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패스티로 빙의하시겠습니까? ]
다행히 차원이 빙의할 수 있는 인물 중에 패스티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기야, 울프릭을 따르는 자라면 이차원에 대해서도 좋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겠지. 차원은 곧바로 패스티라는 자에게 빙의를 하였다.
빙의를 하고 눈을 뜨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박지원의 액정에 비치던 풍경과 똑같았다. 다행이네. 드디어 찾아낼 수 있어서. 그런데 어디선가 여자의 끼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설마...’
지금 이 세계에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여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차원이 빙의한 줄 아직 모르는 박지원은 디즌 왕국사람들에게 애교까지 부려가며 이름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중이었던 것이다.
-오빠들 이름만 알려주세요. 응? 어느 나라 속담 중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린 옷깃도 스치고 눈도 맞추고 손도 잡고..
-이거 안 놔?
남자가 박지원이 손을 잡으려 들자 거칠게 이를 떨쳐내었다. 그 순간 차원만이 박지원에게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분노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나 인내력을 참고 있는 건지, 이 일만 끝나면 주먹을 한 방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으르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한편 차원은 처음 보는 박지원의 색다른 모습에 일부러 빙의했다는 사실을 숨기며 좀 더 지켜보려고 하였다. 뭐 이상한 걸 바라는 게 아니고 그저 일을 얼마나 열심히 수행하느냐를 보기 위해서... 아무튼 그런 거다.
“다른 거 없어요? 유혹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해봐요.”
“유혹하는 거 아닌데.”
박지원은 복화술을 하듯 애써 웃는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럼 이름은 왜 알려고 하는 건데?”
“그건......”
“내 이름 알려줄까?”
“네!”
“그럼 다른 거 보여줘 봐.”
이건 또 무슨 전개야. 차원 님이 지시한 일이라 그만둘 수도 없고... 지원은 입가에 미세한 지진이 일어난 듯 진동이 느껴졌다. 차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가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느새 이를 악물고 귀요미송을 부르며 안무까지 추는 모습에 그만, 마침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적 귀요미송이야.”
이 세계 사람들도 알고 있다고? 도대체 얼마나 이어져 있는 거지?
“이 노래 알아......?”
“그래도 웃겼으니까 이름은 알려줄게. 나야 이차원.”
이차원은 슈리로 빙의한 박지원의 귀에 조용히 말해주었다. 이차원... 님이라고? 그의 말에 박지원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순식간에 빨개졌다.
“화났어? 미안. 근데 나 진짜 감동했잖아. 고마워.”
“......”
그녀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까지 보여가며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하다니. 그 충성심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지만 지금 상황에서 박지원에게 그 진심이 전해질 일은 없었다.
-패스티, 이 여자랑 말하지 말라고 한 건 너였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때, 자신의 옆에 있던 동료가 자신의 팔을 거세게 잡으며 슈리와 떨어트렸다. 허나 차원은 자신의 팔뚝을 잡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떨쳐내자 디즌 왕국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놀란 토끼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름 좀 알려주지. 사람을 이렇게 불쌍하게 만드냐.”
-뭐? 너 갑자기 미쳤어?
디즌 왕국 사람들 갑자기 분위기가 차원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차원이 빙의한 패스티 주변을 둘러쌓았다.
-이교도한테 홀리기라도 한 거냐?
패스티가 이교도에 쓰인 것이라고 생각을 했나 보다. 어느새 이 세상에 그들의 존재가 널리 퍼져버렸다. 차원은 자신을 빙 둘러싼 디즌 왕국 사람들 앞에서 빙의를 풀어 요정의 형태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남자들은 모두 당황스러워 하였다. 설마 이곳에 이차원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겠지. 그들은 동시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다른 대륙으로 넘어갔단 소식을 들은 터라 이곳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힌 차원은 곧장 다시 패스티의 몸으로 빙의해 들어갔다. 지금 여기에는 이교도들이 설치고 있다. 그들의 눈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
-요정님, 최근에 로울로를 격파했단 소문이 들리던데 사실입니까?
-전설의 라프텔님한테 강령술까지 배워서 7대장 놈들 육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남자들 눈을 빛내며 차원에게 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차원의 행보 하나하나가 주목을 받았고 빠르게 대륙에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이제 그들에게 차원은 신격화된 존재나 다름없었다.
“디즌왕국은 별탈 없나?”
-네. 이교도들이 한 번 휩쓸고 간 후로 7성군의 경비가 더욱 삼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간 평화에 안주했던 나태함을 반성하는 사람들이 늘어 모험가들도 많이 생기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왕국을 떠나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군. 이제야 이유를 깨달았다.
“울프릭의 무술을 터득하기 위해 프라하성에 간다고 들었는데.”
-네. 이곳은 요정님과 울프릭님이 처음 만나 모험을 시작한 곳이라 모험가들에겐 이제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 됐거든요.
-문제는 그걸 이교도놈들도 알아서 저렇게 하루종일 죽치고 감시를 한다는 겁니다.
“저들이 정확히 검문하려는 것이 뭐지?”
