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자신을 둘러싸며 서로 이차원을 끌어들이려 하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코트가 재빨리 인벤토리 창에서 아이템을 쏟아내자 인어들은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코트와 그의 부하들을 노려보았다. 이차원이 자리를 뜨는 순간, 전투가 시작될 거 같은 분위기가 이곳을 강하게 맴돌았다.
사실 쿠마바 왕국의 사람들은 이전 세대 그들도 이교도의 후예였기 때문에 저들과 적대적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보다 그 전에 자신들의 전염병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인어를 살육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를 하기 위한 분노로도 느껴졌다.
그에 반해 인어들이 쿠마바 왕국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이유는 확실했다. 그들의 조상이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쿠마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자신들의 동족들을 실험에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판사는 아니니까.’
차원은 둘의 이해관계의 경중을 따지기보다, 얻을 수 있는 것들만 보고 논의하기로 했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누구의 손을 잡아줄 것인가.
-아까 전 마블을 원한다 하셨죠? 전염병 연구를 미뤄서라도 마블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이 전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절대 못 하겠다 하더니, 곧바로 말이 바뀌었다. 이 때문에 코트가 후한 거래를 제시한 것 같았지만 어쩌면 당연한 거래였다. 인어들을 연구에 사용하지 못하면 전염병 치료제는 영영 연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어찌 보면 차원이 인어를 처리해주고, 연구가 딜레이 되더라도 인어를 얻는 게 그들에게 있어 이득이었다. 코트는 마블 외에도 많은 것을 제시했는데 타파이트와 에인결정은 수두룩했고 마법사들의 교본을 차원의 키 높이만큼 높게 쌓아왔었다.
그래도 확인차, 코트가 내놓은 교본 하나를 집어 확인해보았다. 이미 차원이 수없이 많은 NPC들의 호감도를 얻어 연수받은 스킬과 같은 자잘하고 다양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차원의 눈길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성지의 방패.’
방패는 외관부터 남다른 자태를 뽐냈고, 랜돌프도 그것을 알아보더니 환호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끼에엑! 아직 능력 개화가 안 된 방패잖아! 나 위대한 드워프족 랜돌프가 조금만 재료를 섞어서 능력만 개화시키면 말도 안 되는…! 심판의 검과 똑같아. 아니지, 이 정도면 심판의 검보다 훨씬 강력한 효과를 낼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랜돌프가 저리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그 가치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차원은 일부러 인어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관심을 보이는 척을 하였다. 방패를 들어보며 이곳저곳 둘러보았고, 만져보며 착용해보기도 하였다. 꽤나 본인에게 딱 알맞은 착용감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인어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새로운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자기들 것도 좀 봐달라는데요?
차원은 렌더의 말에 못이기는 척 방패를 내려놓고 아이템을 확인해보았다.
‘포세이돈의 창.’
랜돌프는 한 번 더 까무러쳤다. 이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냐.
-이, 이건…! 이것도 아직 개화가 안 됐는데 차원님이 사용하는 스킬 포세이돈과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킬 것 같단 말이지. 조금 과장하자면 한 왕국을 무너트릴 정도의…
거품을 물며 설명하는 랜돌프는 이 두 가지 물건을 보고 정신을 못 차려 하였다. 그 모습에 쿠마바 왕국과 인어들이 서로 기세등등하게 이차원을 바라보았다. 이거 정말이지, 창과 방패의 싸움도 아니고.
“하지만 둘 다 가질 순 없는걸.”
-무슨 소리! 둘 다 가져야지, 암.
랜돌프의 대답이 이차원을 미소 짓게 하였다.
“역시, 둘 다 가져야겠지?”
-그렇고말고. 이봐, 나 위대한 드워프족 랜돌프가 명령하는데 가지고 있는 무기를 차원님께 당장 갖다 바쳐라.
둘 다 가져야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랜돌프에게 쿠마바 왕국과 인어들이 그를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인어들은 말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잘도 눈치를 채었나 보다.
-아, 아니 차원님 둘 다 고르시는 건 좀...
코트가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아니라는 듯 이차원을 말렸다. 하지만 이차원의 뜻은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굳건하게 세워졌다.
-둘 다 갖겠다.
차원이 선언하자 두 왕국의 대표는 멍하니 차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두 물건을 가지고 오려는 건지. 물론 차원에겐 방법이 있었다.
***
차원은 그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현실 세계로 나왔다. 그는 곧바로 다크혼에서 샘플로 가져온 인어의 진액을 박지원에게 내밀었다.
“성분 검사 좀 해봐. 비슷한 성분이 있는지 찾아보고.”
분명 이와 비슷한 것이 지구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설마 이렇게 많은 생물과 성분들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으랴. 거기에 게이트까지 있으니 필요하면 당장 쳐들어가 가져올 생각도 하였다. 그렇게 박지원이 성분검사를 맡긴 결과 인어의 진액이란 것이 현실에선 ‘흑화된 멍게의 진액’과 가장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흑화된 멍게의 진액은 저번에 차원님께서 부탁하신 회복 포션과도 관련이 있네요.”
“아, 그놈들.”
