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보기만 해도 으스스하다. 이런 곳에서 함부로 시체를 파도 되는 건가? 박지원은 차원의 말에 따라 슈리와 함께 묘지로 향하였다. 온갖 귀신이 몰려드는 건 아니겠지? 한편 차원 또한 게임 속으로 들어갔다.
“루오비를 구할 방법에 대해선 지시를 내려놨어. 남은 건 바르티스를 쫓는 건데 뭐 좀 찾았어?”
차원의 물음에 동료들이 일제히 그렇다는 대답을 하였다.
-바르티스의 집을 찾은 거 같다.
그럼 어디 바르티스의 집을 확인해 볼까. 그들을 따라간 곳에는 울프릭의 말처럼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은 일반 왕국에 있던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단단해 보이는 광물로 만들어진 외벽에 창문이 나 있었다. 창문을 통해 내부를 보아도 일반 마을 집처럼 테이블과 각종 기구들만 모였다.
“이 집이 바르티스 집이란 증거는?”
-들어가면 알 수 있어.
울프릭과 리지가 집 안으로 차원을 인도하였다. 바닥은 순수 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별로 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없는데. 그때, 울프릭이 벽난로 안의 환풍구로 손을 넣고 줄을 당기자, 바닥처럼 보인 문이 열렸다. 그곳을 보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연구실로 보이는 방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어째선지 바닥에 물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할 수 없이 잠수를 하며 지하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숨을 참으며 서랍과 책상을 열 때마다 붉은 광석들이 빛을 발산하였다. 모두 루오비 원석이었다.
그 중, 빛이 나지 않는 광석을 들어보니, 원석을 변환하다 불탄 흔적이 눈에 보였다.
-비슷한 흔적들이 한두 개가 아니야.
리지가 가리킨 서랍장을 보니, 바르티스가 연구하다 변질된 루오비 원석들이 석탄처럼 거무튀튀하게 쌓여있었다. 많이도 사용했네. 이차원이 그중 하나를 집어올리자, 어디선가 물건이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바르티스가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차원과 일행은 놀란 마음에 숨을 죽이고 천천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였다. 그곳엔 창고 문을 잡고 있는 프랭크가 서 있었고 그 앞엔 심해에서 버티고 호흡할 수 있는 장비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정말 지구라는 곳에 넘어갈 생각이었나 봐요.
바르티스가 지구에 도달했을 때, 지구에 열린 게이트가 심해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준비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물이 차있었던 것이구나. 그런데, 정작 물이 들이닥쳤음에도 그 장비들을 사용해 달아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장비도 없이 대체 어떻게 도망간 거지.’
이 지하실은 상당한 크기인데다 출입구도 여기 하나였기에 쉽게 도망칠 수도 없던 구조다. 방심하고 있던 순간에 일어난 일이면 더욱 힘들겠지. 그때, 코웰이 어떤 이상한 비닐 같은 걸 가져왔다.
-무늬 오징어 외피 껍질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무늬 오징어 외피 껍질은 대왕 문어의 외투막을 일회용처럼 간단하게, 짧게 쓸 수 있는 것으로 내구성은 대왕 문어 외투막에 비해 약했다. 그걸 보여주듯 코웰이 들고 온 껍질은 너덜너덜 찢겨 나간 조각이었다.
-바르티스도 어지간히 당황했나 봐. 이 좋은 아이템을 두고 무늬 오징어 외피 껍질을 쓰고 간 거 보면.
데린 말대로 바르티스는 물이 닥치고 차원의 도착했단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도망갔다. 로울로가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재빨리 내달린 장본인인데, 그가 부하들도 거느리지 않고 1:1로 차원을 이길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
‘심해에서 무늬 오징어 외피 껍질로는 멀리 가진 못했을 거고, 그마저도 공기가 있는 곳으로 갔을 확률이 크군.’
이렇게 목적지를 좁히면 갈 수 있는 왕국은 딱 한 곳이었다.
“루칸다 왕국으로 가자.”
그곳은 게와 인간이 합쳐진 캐릭터들이 사는 곳인데,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숨을 쉴 수 있는 곳이다.
‘최대한 빨리 바르티스를 잡아야 해.’
또 다른 곳에서 게이트를 여는 시도에 매진하고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서 막아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만 이득이었고, 이미 게이트를 보는 것까지 성공을 맛본 바르티스였기에 더욱 기고만장해 있을 것이기에 당장에 성공해낼 수도 있었다.
“반드시 막아서야 해.”
***
마블을 가지고 다크혼으로 들어간 박지원은 차원의 명령대로 시체를 구하러 가면서 최대한 슈리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는 차원이 슈리의 과거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 네 엄마가 마녀라고 생각하지 않아.”
-동정 따윈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던 사람들 다 돌아섰으니까.
“마녀사냥이란 게 원래 그래. 내가 그 사람을 믿어주면 나까지 마녀로 몰릴까 봐 두려운 거야. 그래서 안 본 것도 봤다 하고 못 들은 것도 들었다 하면서 그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가.”
-우리 엄만......그냥 주문받은 영약을 만들어준 게 다야. 정말 그것뿐인데 하필 그 자식이......
결국 참아왔던 설움이 폭발해버렸다. 슈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다. 소나기의 빗줄기가 길을 가로막은 것처럼 그녀는 얼굴을 적셔가며 멈춰 섰다. 박지원도 그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현실이나 이곳이나, 사람들은 진실보다 충격에 더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박지원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약속할게. 곧 이교도가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박지원의 말에 울고 있던 슈리가 고갤 들어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네가 무슨 수로?
