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전투가 끝난 장소에는 천막들이 줄지어 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부상자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체들은 전부는 거둘 수 없었지만 남은 잔해물로라도 곱게 묻어주었다. 그 사이에 정신을 차린 리지는 깨어나자마자 하칸을 돌보러 향하였다. 울프릭은 그녀가 허튼짓을 할까 봐 상황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리지의 뒤를 따라갔다.
하칸은 드래곤의 몸으로 바뀌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어디가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전투로 인한 피로도로 인해 몸이 뻗어버린 것이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서 아직까지도 반죽음 상태야. 놀라워.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때까지 에너지를 준 거잖아. 드래곤에게 이 정도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니......
리지는 곧바로 하칸의 기력을 회복해주기 위해 자신도 방금 일어난 주제에 [치유] 스킬을 사용하였다. 역시나 그녀에게도 버거운 일인지 몸에서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하칸을 계속 치유해주었다.
-너, 괜찮은 거냐?
울프릭은 리지가 땀까지 흘려가며 신성력을 사용하자 조금은 걱정이 되는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리지는 괜찮다는 듯 울프릭에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이 드래곤처럼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 살릴 거야. 평생 생명을 살리는 데 내 힘을 쏟을 생각이야.
-그런다 해도 네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진 못해.
아직도 리지를 용서하진 못하였는지 울프릭은 꽤 아픈 말을 그녀에게 던졌다. 몸 상태도 안 좋은 데다 하칸을 치유하고 있는 사람, 그것도 자신의 여동생인데도 심한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울프릭은 그녀로 인해 많은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리지도 울프릭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반박심을 내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온화한 말투를 띠며 울프릭에게 대답하였다.
-알아. 용서받을 생각 안 해. 요정님이 그랬어.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평생 속죄하고 살라고.
내가 가진 힘으로 세상을 살릴 수 있대.
-......그래.
울프릭은 차원 덕분에 이제 리지가 확실히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좋기도 하고, 이차원이 해낼 줄 알았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였다. 허나 그렇다 해도 그녀가 지은 죄가 얼룩 지우듯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제 게임 시나리오는 차원이 리지의 마음을 돌림으로써 리지라는 여자가 대악마를 깨워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멸망한다는 흐름 또한 이제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낄 자리는 아니군.’
그리고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차원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멀리서 보이는 리지와 울프릭의 표정은 무슨 10년 넘게 얼굴 못 본 남매처럼 너무나 애잔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이 타이밍에 리지에게 묻지 않더라도 이교도와 관련된 것은 저 앞에 나열되어 있는 시체들의 기억을 읽으면 충분하겠지. 그리고 먼 길을 돌아왔지만, 드디어 원래의 모습으로 만난 남매이니 서로의 마음을 풀 시간도 가져야지.
“너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마음 같아선 당장 강령술로 널 부려보고 싶지만 일에도 경중이 있으니까.”
차원은 드래곤 상태로 죽은 로울로한테 가장 먼저 [사자의 기억] 스킬을 사용하였다. 로울로는 이교도의 세력 중, 7대장 중 한 명이다. 분명 이교도에 대해 엄청난 정보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 충분하였다. 스킬을 사용하자, 이내 차원의 눈이 노란빛이 들어오며 죽은 라울로의 시체를 통해 그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지러운 기억들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과연 그가 원하는 정보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렇게 차원이 한참 동안 로울로의 기억을 살피어 보다가, 마침내 이교도의 큰 틀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7대장들은 각각 한 명씩, 신성력이 엄청난 인물들을 데려오기로 하고 흩어지자는 게 보였다. 그 인물들을 이용해 대악마를 깨우자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것이었다.
-이 여자가 악마를 깨울 수 있다는 그 여자인가?
-바르티스, 당신이 직접 확인해봐.
‘바르티스? 바르티스도 리지를 맡게 된 건가.’
아직까지는 아리송하다. 이들은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차원은 계속해서 기억을 읽어 내려갔다.
-확실히 엄청난 신성력을 지닌 건 확실하군.
-장담컨대 지금까지 데려온 녀석들 중엔 신성력이 가장 높고 잠재력도 엄청나네.
-흑화만 제대로 시킬 수 있다면 대악마를 깨우는 건 문제도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은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는 거고.
-글쎄. 바르티스, 당신만 제대로 밀어준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
-좋네. 로울로, 나도 이 여자에 한 표를 던지겠네.
차원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로울로는 대악마를 깨울 인물로 엄청난 신성력을 가진 리지를 택한 것인데, 리지는 7 대장들이 데려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의 재능을 본 7대장 중 다른 한 명인 바르티스까지 강력하다고 판단이 든 리지를 맡게 된 것 같았다.
‘이들 역시 리지의 능력에 대해서 전부 간파한 모양이군.’
차원은 멈추지 않고 계속 기억을 읽어보았다.
-쿤시 녀석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리지가 아니라 자기가 데려온 알렌도르로 대악마를 깨우고 싶겠지.
