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경기가 시작되려고 하는 듯 경기장에선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서서히 커져갔다. 콜로세움 현장에 수많은 인파들이 우글거리며 몰려오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죽음밖에 없는 그들만의 경기가.
-아아, 약 59년 만에 이루어지는 콜로세움 경기에 오신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사회를 보는 남자의 말에 관람석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질러대었다. 어찌나 그 소리가 컸는지, 함성의 울림만으로 콜로세움의 갈라져 있는 벽을 부숴버릴 거 같았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영 어색한 장면이 있었다. 차원과 도적단들이 이전 험악한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사이좋게 나란히 서서 응원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서로 칼춤 추면서 피바람을 만들어 낼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몇 분 전으로 되돌아가면 알 수 있었다. 차원이 알리엔 도적단에게 멱살이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목을 풀어버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였다.
“난 늑대인간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거든.”
-어딨냐, 그 자식?
불같이 화를 내는 도전단에게 이차원은 얼음같이 차가운 얼굴을 띄며 반격하였다.
“근데 내 입장에서도 그놈이 아크족을 들고 튄 건지 아크족이 그놈을 들고 튄 건지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뭐? 야! 그 멍청한 아크족이 늑대인간을 들고 튀었겠냐? 어?
도적단은 순순히 밀려나지 않는 이차원에게 답답함을 느끼는지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래서 뭐 달라질 거라도 있냐?
“아니 그러니까 내가 늑대인간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으니 다 같이 가서 확인해 보자고.
누가 들고 튄 건지.”
-좋다. 앞장서.
도적단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는 모습을 보이며 나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차원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드디어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가? 이차원은 다리를 움직이는 대신에 임을 움직였다.
“미안한데 내 동료들이 이번 전투에 참가해서 응원을 가야 하거든. 당신들도 보스 응원가야 하지 않나?”
그의 말에 그들도 일리가 있는 듯,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도적이라 해도 서로를 이어주는 의리는 남아있을 터였다. 안 그랬다면 이미 서로의 욕심이 앞서 리지를 가지겠다는 파투가 났었겠지. 이차원의 예상이 적중한 듯 도적단들은 말이 없어졌다.
“내가 도망가겠단 것도 아니고 경기만 끝나고 가자니까? 너희들 형님이 형수님이랑 처음 만나는 자린데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고 그래야 힘도 나고, 어? 안 그래?”
그도 김용훈 못지않은 달변가의 실력을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말에 도적단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음이 흔들리는 듯 눈동자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결심을 내린 듯 한 명이 이차원에게로 다가왔다.
-아니면 죽을 줄 알아라.
그렇게 차원은 도적단과 함께 관람석에 나란히 앉게 된 것이다. 이 녀석들, 보이는 모습에 비해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어느덧 경기에 푹 빠져버린 모습이었다.
-야. 자리 좁으니까 넌 서 있어.
네, 네, 알겠습니다. 이차원은 최대한 그들의 말에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이곳에서 괜히 싸움만 일어나면 그 알리샤라는 꼬마 아이한테 걸리게 될 테니까. 그 전에 주변 NPC들이 너무 많아서 다치게 하기 쉬웠다.
-야. 너 가서 맥주 좀 사 와라.
-안주도.
그 모습에 이차원을 만만히 본 건지, 도적단은 끊임없이 차원을 하대하였다. 이차원이 자기네들 따까리인 줄 아나 보네. 그럼에도 차원은 군말 없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야이씨, 누가 맥주 사오래? 내가 분명 시원한 영약 사오랬잖아, 멍청한 새끼야.
자기가 맥주를 사오라 했으면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냐? 그러거나 말거나 도적단은 차원이 사온 맥주를 그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맥주의 탄산들이 얼굴에서 톡톡 터지고 있었다. 이차원의 심정처럼.
-다시 사와.
“......”
차원은 곧 분출해버릴 분노를 삼켜버렸다. 이걸 참아내다니, 그도 정말 선인이다. 거기에 그가 갑자기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기라는 표현이었다.
“그럼요. 지금 이 순간을 실컷 즐기다 가시죠.”
-가? 가길 어딜 가?
“아닙니다.”
차원은 묘한 말을 그들에게 남기고는 다시 심부름을 갔다. 도적단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님 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저 새끼 엄청 세 보여서 쫄았는데 별거 없나 보다?
-우리가 알리엔 도적단이라는 사실에 꼬리 내린 거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의 위엄에 이차원이 순순히 따르고 있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멍청하게도 자신들만의 생각에 확신한 채 서로 키득거렸다. 잠시 후에 보자.
-야. 앞에 키 큰 새끼. 너 말이야 너. 너 때문에 안 보이잖아.
얼씨구, 위세가 아주 등등해졌는지 앞에 앉은 남자의 머릴 내려치고 밀치고, 진상을 부리면서 본인들의 자리를 만들었다.
-승리의 여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그 치열한 전투가 지금 시작됩니다!
때마침 시원한 영약을 양손 가득 사들고 온 이차원이 돌아오자마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대기를 하고 있던 모험가들이 콜로세움 전투장 중앙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뭐야? 이대로 시작하는 거라고?
자신들의 앞을 막고 있던 창이 열리면서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가던 참가자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토너먼트라 들었는데 이렇게 단체로 싸움을 하는 것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때, 그들의 정신을 차리게라도 하는 듯 무언가 거대한 충돌이 느껴졌다.
-아! 누구의 메테오입니까!! 싸움장을 폭발시킵니다!
