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라프텔은 차원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에 놀라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니. 되도 않는 말이었다.
-내가 보여?
그러나 차원은 어째선지 그토록 찾던 라프텔의 시선을 피하였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 건지 딴 곳을 바라보며 시선을 멍하니 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변 귀신들도 모두 쑥덕거렸다.
-봐, 역시 안 보이는 거라니까?
-뭐야, 씨. 드디어 재밌는 볼거리가 생기나 했었는데.
그리고 그 옆에 또 한 사람도 이차원에게 반응했다.
-무슨 환상이라도 본 건가요? 이제 더는 위험하니 어서 돌아가요.
됐다. 먹혀 들어갔어. 차원이 노린 것은 하프만이 혼령을 본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못 본 척을 하던 것이다.
-뭐야? 내가 보이는 거 아니었어?
라프텔은 차원의 주위를 맴돌며 얼굴을 계속 들이밀었다. 하얗고 투명한 네 얼굴 들이밀지 마. 기분 되게 역겨우니까. 무슨 그녀의 얼굴에 파우더를 잔뜩 뿌려 떡칠한 기분이 들어왔다. 차원은 애써 계속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내가 살아만 있었어도…!
혼령들이 갑자기 하프만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온갖 증오 섞인 말들은 퍼부어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왜 이래? 분명 자신의 귀신이 안 보이는 연기는 통했을 텐데.
-개자식. 저런 쓰레기 자식도 아직 살아 있는데 어째서 내가......!
차원은 귀만 쫑긋 세우며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라프텔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계속 팔짱을 끼고 차원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차원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하프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과 마주치지 않으려도 돌린 것뿐인데. 하프만은 스스로 뭔가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말을 뱉어내었다.
-역시 이곳에 오신 이유는 저의 악함을 판단하기 위함이었군요.
하프만은 차원이 이곳에 온 이유가 자신의 양심을 시험하려고 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이 주구장창 이야기를 하였다.
-바른대로 말씀드리자면, 이곳에 있는 시체 대부분 저와 저희 부하들이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모든 건 카르틴 왕국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의를 위해 작은 것쯤은 희생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하프만의 말을 들은 혼령들은 더욱 분개하여 그의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하프만 본인은 볼 수 없었지만 공동묘지에 있는 대부분의 혼령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기 사리사욕 채우겠다고 무고한 사람을 죽여놓고 뭐? 대의? 에라 이 개자식아!
‘사리사욕?’
차원도 실제로는 하프만이 왕국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라고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혼령들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잘못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차원님을 어려움에 처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도 피해자입니다. 저도 이교도 세력을 그 누구보다 처단하고 싶은 사람 중 하나라는 걸 믿어 주십쇼.
하프만이 고개를 조아리고 결백을 주장하였다. 헌데 하프만의 말에 더 발광하는 혼령들이 공동묘지를 흔들고 있었다.
-저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구만.
-산 자를 농락한 것도 모자라 공동묘지까지 찾아와서 죽은 자를 농락해? 죽어서도 천벌 받을 거야!
그들의 가시 돋친 말에 귀가 시끄러워서 하프만의 말이 안 들릴 지경이었다.
-형님, 우리 영력을 줄여서라도 두 놈 다 저주를 내릴까요?
그저 같이 있을 뿐이었던 그에게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는 건가? 하, 방관죄도 같이 처벌하겠다는 건가. 그때, 차원의 귀에 꽂힌 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영력? 저주?’
영력은 강령술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인 힘 아닌가? 스킬을 사용할 때 마력으로 마나를 모으듯이, 영력으로는 영혼의 힘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혼령들은 영력을 이용해서 저주를 내리겠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라프텔님, 영력 사용을 허락해주십쇼.
혼령의 말을 들은 차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대로 찾아왔군.
강령술에 통달한 마법사라 불리었던 라프텔은 강령술 그 자체가 아니라 영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강령술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차원이 그런 생각을 할 때, 혼령들은 라프텔의 허락을 기다리며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데 정작 라프텔의 시선은 차원에게만 꽂혀 있었다. 그리고 라프텔의 허락을 기다리던 혼령들도 라프텔을 따라 차원을 쳐다보았다.
-하프만, 이 거대한 힘을 가진 기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할만한 힘을 가진 놈.
라프텔이 차원을 가리키면서 말한 것이다.
-이교도 사제들 중 이렇게 거대한 힘을 가진 놈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이교도 사제?’
차원은 라프텔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그 뒷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느껴지는 힘도 그렇지만 내가 모를 정도의 계층이라면 저자는 이교도를 만든 대악군 중 한 명일 수가 있다.
‘뭐? 대악군?’
이차원이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라프텔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챈 건지 악마의 미소라도 본 듯이 소리쳐댔다.
-이놈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모든 영력을 소모해서라도 저 대악군을 처치해야 한다!
라프텔 말에 몰려있던 혼령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저 두 놈 자식을 한꺼번에 처단하자!
그리고 차원은 저주라는 것에 대해 잘은 알지 못했지만 이대로 있다간 저들의 모든 힘이 동원된 저주를 받을 수 있단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더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영력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검성, 하원의 말을 듣고 라프텔님을 찾아왔습니다.”
차원이 라프텔 쪽으로 걸어가 말하자 모든 혼령들이 차원을 주목하며 술렁거렸다.
