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심해, 흑화된 성게의 진액을 얻을 수 있는 ‘흑천어 게이트’. 흑천어 게이트의 보스는 단연 흑천어였고, 출몰하는 몬스터 여러 마리 중에는 흑화된 성게도 있었다. 앞서 언급이 되었던 듯이 이 흑화된 성게의 진액은 각종 포션이나 영약을 만드는 것에 많이 이용되었는데, 전 세계에서 오직 동중국해에만 이 게이트가 생겨난다. 그 때문에 중국 당국은 진액을 독점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에서 함부로 게이트를 토벌하지 못하도록 중화연맹에 관리를 위임한 것이다.
“나보고 늘어난 흑천어 개체수를 줄여주는 대가로 흑화된 성게의 진액을 채취하라고 하더군.”
“게이트 방치로 늘어난 흑천어 수를 줄이는 것이 진액 채취의 효율성을 늘린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그걸 차원님한테 맡겼다는 것이 수상합니다.”
역시나 박지원도 그들이 업무를 알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순순히 차원에게 맡기는 모습에 뒤가 굉장히 구린 듯하였다.
“차원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화연맹 또한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헌터들이 모인 곳인데 설마 흑천어를 못 잡아 굳이 차원님에게 맡길까요?”
박지원의 일리 있고 똑 부러지는 말에 이차원 또한 고갤 끄덕였다. 그들이 무슨 수를 쓰는 건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걸 빌미로 날 게이트까지 끌고 가 처리할 생각인 거겠지. 심해에 들어가기 위해선 수압을 견딜 장치와 호흡기가 필요한데 거기에 장난을 칠 생각 같아.”
“장난이요?”
“게이트까지 내려가는 거리까지만 호흡기를 설정해둔다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 불가능해지니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날 죽일 수 있는 거잖아.”
그들의 계획을 다 파악해버린 듯 이차원이 행동을 다 예측하였다. 박지원 또한 동의를 하는 듯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차원과 싸워 이기는 것보단 심해로 끌고 내려가 죽이는 것이 가장 깔끔하고 아무런 증거 없이 차원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큰 전투를 벌일 손실도 없고. 그냥 심해 깊은 게이트에 고립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았기에 변명거리도 충분했다.
“확실히 차원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그럼 저희 쪽에선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당장 확실한 건 저들도 내가 게이트에 도착하기 전까진 날 죽이지 못한다는 거야. 혹시나 내가 각성자 신호 생성기를 몸에 부착했을 경우를 대비할 테니까.”
각성자 신호 생성기는 각성자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기록하는 장치로, 길드들은 소속 각성자들의 몸에 이것을 부착해 놓고 신호를 조합해 위치를 알아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걸 착용하고 심해에서 이 신호가 멈추면 차원이 바닷속을 내려가다가 죽은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차원은 한국의 국보급 각성자니까 이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니 그들 쪽에서 굳이 리스크가 심한 선택을 하지 않을 터. 즉 중국 당국에서도 게이트 안에서 차원이 죽은 것으로 위장시키려면 게이트까지 끌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날 게이트까지 끌고 내려가려 들 거야. 게이트 안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 때문에 장치의 효과가 사라지니까.”
박지원은 차원의 말을 들으며 빠르게 메모를 하였다.
“몰린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고, 중화연맹 애들이 진정 순수한 의도로 나에게 선제안을 했다 치더라도,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모든 시나리오를 검토해서 장비들을 준비해놔. 나는 심해에서 수장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손발이 척척 움직이도록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었다.
***
차원은 위텐신과 약속된 날짜에 만나 함께 배에 올라탔다. 위텐신의 부하 여러 명과 차원 그리고 랜디만 배에 올라 출항을 했다.
“부장님, 다이빙 포인트 도착했다 합니다.”
그들은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게이트 좌표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날씨 하나는 더럽게 좋았다. 햇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였고 그리 덥지도 않은, 선선한 날씨를 비추고 있었다.
위텐신은 자상함으로 꾸며진 얼굴을 내보이며 이차원에게 상태를 물어보았다.
“컨디션은 괜찮습니까? 심해까지 들어가야 하니 조금만 컨디션이 안 좋으셔도 일정을 미루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난 괜찮으니 다이빙 준비나 하지.”
이차원은 무신경하게 대답하였다. 밝은 해를 구름으로 가리듯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 듯한 모양이었다. 위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부하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은 곧 장비를 가지러 떠났다.
“보안 때문에 보좌진을 한 분만 데려오게 하여 죄송합니다. 국가법이다 보니 저희 쪽에서도 손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랜디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박지원은 지상에 남기로 하였다. 박지원은 강하였지만 여자다 보니 그와 떨어져 있는 사이 도와줄 수 없는 사고라도 날지 몰라서 랜디를 데려온 것이다. 그때 부하들이 장비를 가지고 달려왔다.
“특별히 차원님을 위해 준비한 최신형 장비입니다. 자율 주행 기능까지 있으니 어렵지 않게 게이트까지 내려가실 수 있을 겁니다.”
차원은 위텐신이 건넨 장비를 육안으로 확인해보았다. 1인 잠수함처럼 생긴 겉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표면에 꽤나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안전성 통과까지 마친 장비니 중간에 몬스터와 충돌해도 끄떡없을 겁니다.”
위텐신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떠는데 차원은 별 반응 없이 장비에 올라타 물속으로 잠수하였다. 뒤따라 위텐신과 중화연맹 소속의 길드원들, 그리고 랜디까지 잠수를 하였다.