차원, 박지원 말에 중화연맹 놈들이 생각났다. 한국과 관계가 틀어지자 그들이 수출제한을 했다는 품목엔 흑화된 멍게의 진액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어디서 구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쓰실 거면 이것보단 흑화된 멍게의 진액을 쓰는 걸 추천 드립니다. 그편이 훨씬 효과가 좋을 거예요.”
박지원은 이차원이 이것을 회복 포션의 대용으로 사용하려 가져온 줄 알고 충고를 해주었다.
아쉽게도 그럴 용도는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정보는 고마웠다.
“흑화된 멍게를 구할 방법 없을까.”
“회복 포션 때문에요?”
“아니, 전염병 백신이나 항체가 필요해서.”
그의 말에 박지원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는 듯 대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차원님 이제 농경지 사업도 모자라 전염병 사업까지 하세요? 너무 인류애를 위하시는 거 아닙니까?”
“너 혹시 몬스터 듀드 전염병 항체는 못 만드냐?”
이차원은 그러든 말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여 질문을 날렸다.
“갑자기 듀드 전염병이요?”
“고열에 기침, 구토 그런 증상들 있잖아.”
“증상이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료제가 나온 지 오래됐고 전염병 자체가 지구에서 없어진 지 오래라 당장 치료제 생산도 안 되고 있는 실정이라 실험적으로 생산한다 해도 중국 당국 때문에 원료 구하기도 쉽지 않아요.”
이차원은 중국 당국이란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볼펜을 딸깍, 딸깍거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래저래 걸리는 문제가 많았다. 그만큼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이 많다는 소리긴 한데,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중화연맹 본부 어디냐?”
“설마 찾아가시게요?”
“안될 거 있어?”
***
중화연맹 길드의 사람들은 차원이 온다는 소식에 매우 경직되고 긴장된 상태였다. 차원이 이미 자신들의 전투력과 맘먹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과 사이가 많이 틀어진 상태였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최대한 맞춰주는 척해. 조금이라도 의심해선 안 되니까.”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놈 지금 전투력만 보면 저희 연맹원들 다 덤빈다 해도 이길 거란 보장이...”
“닥쳐라.”
중화연맹 제 1부부장 위텐신. 그가 드센 기운으로 성을 내며 말하자 자신의 주장을 내던 헌터의 입이 곧장 다물어졌다.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 계획은 변함없어.”
위텐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것은 손님이 도착했다는 소리와 함께 차원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차원님, 오셨습니까. 최대한 편하게 모시라고 했는데 오시는 길이 험하진 않으셨지요.”
위텐신이 악수를 건네며 차원에게 인사하자 뒤에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고갤 숙여 인사하였다.
‘뭐야, 이 새끼들.’
그리고 차원, 그들의 저자세가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이 자기들의 수족들을 처리했다는 것을 알 텐데, 이렇게 대우를 해주다니. 게다가 한국과 적대적인 상태니 더욱 싫어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나 일어날 유혈사태를 대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뭐, 일단은 그런 불길한 일이 생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해야지.
“찾으시는 게 있으시다고? 뭐든 말씀만 하시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위텐신은 차원에게 손수 우려낸 차를 따라주며 말하였다. 차의 향긋한 향기가 코를 통해 피어났다. 동시에, 차원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긴장의 끈을 놓은 순간 무슨 일을 벌이려는 밑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뭔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채었지만 차원에겐 중화연맹 정도는 이미 겁먹을 상대가 아니었다.
“흑화된 성게의 진액을 얻고 싶어.”
차원의 말에 차를 따르던 위텐신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곧장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랐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매우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차원에게 무언가를 숨기려 하는 거 같았는데.
그러더니 위텐신은 갑자기 말을 돌려대었다.
“드시죠. 이쪽 지방에서만 나는 귀한 차입니다.”
하지만 차원이 차를 마시지 않고 경계하자 위텐신은 보란 듯이 자신이 먼저 차를 들어 마셨다. 이쪽의 꿍꿍이가 대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차원은 그들이 무슨 생각인 건지 가만히 노려만 보았다. 이차원의 잔에 따라진 차는 저들의 속마음처럼 색이 바래었다. 위텐신은 차를 음미하며 삼키더니 말하였다.
“좋습니다. 대신 저희 또한 차원님의 전투력을 빌리고 싶습니다.”
그게 다인건가? 물론 그럴 리가 없지.
“흑화된 성게의 진액은 동중국해 심해 깊은 곳에 열리는 게이트서 채취가 가능한데 그곳 게이트에는 흑천어라는 인어형 몬스터가 서식하여 성게 채취를 방해하곤 합니다. 원래는 이따금씩 나타나 헌터들을 위협하는 몬스터였지만 최근 게이트를 방치한 채 성게 진액만 채취 하다 보니 그 개채수가 늘어나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위텐신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이차원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하였다.
“그래서 나보고 그놈을 처리하라?”
“그렇습니다. 워낙 강한 몬스터이다 보니 저희들 힘만으론 무리가 있다 판단돼서요. 차원님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놈을 처리하고 성게 진액을 채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차원은 위텐신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그가 건넨 차를 그제야 마셨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위텐신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 긴장한 듯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날짜를 정하지.”
그렇게 바람에 돌아가는 바람개비처럼 빠르고 순조롭게 거래가 성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