-혼령을 본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순식간에 이차원이 이야기의 중심을 뺏어온 것이다. 라프텔은 그런 이차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원이 말했던 그 용사?
***
-요정님?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신의 눈에는 차원이 한발 치 떨어진 허공에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일 게 뻔하였다. 하프만이 묻자 차원은 저 멀찍이 떨어진 묘지를 가리키며 명령하였다.
“저기 있는 묘지 하나만 파놔. 쓸모가 있을 거니까.”
하프만은 갑자기 묘지를 파라는 차원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시체를 꺼내 기억을 읽을 생각인 것 같아 군말 없이 묘지를 파러 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편하게 단둘이 라프텔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차원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도하였다.
“하원이 당신을 찾아가 보라 하더군요. 강령술을 배울 수 있다고.”
-그 노인네는 아직도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나 보네.
라프텔이 작게 웃으며 말한다.
-그런데 하원의 제자라는 놈이 저런 쓰레기랑은 은 왜 함께 있는 거지?
라프텔은 멀리서 묘지를 파는 하프만을 가리키며 물음을 지었다.
-저놈은 이교도와 거래를 했어.
“그건 알고 있습니다. 왕국을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던 선택이라 하던데요.”
이차원의 대답에 라프텔이 쓰디쓴 약을 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처음에야 그랬지. 이교도가 왕국 전체를 노예로 삼지 않는 조건으로 매주 제물을 바칠 것을 강요했고 카르틴 왕국은 이에 맞설 힘이 없었거든.
라프텔은 말을 할수록 표정이 점점 더 얼어붙는 강가 마냥 굳어져갔다.
-카릴리아 대륙에서 시작된 시대 전쟁으로 대부분 왕국들이 힘이 약해진 반면, 이교도들은 전쟁에서 생긴 죽음을 통해 힘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이교도들이 모든 대륙을 관할하려다 보니 힘이 약해지고 움직임이 느려졌지만 카르틴 왕국 정도는 언제든 집어삼킬 힘 정돈 가지고 있다는 것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분명 시작의 대륙에서 넘어왔다 하지 않았어?
라프텔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며 이차원에게 의문을 가졌다. 물론 게임을 플레이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걸 설명할 방도가 없고 이들을 속이고 있다는 상황만 불리해지기에 말하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하프만에 대한 얘기나 더 해주시죠.”
-하프만은 변했어. 처음엔 극악무도한 모험가나 사형수들을 제물로 바치더니 나중엔 스스로가 살인귀가 돼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제물로 바쳤으니까.
리프텔은 하프만의 변화한 모습이 분하다는 듯이 몸을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국가와 정의를 위해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의 살육을 정당화했지. 그러다 나중엔 강령술을 배우는 것에도 호기심을 가지더군.
‘강령술? 그래서 로이칸을 찾아갔던 거군.’
차원은 이제야 하프만의 목표 전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드디어 다른 방면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시체를 죽이기 아까웠던 거겠지. 아마 지금 저놈은 널 죽이고 네가 가진 강령술을 뺏어갈 궁리만 하고 있을 거야.
“당신도 이교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겁니까?”
-그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영력에 대한 지식을 요구했지만 보다시피 난 거절했거든. 그리고 똑똑히 기억나는데 그때 날 죽인 사형수가 하프만이었어.
공동묘지 주변을 둘러보며 한탄스럽다는 듯이 공허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차원에게 말하였다.
-이곳에 있는 다른 혼령들 대부분은 하프만에 의해 죽은 자들이야.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시체 하나만 꺼내 기억을 읽어봐. 그놈이 저지른 극악무도한 짓을 볼 수 있을 테니.
이차원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의 말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는 곧바로 근처에 있는 묘지에 묻힌 시체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얼굴이 찌그러지고 흙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시체가 그의 손에 잡히게 되었다.
이차원은 그 역겨운 시체를 신경이라도 쓰지 않는 듯 [사자의 기억]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해골의 기억에서 하프만은 자신을 라프텔에게 안내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라프텔에게 안내하지 못한 자는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버리겠다!
그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그들을 잘 익은 벼를 자르듯이 잘라 나가였다. 라프텔은 안내할 수 없다면 강령술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직접 내놓으라고도 협박을 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도의 왕과도 같이 보였다.
그 기억의 장면 안에 하프만의 부하들도 몇몇 있었는데, 지금 차원의 동료들과 함께 있는 놈들의 얼굴로 가득하였다.
“생각보다 더 끔찍한 놈이었군요.”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어? 나를 도와 하프만과 이교도 세력을 처리하면 강령술에 대해 알려줄게.
라프텔의 제안에 차원은 고민했다.
‘혼령인데 NPC라고 볼 수 있나? NPC면 호감도를 올려 스킬을 뺏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라프텔의 제안 뒤에 온 고민을 끝낸 시간은 단박에 끝났다. 차원은 심판의 검을 빼어 들고는 묘지를 파는 하프만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는 맥없이 자신이 판 묘지에 굴러떨어지더니 차원을 쳐다보았다.
-요, 요정님!
하프만이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차원은 그의 목을 칼로 베어버렸다. 찢겨져 나간 그의 시체만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덤에 들어가 있었다. 이차원과 하프만의 모습에 혼령들과 라프텔의 입이 헤벌레 벌어졌다.
[ ‘영혼’ 라프텔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
[ ‘영혼’ 라프텔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
[ ‘영혼’ 라프텔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