자 코웰은 데린부터 찾더니 아까의 주제를 꺼내며 소란을 피워대었다.
-데린! 대체 날 바보로 만든 그때 일이란 게 무엇이지? 암만 생각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정말 그럴까? 잘 생각해 봐. 있을걸?
데린의 말에 이 상황을 모르던 울프릭 또한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연신 호응을 해주었다.
그 모습들 때문에 더욱 미치겠는지 코웰은 거의 빌다시피 부탁하는 어조로 바뀌었다.
-그냥 말해주면 안 되겠어?
-힌트. 바보가 왜 바보겠어. 자기 줏대가 없으면 바보인 거지.
데린은 세뇌당한 7성군 기사 둘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7성군 기사들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차원이 말한 계획을 되뇌고 있었다.
-7성군 기사가 온다...... 지하도로 집결한다......
코웰은 예전, 연회장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아, 저런 상태였으니 기억을 하지 못해내었지.
-내가 저랬단 말이지.
코웰은 7성군 기사와 자신을 비교하며 낮은 한숨을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