-디즌 왕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타무즈, 카릴 등 요정님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국민이라면 모두 색출해서 심문합니다.
-잡히면 고문을 당하거나 죽는 것이 태반입니다.
살얼음판이 만들어져버렸군. 결국 이들도 저곳을 못 지나가는 중이었고 차원 또한 디즌 왕국 사람으로 빙의한 이상 저들과 결투를 치루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차원님과 함께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쇼.
-절대 누가 되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교도를 타파하려는 듯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싸우기에는 정황 상도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무수히 많은 신도들을 단번에 해치우기란 불가능이었다.
“우리의 병력은 저쪽 병력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에 최대한 전투는 피해야 해.”
-하지만......
남자들은 차원의 말에 모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무작정 전투를 걸었다간 이들이 받을 피해가 더욱 컸기 때문에 그들도 곧 전투에 대한 생각은 버렸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이차원은 이교도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검문소를 바라볼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거대한 화실 날아오더니 검문소에 박히며 터져버렸다.
이차원은 디즌 왕국 주민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뭐가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
여기저기서 마법 공격이 이어졌고 근처에 있던 나무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주변에 있던 일반 주민들은 대피하느라 바빴고, 황급히 몰려나온 이교도인들은 공격을 맞받아치기에 바빴다.
불화살이 하늘을 날아와 이교도의 검문소를 불태웠고, 푸른 빛의 낙뢰와 그를 감싸는 물줄기들이 합쳐져 엄청난 전류를 만들어내었다.
일대는 순식간에 검은 먹구름 같은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누군가 이교도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상황을 살펴보러 간 디즌 왕국 국민이 정찰을 마치고는 돌아와 차원에게 알렸다. 저런 마법과 힘을 가진 자들이라면.
‘7성군이 벌써 내려온 건가?’
하지만 현재 7성군의 주 병력들은 이차원 일행이 있는 대륙에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어떻든, 멀리서 싸우고 있는 이들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은 굉장히 차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만은 확실했다.
‘누가 됐든 상관없다. 검문소를 통과하기만 하면 되니까.’
애초에 차원의 목표는 프라하성에 들어가 루오비를 구해오는 것뿐이다. 괜히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이교도의 증원 병력과 또 싸움이 붙어 시간이 소비하는 것보다는 저들에게 싸움을 맡기고 검문소를 통과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차원님, 어쩌실 거죠?”
이런 전쟁이 터지는 건 처음 본 박지원은 긴박하게 돌아가는 일에 판단력을 잃었다. 차원은 곧장 박지원의 손목을 잡고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우린 이 틈을 타 검문소를 통과한다.”
차원과 박지원, 그리고 디즌 왕국 사람들 여기저기 오가는 마법 공격을 피해가며 검문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달려가는 길도 어느덧 공격이 튀기 시작했다. 세차게 불어오는 칼바람에 나무들과 풀잎이 잘려 나갔고 노란색의 빛이 땅 위를 갈랐다.
다행인 것은 이교도인들은 기사들과 싸우느라 이차원을 알아채지 못하고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덧 마법공격으로 앞이 트이자 말을 탄 기사들이 이교도인들을 학살해 나갔다.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교도 인들은 속절없이 목을 내놓기 일쑤였다.
결국 몇 명 안 남은 이교도들은 둥글게 모여 서로의 힘을 합치더니 거대한 검은 흑마법 에너지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걸 빨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차원님!”
그 순간, 그 위력에 의해 커다란 바위 하나가 이차원을 향해 날아갔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면 자신이 이차원이라는 게 금방 들통나 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능력을 사용하려는데, 박지원이 현실에서 가져온 너클을 착용하고는 그대로 산산조각 내었다. 슈리의 몸이었지만 힘의 영역의 효력이 남아있던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워.”
“이 틈에 어서 가시죠!”
흑마법 에너지는 더욱 커져 갔고, 말을 탄 기사들도 버티지 못한 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더욱 더뎌졌을 때, 이교도 세력에서 그 흑마법에너지를 모아 스스로 자결을 하듯 에너지를 터트리며 주변 일대에 지진을 일으키듯 땅이 불규칙하게 갈라졌다.
“젠장.”
다행히 큰 부상은 면하였지만,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모두가 균형을 잃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엄청난 모래폭풍이 지나간 자리엔 이교도들의 시체와 기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폭발의 여파 때문에 고막이 울려대었다. 그러나 프라하성으로 가기 위해 넘어진 박지원을 일으켜 세워 달리려는데 갑자기 차원의 뒤로 태양이 가려졌다.
-소속을 밝혀라. 그리고 가진 것은 모두 내놓아라.
남자의 목소리에 눈을 돌려 주변을 살피는데 어느덧 나타난 기사들이 차원 일행 모두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였다.
‘그렉?’
차원이 왕으로 세워줬었던 일렉시아 왕국의 그렉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순하던 그렉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지? 한편 이 모습에 박지원은 그를 적으로 판단하여 너클을 쥐며 그를 공격하였다. 순식간에 들어온 공격 탓인지 그렉은 막아서지 못하였고, 그렇게 전투 구조를 띠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