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7성군은 지휘권을 넘겨달란 말을 반쯤 농담으로 생각했겠지만 차원은 정말로 그들에게 지휘권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들에게 구해낼 방법은 하나였다. 이차원이 데리고 있는 하칸이었다.
지금 하칸은 현실세계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차원도 다크혼 세계를 빠져나가 오랜만에 현실세계에 발을 들이밀었다. 하도 오랜만에 간 탓인지, 자신의 사무실 바닥이 이상하리만큼 딱딱하였다. 하도 모랫길과 타파이트로 포장한 도로만 걸어서 그런지 한동안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오래 가 있었나.”
거기에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다크혼을 나가자마자 박지원에게 수많은 문자와 사진, 부재중 전화가 그의 핸드폰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휴, 이렇게 어지럽도록 연락이 왔는데 눈치도 채지 못했다니, 그동안 진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구나. 핸드폰이 살아있는 게 용할 정도였으니.
‘그러고 보니 선발한 헌터도 아직 못 만나봤네.’
그에게 있어 다크혼만큼 중요한 일이 있었었지. 헌터 자격 박탈을 면하기 위해서 죽음의 나무를 심었던 땅을 농경지대로 잘 만들어뒀어야 했는데, 아직 그마저도 확인도 하지 못하였다. 이러다 진짜 국가 소속 헌터 기관에서 경질된 것이 아닌지 생각도 들었다.
차원은 우선 각종 연락들로 정신을 못 차리는 휴대폰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그나저나, 이걸 어디서부터 만져야 하는 건지, 우선 문자부터 확인하기 위해 알림판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뭐야, 또 습격이야?
“차원님!”
다행이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다름 아닌 박지원이었다. 그녀는 차원이 사무실로 나왔단 소식을 CCTV 관계자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사무실로 달려온 것이다. 그녀도 오랜만에 보니 왠지 반가웠... 다는 느낌을 받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목청을 크게 울리는 소리가 이차원에게 향하였다. 이렇게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이 이 전에도 있었던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시는 겁니까?”
“어?”
차원도 박지원이 평소 조금 터프하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 처음이라 생각했는지 꽤 당황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그런 이차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 하며 그동안 쌓인 게 많다는 듯 따박따박 쏘아붙였다.
“중화연맹 그 자식들이 자기들 동료 찾아내라고 농경지까지 찾아와서는 행패란 행패는 다 부리고! 금방 오겠다면서 한참이 지나도 안 오시고! 하칸 아니었음 정말 죽을 뻔했다구요!”
얼마나 무섭고 놀랐던 탓인지, 그녀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방울이 맺혀 동글동글 뭉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이차원은 그제서야 그녀의 허벅지 쪽에 붕대가 감아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도 매우 급박한 일이 생겼었구나.
“그럼, 걔들 지금은 어딨는데? 하칸이 죽였어?”
박지원은 이내 시선을 땅으로 보내었다. 아직도 그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아니요, 죽인 건 아니고. 땅에 묻어버렸죠. 지금은 세계 헌터 연합이랑 한국 헌터 연합에서 진상 조사받는 중이고.”
자신이 없는 사이 이런 일들이 벌어졌구나,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박지원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강인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인데도 한 명의 길잃은 소녀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녀의 입장을 너무 무시하였나.
“자주 못 찾아본 건 미안하다. 나도 최대한 오려 했는데 자꾸 일이 터지네. 다음부턴 더 신경 쓸게.”
“...알았어요.”
박지원은 드디어 감정을 추스른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이제 그가 알던 박지원의 모습이 보였다,
“참, 농경지 프로젝트 인정받았고 차원님 헌터 미션 수행 기간도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이거.”
박지원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더니 차원에게 하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엔 푸른 빛을 번쩍이며 비행 중인 하칸이 보였다. 하지만 사진 속 하칸은 더 이상 이차원이 알던 하칸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자그마한 아기 호랑이가 순식간에 거대한 산을 수호하는 대호로 용맹함을 잃지 않은 채 성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칸의 외형에서는 더 이상 어린 시절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장 속도가 빠르군.’
“얼마나 영특한지 몰라요. 제가 위험한 걸 알았는지 날아와선 중화연맹 애들만 알아서 공격하더라니까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애기였는데...”
조금 아쉬우면서 기특한 생각이 들어오는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추억이 서려 있듯 떨리고 있었다.
“지금 모습도 좋지만 귀여운 모습도 좋았는데. 조금 아쉽기도 하네요. 원래 드래곤은 이렇게 성장 속도가 빠른가요?”
다른 생명체에 비해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내가 빨리 키운 것도 있지.”
“그게 가능해요?”
“하칸을 왜 풀어놓고 키웠다 생각해?”
박지원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하였다.
“속박 불가능한 개구쟁이라?”
다른 의미로 맞는 말이긴 하지. 하칸이 태어나자마자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이차원은 그때의 일을 생각이라도 한 듯 작은 한숨을 뱉으며 대답해주었다.
“드래곤이 귀하다고 묶어놓고 키울수록 성장 속도는 느려지거든.”
“아, 그래서 풀어놓고 키우신 거구나.”
그뿐만 아니다. 드래곤이 관할하는 힘에 따라 성장 속도를 키우는 방법은 다르지만, 하칸의 경우는 더 많은 세상을 돌아다닐수록 성장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니 다크혼 세계뿐만 아니라, 지구라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하칸은 더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마치 플레이어들이 경험치를 쌓는 것처럼.
그런데, 이렇게 하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정작 하칸은 어디 있는 거지?
“저 그런데 차원님.”
“응?”