“지금은 말 못 하지만 약속할 수 있어. 반드시 이교도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줄게.”
처음 보는 자가, 그것도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자신을 위해 움직이겠다고 힘을 주고 있다. 이상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째선지 이 존재는 믿어도 될 거 같다라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슈리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슈리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슈리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슈리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슈리의 호감도 최대치를 달성에 성공하여 슈리에게 빙의할 수 있게 됩니다.]
슈리의 레벨은 낮았기 때문에 곧 호감도를 채워 빙의가 가능해졌다.
‘빙의는 또 뭐지?’
박지원은 이 상태창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몰랐지만, 우선 이차원이 시킨 일부터 하는 게 먼저다. 박지원은 슈리를 데리고 곧장 향하였다. 슈리 또한 박지원에 대한 높은 호감이 생긴 탓에 그녀를 구세주처럼 보며 감동을 받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들려야 하겠단 곳이 여기야?
그러나 슈리의 감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원이 슈리를 끌고 온 것이 시체가 가득한 공동묘지였기 때문이다.
-난 요정이란 네 말을 믿어줬는데 그 믿음을 이런 식으로 돌려주는 거야! 가뜩이나 마녀 딸로 몰린 내가 시체까지 찾는 게 알려지면 정말 마녀가 되는 건 순식간이라고!
엄마가 마녀로 몰려 죽은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는 슈리가 언성을 높였다. 이러다간 시작도 전에 호감도가 깎여버려 진행도 안 될 참이다.
“미안. 이교도 없애려면 필요해서.”
-미안하면 다야? 고작 이딴 걸로 뭘 어떻게 이교도를...
슈리가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입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박지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름 아닌 빙의를 사용한 것이다. 엇나가는 상황에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상태창에 써있는 대로 따른 것이었다.
그녀의 몸에 들어가자 엄청난 무력감과 축 처지는 느낌이 들어왔다. 그만큼 슈리라는 캐릭터가 연약해져 있다는 뜻이다. 슈리의 몸으로 빙의한 박지원은 공동묘지에 도착해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속이라고 최면을 걸어도 더러운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남의 시체를 파내는 범죄를 저지르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지신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박지원은 눈을 꽉 감고 일을 해나갔다. 지원은 최대한 부패되지 않은 시체를 가져가기 위해 날짜를 확인하며 파내었다. 현실 세계와 시간은 달랐기에 이들 중 가장 최근에 묻힌 시체를 파낸 것이다.
“이거다.”
드디어 조건에 부합하는 묘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짧게 묵념을 하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부덤을 파기 위해 삽을 들어 올렸다. 그때, 근처로 지나가던 검정 로브를 쓴 남자 둘이 박지원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봐,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뿔싸.
남자들은 박지원의 손에 들려있는 삽과 취한 행동을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지원은 이 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커다란 혼동에 빠졌을 때,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들이 차원님께서 말한 이교도구나.’
차원이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며 설명한 이교도들이었다. 잔혹한 짓이란 짓은 다하고, 그 짓을 지구에서도 자행하려는 놈들. 지원은 곧바로 슈리가 지니고 있던 영약을 뒤로 돌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 역시 차원이 위급할 때 사용하라고 알려준 정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요...
힘의 영약은 발동하기 시간이 걸려서 연기를 통해 시간을 벌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슈리의 모습과 퍼지는 기운에서 무력을 측정했는지 이교도들은 경계를 푼 채 접근하였다.
-둘이 나설 필요도 없겠어.
-겁대가리도 없이 혼자서 이런 델 온 거야?
그들은 서로 속삭이며 그녀를 비웃었다.
-죽어서 슬픈 건 알겠는데 이 공동묘지는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나가.
-그래, 가족이 희생된 건 슬프겠지만 다 이 세상을 위한 거라고. 여기 있는 죽은 시체들의 희생을 욕 보이지 말고 썩 꺼져.
자신들이 죽인 사람들이면서 하나같이 뻔뻔하게 나왔다. 그때, 드디어 힘의 영약이 발동되었는지 슈리의 몸에서 힘이 쏟아나는 게 느껴졌다. 지원은 곧바로 조심히 삽을 움켜쥐었다.
-설마 우리랑 싸우겠단 건가? 멍청한 선택...
퍼억.
박지원이 쥔 삽이 남자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다. 남자는 말하고 있는 와중에 받은 공격 때문에 그만 혀가 이빨에 잘려 나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머리에서도 피가 새며 의식을 잃은 채 죽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란 남은 이는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그 사이로 박지원은 빠르게 남자의 목에 올라타더니 그의 목을 꺾어버렸다.
그녀의 무술이 다시 빛을 발하였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안 그래도 찝찝했는데 잘됐네.”
무고한 자의 무덤을 파는 것 보다, 이놈들의 시체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박지원은 이교도의 시체를 마블에 담았다. 현실로 나오자 대한민국 헌터들 모두가 박지원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됐나?”
“차원님께서 시키신 명령이란 게 뭔가?”
박지원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헌터들을 떼어내기 위해 마블에서 시체를 꺼내 보였다.
“이건, 시, 시체 아닌가?”
“설마 자네가...?”
“게임 속 NPC긴 하지만 시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녀의 무서움을 알았는지 헌터들은 일제히 그녀와 떨어졌다. 이들에게선 아직 신선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