-그 소년도 나쁘진 않지. 그러나 신성력으로만 치면 리지를 따라갈 순 없어.
-쿤시로 대악마를 깨우려면 앞으로 최소 1, 2년은 흑화를 더 거쳐야 하는데 너무 느려.
역시나, 리지 말고도 다른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군. 7대장 중 한 명인 쿤시는 리지 말고 알렌 도르라는 남자를 흑화시켜 대악마를 깨울 준비를 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는 대마왕을 깨우기 위한 리지의 라이벌, 즉 로울로와 바르티스의 라이벌이었다.
차원이 알고 있는 시나리오에 의하면 리지가 대악마를 깨웠으니, 알렌 도르는 원래 리지에게 밀려 대악마를 깨우지 못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원이 리지가 대악마를 깨우는 것을 막았으니 그들은 알렌도르를 차선택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그러면, 결국 리지의 마음을 돌렸어도 대악마는 깨어나는 건가.’
상황을 벌어지는 일을 막았어도, 끝낼 수는 없었다는 건가. 만약 그들이 알렌도르를 이용하여 대악마가 깨어난다면 이 세계관 모두가 노예가 될 것이고, 차원의 능력을 모두 빼앗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대체 어느 왕국의 누구일까.’
그나저나, 시나리오가 이렇게 흘러가게 될 줄은 몰랐던 이차원은 모두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쿤시, 알렌 도르. 대체 어떤 왕국의 누구일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도 리지처럼 이교도의 영향을 받았겠지. 그때, 갑자기 7성군 소속의 기사들이 우루루 이차원을 행해 몰려들었다.
***
-충! 이차원님을 뵙습니다.
완벽한 제식을 갖추는 7성군의 기사들이 차원에게 뱃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일반 뱃지와는 별 차이가 없어보이는데. 이차원은 그들에게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근엄한 목소리로 하나같이 외쳤다.
-7성군좌의 징표를 내리겠습니다.
7성군좌의 징표? 그게 뭔데? 이차원이 그들을 어리둥절해 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원 옆에 있던 코웰과 나머지 기사들까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이차원에게 충성심을 보이고 있었다.
“왜 이래.”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 건가? 이차원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 황당했던 건지 크게 마음에 와닿지가 않은 듯 보였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7성군은, 이 세계관에서 이 대륙 전체의 끝판왕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세계관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NPC 들이 움직이는 매커니즘이었다. 이차원에게 건네진 7성군좌의 징표는 그 최고권력이 인정한 사람이라는 징표이자, 어떤 왕국이든 그 왕국의 기사단장과 그 휘하의 기사단을 소집시키고 지휘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7성군 소속의 최정예 기사들까지. 한 마디로 최고의 권력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7성군좌의 징표를 차원에게 건네줌과 동시에, 다 같이 무릎을 꿇어 충성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충! 받들겠습니다.
“됐고, 방금 로울로의 기억을 읽었다.”
역시, 이런 권력에 쉽게 마음이 혹할 이차원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차원이 보았던 로울로의 기억에 있던 일을 이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단호한 말에 코웰을 비롯한 7성군 기사들은 모두 차원의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7대장은 각자 악마를 깨울 힘을 가진 자들을 모으고 다녔는데 로울로와 바르티스에겐 리지가 있었고 쿤시라는 놈에겐 알렌도르란 녀석이 있던 모양이야.”
-쿤시와 알렌도르라면.....!
이 녀석들, 이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거야? 7성군들이 뭔가를 아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두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이차원의 질문에 7성군 중 한 사람이 나지막하게 대답을 하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와킨스 산맥에 잠들어 있는 아카드라라는 악마를 깨우는 것이 저들의 목표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차원도 알고 있는 목적지였다.
“와킨스 산맥이라면 카릴리아 대륙 끝 북쪽에 위치한 산맥 아닌가?”
-맞습니다. 7성군 기사들이 가장 많이 분포한 대륙이 카릴리아 대륙인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다.
7성군의 대답에 차원은 여태까지의 행보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다. 울프릭과 동료들을 만나 리지를 막기까지 행보는 차원 본인이 헌터로서 강해지는 것이나 경제적인 부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에 따라 실질적으로 달성한 것들이 있었고. 그러나 이교도의 기억을 봤을 때, 7 대장 중 한 명인 쿤시와 알레도르의 흑화된 단계를 파악하자면 앞으로 대악마가 깨어나기까지 적어도 현실 세계의 시간으로 1년 내지는 2년이 걸릴 것 같았다. 1년, 2년 안에 차원은 자신이 아는 시나리오의 비기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비기만 획득할 수 있다면 굳이 그들을 막지 않아도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그를 고민에 빠지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차원은 어느 쪽이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되는 일인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리지는 이미 막았고 2년 안에 비기를 얻을 수 있다면 굳이 알렌도르가 깨울 대악마를 막는 것까지 할 필요가…’
이차원의 결정이 내려지려고 할 때였다. 리지에 의해 정신을 차린 하칸이 일어나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이차원님.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