“하칸이 그날 이후로 돌아오지 않아서 조금 걱정이네요.”
“아아. 걱정 안 해도 돼.”
박지원은 엄마처럼 집 나간 아들을 걱정하는 표정이었고, 이차원은 아빠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러니 진짜 가족 같아 보이네.
“걱정을 어떻게 안 해요. 이러다 영영 안 돌아오면 어쩌려고.”
“돌아올 거야.”
차원은 언제나 하칸을 다뤄오듯 태평하게 말하였다.
“돌아온다 해도 저희가 먼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나타나서 사고를 칠 수도 있는 거고...”
“나 믿어. 절대 안 그래.”
하칸이 사람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 피해를 줄 일은 절대 없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돌아와 준다면 좋겠지만 말이야.’
물론 지금 당장 하칸이 오면 아주 강력하게 차원의 계획이 실행될 건 확실했다. 하지만 조바심을 가질수록 마음만 급해지기에 내려놓았다.
생각을 끝낸 차원은 농경지에서 농작물을 재배할 때, 원래 사용하려 했던 발전기를 가지러 갔다. 다크혼 속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나름 잘 굴리고 있었네.’
밖으로 나간 차원은 발전기를 챙기다가 잘 정리된 농경지를 보고 생각하였다. 그가 없었음에도 유지가 매우 잘 되고 있었다. 물론 중화연맹 놈들의 짓 때문에 죽음의 나무는 손상이 되었지만 하칸의 성장, 농작물 재배까지 자신이 밖에 있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잘 해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일 처리도 화끈하게 잘해 주는 여비서다웠다.
“그런데 발전기는 또 어디다 쓰시게요? 생각해보니 자동차만 몇 대를 사셨는데 운전하는 걸 한 번도 못 봤네. 그거 다 어딨어요?”
“천천히 알려줄게. 천천히.”
“설마 이거 들고 또 실종되려는 겁니까?”
아, 걸린 건가? 이차원은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박지원은 이번엔 어림도 없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차원님! 그럼 전 또 어디로 연락하라구요? 설마 하염없이 기다리란 소린 아니죠?”
“이번엔 진짜 금방 올게. 중화연맹이나 잘 감시하고 있어. 허튼짓 하면 말하고.”
겨우 그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는, 차원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이교도 7대장을 제압하면 중화연맹이건, 세계 연맹이건 그 무엇도 자신의 앞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
-이건 또 뭐예요?
프랭크는 차원이 가져온 특이한 기계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호기심을 보였다.
-SUV보다 큰데 바퀴는 없고.
“이거? 전기를 생산하는 장치지.”
-우와.
세상에, 전기를 아무런 능력 없이 만들 수 있다니. 프랭크는 금세 얼굴을 밝히더니 발전기를 살폈다. 이 세상에는 전기 속성 마법들이 즐비해 있지만, 그런 전기를 자동으로 생산해내는 장치가 있을 리는 없었다.
-아크족 대신 사용하겠단 소리지?
데린이 이차원의 계획을 금방 읽어내었다. 그의 동료들 또한 아크족을 대신할 괜찮은 방법 같다고 동의하는데, 누군가 이 방법에 반기를 들었다.
-이런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7성군이 그들에게 물어왔다.
-로울로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 로울로 뿐만 아니라 그의 수족인 알리샤를 상대했으면서도 이런 함정이 먹힌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들은 이 방법에 찬성할 수 없다는 듯이 부정적인 태도만을 보이고 있었다.
-요정이 가져온 발전기라면 에너지를 띠지 않으니까...
-아무리 무생물체로만 이루어진 함정이라도 티파이트는 미약하게나마 에너지성을 띄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울로 정도 인물이 이끄는 부대라면 그런 작은 에너지조차 감지할 인물 한두 명쯤은 있고요.
데린이 이차원의 계획을 설득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나 이 함정을 처음 고안해 낸 라프텔의 논리는 함정이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로울로 편대에 혼란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는 걸 알기에 이차원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함정에 걸릴 확률이 낮더라도 걸리면 최소 중상 이상의 치명상을 입을걸. 그들의 부하는 더욱 심각한 부상을 당할 거고.”
함정에 걸리지 않더라도, 이런 함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신경은 곤두설 것이고 전투에선 정신적 압박을 먼저 넣는 것으로 우위를 가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차원은 그들이 모르고 있는 정보를 사용했다.
‘타파이트 하나만 믿기엔 리스크가 크지. 하지만 나에겐 리지가 있어.’
차원은 리지에게 호감도를 얻었던 바, 리지를 완벽한 스파이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것이었다. 리지를 잔혹하고 추악한 마녀라고만 알고 있는 저들은 ‘호감도’라는 개념을 모를 것이기에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7성군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을 끌어당겼다.
-지휘권은 아무래도 저희들이 쥐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차원님이 생각하는 전략과 우리가 생각하는 전투가 다르니 차원님이 지휘권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조화를 이룰 것 같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들과 의견을 좁히는 건 힘들겠어. 어떻게 해야 이들을 설득시킬 수 있지? 전투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맞지만, 노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안들을 생각하는 차원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7성군은 선한 힘 그 자체로 악인, 이교도를 무너트리는 정통한 방법을 따르겠다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리지를 사용하겠단 계획을 말해야만 하는 걸까? 이러하나 저러하나 모두 고민이 들었다. 결국 이차원이 고민에 빠진 사이에 7성군이 우위를 점하는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 거대하면서 익숙한 푸른 빛이 일렁이더니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가능성이 생겨났다.
-저건 뭐야!
-드, 드래곤이잖아!
하칸이 등장해서 모든 것이 설명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