이차원 덕분에 상황을 알고 있던 데린이 시작과 동시에 [메테오]를 쏘아 내린 것이다.
-몰려있으니까 한 번에 처리해버리기는 쉽네.
데린은 아주 여유로운 표정을 보이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보여주었다. 그 덕에 참가자들은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의 시야를 가린 폭발의 불길이 사그라들자, 이번에는 웬 단검을 든 전사가 뛰쳐나왔다.
-저, 저 녀석은 또 뭐야?
-아! 타무즈 왕국의 코웰!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 전사는 바로 코웰이었다. [은빛 조각]으로 찬란한 빛을 내던 단검은 참가자들의 사이를 화려한 물결을 일으키더니 침묵시켜버렸다. 이렇게 차원 일행의 활약으로 콜로세움 경기가 흘러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차원은 더욱 초조해져만 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경기 시작 전엔 올 줄 알았는데.’
지금쯤 도착해서 써펜트의 각막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데 울프릭이 이상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시각, 울프릭이 카르틴 왕국에 도착했을 때는 코웰의 기사들이 타파이트를 도시에 깔고 있었다. 그들은 울프릭이 SUV에서 내리자 모두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라? 요정님은 안 오시고 혼자 오신 겁니까?
아르만이 혼자 있는 울프릭에게 놀란 듯 물었다.
-그쪽에 볼일이 생겨서. 나도 다시 넘어가 봐야 해.
울프릭은 아크족을 트렁크에서 내리자 타파이트를 깔던 기사들이 모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게 그 비싸다는 아크족이야?
-전기가 통하는 생명체라. 신기하긴 하구만.
-어, 오. 전기 뿜었다.
갑자기 코웰의 기사들이 자신들을 둘러싸자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아크족이 전기를 뿜어대었다. 푸르고 광활한 빛이 새어 나왔지만, 다행히 그들을 잡고 있던 울프릭의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다 같이 통구이 되기 싫음 성질 돋우지 말고 조심해. 바닥 전체에 타파이트가 깔려있으니.
-타파이트가 깔린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분명 타파이트 위를 흙으로 덮어놓은 상태라 안보일 텐데... 그 사실을 단번에 간파한 랜돌프에게 아르만이 흥미를 보인 것이다. 동시에 누르면 안 됐을 폭탄을 눌러버렸다는 걸 울프릭은 직감해버렸다.
“또 시작이군.”
역시나, 울프릭은 미리 자리를 도망쳤다.
-우리 위대한 드워프족은 타파이트의 금속 기운을 느낄 수 있거든. 아마 이걸 느낄 수 있는 종족은 드워프족이 유일할 걸세. 그뿐이게? 나 같이 타파이트를 전공한 천재 대장장이들은 전도율까지 높일 수 있다고.
-정말입니까? 엄청난 능력인데요?
아르만이 그에게 칭찬을 하며 장단을 맞춰주니 랜돌프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선 당장이라도 전도율을 올려주겠단 의지로 땅속 타파이트를 만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르만을 비롯한 코웰의 기사들이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아저씨 얼굴에 키는 난쟁이고, 목소리는 까랑까랑했으니까.
-아저씨가 귀엽긴 쉽지 않는데 말입니다.
아르만이 울프릭에게 말하자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징글거린다는 것은 온몸으로 부르르 떨며 말하였다. 그럴 만도 하지, 저 알람시계처럼 시끄러운 자를 종일 옆에 끼워 다녔으니까.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앞으로 웬 시체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붉은 안광을 보니 딱 뵈도 강령술에 걸린 시체였다.
-강령술? 누구냐!
울프릭이 곧바로 경계심을 가지며 심판자의 검을 드러내며 시체를 경계하였다. 설마 또 다른 이교도의 짓인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르만이 울프릭을 말렸다.
-라프텔님이 보낸 전령입니다.
-라프텔?
-네. 혼령의 몸으론 저희와 소통할 수 없으니까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코웰의 기사들은 일하면서 이미 익숙해진 듯 시체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상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평소 손으로 지시를 내리던 시체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잡더니 목을 뽑아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모두가 기겁을 하면서 놀란 눈치였다.
-뭐야. 이건 또 뭔 뜻이냐.
그들도 처음 보는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울프릭은 곧장 이 상황을 처음 보았음에도 눈치를 채었다.
-경고를 주는 거야.
울프릭의 말에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강령술 시체는 목이 뽑혀도 쓰러지지 않는데 지금 시체가 쓰러졌다는 건 라프텔이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가 분명해.
그의 설득력이 있는 말에 기사들은 상황을 그제야 깨달았다.
‘뭔진 모르겠지만 순찰을 돌아야겠어.’
***
울프릭과 코웰의 기사단은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성벽 밖을 순찰하기 시작하였다. 라프텔이 말하는 바는 단 하나, 어떤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것인데, 주어를 모르겠으니 일일이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각자 구역을 나눈 채로 조사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금방 찾아낼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드는데, 이를 반론하듯이 울프릭의 감각에서 숲에서 이전에 느꼈던 익숙한 악 기운을 감지하였다.
‘이교도.’
흑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듯이 심한 악취가 울프릭의 코를 찌른 것이다.
‘예상보다 빠른데. 계획이 변경된 건가.’
7대장 중 로울로와 다른 이름 모를 대장이 카르틴 왕국으로 온다는 것은 정해져 있던 바라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시기가 너무 앞당겨진 느낌이 들었다.
‘제기랄. 직접 소통할 수도 없고 답답할 노릇이군.’
울프릭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라프텔에게 직접 묻고 싶었지만,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직접 확인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