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하칸의 외모가 밝은 빛을 받아 더욱 빛나 보였다.
비록 인간의 형태를 했지만 그가 드래곤이란 것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칸은 이교도에 몸을 담근 로울로와는 전혀 다른 기운을 가진 탓인지 매우 신성했다. 그래서인지 7성군 군사들이 모두 하칸을 찬양하듯 무릎을 꿇으며 그를 찬양하는 느낌이었다. 드래곤 중에서도 상위 개체, 마력의 힘을 관망하는 존재인 하칸은 그들에게 신과 같이 느껴지겠지.
-이차원님,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 존재인 그가 차원에겐게 매우 공손한 저자세로 이차원에게 다가갔다. 그걸 직관하고 있는 기사들 몇 명은 대놓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래곤이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다니.
-저런 분을 이교도로 몰았으니, 면목이 없네.
동시에 차원은 기사들과 다른 의미로 매우 당황하였다.
‘뭐야 이 자식.’
하기야, 자신의 품에서 얼굴을 부비적거리던 귀여운 아기였던 드래곤이 이제 다 커서는 인간으로 변신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놀라고도 남겠지.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커버린 거지? 하칸이 이리도 빠르게 발전할 줄 몰랐는데. 거기다 하칸이 변신한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었다.
하칸이 인간으로 변신해 있는 모습은 톱모델 뺨치는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진 동양인 외모였다. 190은 돼 보이는 훤칠한 키와, 드래곤일 때 빛나던 푸른 빛은 여전히 비추고 있었다.
‘로울로 그 녀석도 생긴 건 반반했는데. 드래곤은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게임 속이라 비쥬얼은 살리기 위해 다 잘생기게 한 건가. 작화에 뼈를 갈아 넣어 작업했나 보네. 이차원이 잠시 딴생각에 빠져버린 사이, 하칸은 곧바로 그의 앞으로 오더니 팔을 붙잡으며 간청하였다.
-이차원님. 제발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두 세계는 분명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연결이라니?”
그의 입에서 나온 두 세계라면 다크혼과 현실 세계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는 건... 역시 이 두 세계를 이어주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차원은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하칸의 말이 곧장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재차 물었다.
-전 에너지와 마나를 관망하는 존재기 때문에 에너지의 흐름을 느낄 수 있고 그 흐름을 따라 유유히 세상 밖과 안을 돌아 다녀왔습니다. 에너지의 흐름이 제 힘을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최근에 그 흐름이 계속해서 밖과 안을 연결해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뭐?”
하칸이 말하는 에너지 흐름이란 건 다크혼과 현실 사이 마나의 흐름을 뜻하는데 그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단 얘기였다. 잠깐만, 그럼 언제부터 이 게임에 현실 세계가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야? 설마, 이 게임이 나온 처음부터?
차원은 맨 처음, 이 게임의 각성자가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 당시에는 안에서 나타난 몬스터가 밖에서도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애초에 게임이 현실을 차용해서 만들었겠거니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하칸의 말을 들어보니 다른 시각으로 보였다. 그 에너지가 역으로 현실에서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 현실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럼 사실상 게임이 먼저였고 그게 현실에 반영된 걸 수도 있단 거야? 게임을 만든 놈은 누군데?’
도대체 이 세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거야. 지금까지 속고 있었다는 생각이 물 밀려오듯 그가 믿고 있는 진실들이 모두 거짓으로 보였다. 차원은 머릿속이 꼬이더니 그동안 일상 같았던 일들이 모두 이상하게 느껴져 왔다. 이를 뒷받침하는 하칸이 말을 이어왔다.
-이 세상이 망가지면 그 세상도 반드시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연하면서 어딘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하였다. 이윽고 그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하칸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원이 했던 고민에는 더는 의미가 사라졌다. 게임 속과 똑같았던 몬스터와 보스, 다크 혼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현실에서도 똑같은 사고가 일어난 순간.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이차원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잘 알고 있던 그는 왕국의 비기를 빠르게 얻는다 해도 결국 대악마를 소환하는 데 성공해서 이 게임이 망하면 현실 또한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차원에게는 사실상 선택지를 고를 상황이 불가한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풍파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에.
-드래곤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만약 이 세상의 종말을 피할 수 있게 된다면, 그 결말은 모두 차원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라고 말해주겠습니다.
들었어? 드래곤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하칸이 드래곤의 명예까지 건다는 말에 7성군의 기사들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곤거렸다. 드래곤이 다른 존재에게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간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 공을 모두 차원에게 돌리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으니, 밤에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원 또한 하칸의 부탁을 거절할 입장도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게임이 끝나면 지구가 없어진다는 말이지… 선택지가 없는 거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나.’
그의 마음은 미숫가루를 한 움큼 머금은 것처럼 갑갑해졌다.
***
바르티스. 7대장 중 한 명으로 로울로와 함께 리지를 관리하던 존재로, 로울로가 리지를 잡아가기 위해 왔을 때 함께 온 세력이지만, 유일하게 목숨이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비겁한 놈. 목숨이 두려워 도망가다니.