“아, 아. 차원님, 통신 상태 괜찮으십니까?”
차원의 무전기 너머 위텐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차원과 랜디와 다른 헌터들까지 서로 주파수를 맞추며 통신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고 있었다. 음질도 선명해서 상대가 하는 말이 전화를 통해서 들리듯 깔끔하였다.
“차원님 덕분에 흑화된 성게 진액을 채취할 수 있게 되다니, 중국 당국을 대표하여 차원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위텐신은 게이트로 내려가는 내내 차원에게 립서비스를 해대었다. 누가 네놈들 속을 모를 거 같으냐. 이런 식으로 정신을 빼놓고는 바로 뒤통수를 치려고. 차원은 위텐신의 시커먼 속내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바닷속 깊은 심해에 도달하였다. 수면의 빛이 도달하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에 가까운 바닷속이었다. 그곳의 바닥에서는 오직 일곱여 개의 게이트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저 게이트들이 대중국 포션 사업의 중요한 재료가 되는 흑천어 게이트입니다.”
바닷속에 있는 거라 더 특이하게 생길 줄 알았는데, 지상에 있는 개이트랑 별다르지가 않았다. 이차원이 잠수정을 타고 게이트에 다가가려 할 때였다. 그때, 흑천어 한 마리가 게이트 밖으로 갑자기 튀어나왔다.
쾅!
흑천어는 그대로 차원이 타고 있는 잠수정에 빠르게 몸을 박아대었다.
“차원님, 놀라지 마십쇼. 말씀드렸다시피 안전성 검사 통과한 거니 이 정도 공격은 끄떡도 없습니다.”
“잠수함이 강한 걸까, 흑천어가 약한 걸까. 당신 생각은 어때?”
흑천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약하다는 것을 느끼자 이들의 목적이 자신을 죽이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위텐신의 속내를 은근슬쩍 떠본 것이다. 이렇게 약한 몬스터를 잡지 못하고 차원을 동원한다는 말이 앞뒤가 맞질 않으니까.
“하하하. 중국산 제품은 세계적으로 튼튼하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중국 당국의 엄격한 안전성 검사를 통과한 제품이니 잠수정이 강한 겁니다.”
‘헛소릴 거창하게도 하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위텐신의 모습을 보고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첫 번째 게이트는 저희 중화연맹 쪽에서 맡을 테니 차원님께선 두 번째 게이트를 맡아 주십쇼.”
7개의 게이트를 각자 나눠서 처리하자고 제안한 위텐신의 말에 차원도 동의하였다. 일단, 이들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규칙은?”
“없습니다. 편하게 흑천어를 잡으시면 됩니다.”
차원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마냥 위텐신의 말을 듣고 두 번째 게이트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잠수정에서 하차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잠수정의 시동이 꺼져버렸다.
위이이잉.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랜디의 잠수정마저 꺼져버렸다.
“차원님, 이거 좀 이상한데요? 시동이 안 걸립니다.”
이를 몰랐던 랜디는 잠수정 시동을 걸기 위해 하염없이 시도를 하며 차원을 찾았다. 그 사이 차원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태연하게 게이트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랜디는 또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이차원을 존경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내 랜디 역시 차원을 따라서 게이트 주변을 살피는데 ‘흑화된 성게’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늘어난 흑천어 때문에 채취를 못 하고 있던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양이 많은데. 이걸 둘이 다 채취하려면 서둘러야겠어.’
성게는 벽에 따닥따닥 붙어 있어 마치 가시밭길을 이루듯 형성되어 있었다. 이차원은 곧바로 랜디를 불러 채취작업을 시작하였다. 중화연맹의 헌터들이 자신을 이곳에 고립시켜서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차원은 랜디와 함께 나와 빠르게 성게의 진액을 채취하고자 했다. 또한 쿠마바 왕국에 제공해야 될 양이 적지 않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차원님, 둘이서 다 채취할 수 있을까요? 양이 엄청난데요......”
랜디는 주변에 끝없이 늘어서 있는 그 엄청난 양에 조금 식겁한 채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다. 캐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둘이 하기에는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았다. 그 시각, 차원은 군말 없이 빠르게 진액을 채취해 나갔다. 1분 1초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랜디도 빠르게 진액 채취에 동참하였다.
그런데 그때, 랜디가 ‘흑화된 성게’를 캐기 위해 심해 바위틈 사이로 손을 넣었을 때였다. 그의 손에 물컹한 무언가가 잡혔다. 뭔가 이상한 걸 느낀 랜디는 곧바로 꺼내 들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차원님! 아니, 대장님!”
차원은 랜디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확인을 해보니 충격 그 자체였다. 바위틈에는 낀 시체 더미가 가득하였다.
“여기에 시, 시체가.....”
랜디가 잔뜩 놀라 말하는데 이차원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안 그래도 둘이 하기에 벅차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령술을 걸어 노동을 시킬 육체들을 얻었다는 생각에 기뻤기 때문이다.
“잠시 떨어져 있어.”
차원은 랜디를 떨어뜨려 놓고 강령술을 쓰기 전에 죽은 시체들의 기억을 읽어보았다. 중화연맹에서 관리하는 게이트에서 시체 더미가 발견된 것은 분명 사연이 있을 거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기억을 읽은 차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화연맹 놈들의 쓰레기 같은 짓은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자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