코웰은 그를 7대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힘껏 비난의 목소리로 그를 욕하였다. 기사단장인 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바르티스는 전투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동료를 버리고 그대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똑똑한 거지. 다음을 노리겠다는 거니까.”
-전력노출은 어쩐담.
데린 또한 차원의 말뜻을 알아듣고 걱정하였다. 그가 비록 목숨 앞에 명예 따위 없다는 듯 도망가긴 했지만 그 덕분에 하칸의 존재와 동료들의 전력 등 차원이 가진 모든 전력이 이교도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라프텔의 기가 막힌 함정으로 로울로를 잡는데 도움을 받았었지만, 이제 똑같은 수법은 안 통하겠지. 그러면 또 새로운 작전을 짜야 되는데...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의 실력은 로울로와 비슷하거나 더 뛰어날 텐데.
“역시 다음번엔 더 강한 놈들을 보내겠지? 로울로보다 똑똑한 놈으로.”
-로울로도 상대하기 벅찼는데 여기서 더 강한 놈이 온다니......
코웰은 전사자들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들의 시신을 밟고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들이 모두 자신들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아 이겼다는 시원함보다 죄책감과 꺼림직함이 그들을 휘어잡았다.
차원은 그들의 무거운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잠시 뒤로 하고 7성군에게 물어보았다.
“이교도 본거지가 어디지? 거길 먼저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그놈들도 그걸 알아서 그런지 본거지를 따로 두지 않고 활동합니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들은 그저 힘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데린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토를 달았다.
-본거지도 없이 활동하는 게 말이 돼?
-굳이 따지면 주요 세력이 모인 곳이 본거지긴 하겠네요.
-그래도 도망간 그놈도 피해가 꽤 커서 당장 힘을 쌓는 덴 시간이 걸릴 듯싶습니다.
어느새 코웰도 대화에 참여하였다. 또한 냉정을 유지한 채 그들의 현 상황을 제대로 마주한 채 의견을 제시해주었다.
-맞습니다. 아마 지금쯤 자기 고향인 쿠마바 왕국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쿠마바?”
차원은 코웰의 의견에 동의하며 말한 7성군의 대답에 곧장 반응하였다. 차원은 그 전, 쿠마바 왕국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라프텔이 그곳에 가면 육체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게 하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기에 다음 목적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쿠마바에 갈 일이 있는데 바르티스가 거기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지?”
-고향이 쿠마바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글쎄요, 높은 확률이라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쿠마바가 그의 고향이란 건 저희 7성군 세력도 알고 있는 만큼 일부러 다른 곳으로 향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기야, 일부러 그들이 올 거라는 걸 노리고 있거나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진작 다른 곳으로 떠났겠지. 7성군의 말에 다들 고민에 빠져버렸다. 그들에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 역시 이교도처럼 전력에 큰 손실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쿠마바에 가는 거 말고 방법이 있나? 당장 바르티스가 우리 전력을 파악한 이상 낮은 확률이라도 가보는 수밖에.”
허나 이차원은 도박을 걸어보기로 하듯 호기롭게 말하였다. 그렇게 이차원을 따라 쿠마바로 목적지가 정해졌는데 문제는 강령술을 걸 수많은 육체를 옮기는 방법이었다. 로울로의 육체와 코스쿤의 육체, 그리고 꽤 쓸만한 육체들을 어디에 담을 방법이 없었고, 이것들이 죽은 시체라 한들 강령술을 사용하는 이에겐 그냥 시체가 아니었기에 반드시 챙겨가야만 했다.
‘대형 트럭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이럴 때 이 모든 시체들을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텔레포트 능력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쿠마바 왕국에서 ‘그 아이템’을 얻기까지 이 육체들을 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차원은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차원은 로울로와 코스쿤의 시체를 보는데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두 녀석을 옮기는 데만 하여도 12톤 트럭 두 대는 필요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고, 12톤 트럭은 지금의 판타지 세계와 맞지 않는 차였다.
이전의 관광버스야 코스가 정해져 있어 그 길을 닦았지만, 여기서 쿠마바 왕국까지는 험난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을 깎아내리지 않는 한 바퀴가 달린 차로는 절대 넘어갈 수 없었다.
-하나는 제가 들고 나를 수 있습니다.
그때, 차원의 고민을 아는지 하칸이 먼저 나서며 말했다. 물론, 하칸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이 무슨 허드렛일이야.”
-하지만 그것 말곤 방법이 없지 않나요? 전 괜찮으니 맡겨주십쇼.
하칸은 오직 차원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며 말한 건데, 정작 차원은 대답이 없었다.
-차원님?
차원에게 재차 물을 때, 차원의 시선이 강렬하게 어디론가 꽂히고 있었다. 차원의 시선을 쫓아가 보니 그곳엔 드워프가 있었다. 차원의 창을 만들어준 랜돌프이다.
“방법, 찾은 거 같아.”
이차원이 그를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