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프만의 기사 하나가 데린에게 연락 구슬을 돌려주며 꾸벅 인사를 하였다. 연락 구슬이란 말 그대로 현실세계로 치면 전화기와도 같은 물건이었다. 이런 물건은 또 언제 챙겨서 가져온 건지, 정말 신기하였다.
-어머니랑은 연락됐어?
-네. 지금 집에 안 계신다네요. 이교도들 때문에 왕국 전체가 북쪽에 있는 평화의 동굴로 떠난 모양입니다.
-왕국 전체가?
아르만은 그 말에 수상함을 느끼면서 되물었다.
-왕국 전체가 이동하는 걸 하프만이 몰랐다고?
-그게 중요합니까?
기사는 언성을 높이며 따지듯이 묻는 아르만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를 본 아르만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몰라하는 기사에게 답답한 듯 설명하였다.
-한 나라의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동에 대한 보고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고. 그걸 알면서도 왕국에 가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겠다? 수상하지 않아?
아르만의 설득력이 맞아떨어지는 말에 분위기가 전부 싸해졌다. 곧이어 카르틴의 기사들 모두가 아르만을 비롯한 코웰 기사단을 금방이라도 습격할 듯이 노려보았다.
-지금 하프만 단장님을 의심하는 겁니까?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이니까. 그전에 하프만이 이교도들과 손잡고 한 짓도 있고.
-그 말은 하프만 단장님께서 이교도의 개라도 됐다는 말입니까?
카르틴의 기사들도 자신의 단장을 욕보이는 걸 참을 수 없어 하는 것 같았다.
-하프만 단장님을 모르면서 그딴 말 지껄이지 마. 그분이 국가의 안전과 정의를 위해 얼마나 힘쓰진 분인데. 너희가 뭔데 감히 그딴 말을 입에 올려.
-그렇게 정의를 생각한단 사람이 무고한 사람들 목을 벴나?
-뭐야?!
분위기는 갈수록 더욱 험악해지기만 하였다. 급기야 하프만의 기사들과 코웰의 기사들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만해, 다들.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걸 가지고.
데린이 연락 구슬을 꺼내 보이면서 카르틴의 기사들을 향해 말하였다. 확실히 데린의 판단이 옳았다. 이 이상 일이 더 귀찮아지게 되면 사건이 어디까지 퍼지게 될 줄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신들도 인정할 건 해야 돼. 기사단장 씩이나 되는 사람이 왕국 전체가 이동했단 사실을 몰랐던 건 말이 안 되잖아. 알면서도 결백을 증명하겠단 이유로 요정을 데려간 건 우리 입장에선 충분히 의심할만하다고.
웬일로 데린이 조목조목 따져가며 그들을 설득시켜 나갔다. 그녀의 허를 찌르는 말에 카르틴의 기사들도 겨우 침묵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말에 동의하여 하프만을 욕보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조금 진정시킨 데린은 곧장 연락구슬을 통해 차원에게 연락해 보려 하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데린이 연락 구슬에 마나를 담아 발신하면 받는 사람인 차원도 구슬에 마나가 담겨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차원이 어떠한 스킬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밖에 없었다.
-무슨 마법을 사용하고 있단 건데….
차원이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데린의 말에 그곳에 차원의 동료들은 어떤 상황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차원의 동료뿐만 아니었다. 카르틴 왕국의 기사들도 고개를 숙이고는 침묵을 지켰다.
***
-길바닥에 시체가 있길래 치우려 한 것뿐입니다.
하프만이 태연하게 시체를 내려두며 말하였다. 그리고 하프만이 이렇게 태연할 수 있었던 건 시체의 신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의 갑옷 하단에 붙은 손가락 길이의 파란색 꼬리표. 이 표식은 왕국 성벽 외곽을 순찰하는 경비병이란 뜻이다.
3개월마다 부대, 조직 간에 교대를 하는데, 꼬리표에 적혀 있는 날짜를 보니 이 경비병은 아직 왕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왕국 내 업무가 있어서, 외곽에서 근무를 서다가 잠깐 왕국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때는 이미 왕국의 사람들이 모두 없었을 테고. 거기에 이 경비병은 직무상에도 그렇고, 직급이 말단인 상황이었기에 내부의 사정을 모를 것이 틀림없었다.
‘말단 경비가 뭘 알겠어.’
하프만은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란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혹시 모르니 기억을 찾아보시죠.
그렇기에 하프만은 차원에게 역으로 오히려 당당하게 스킬을 사용하라고 말하였다. 이 경비의 기억을 읽어도 차원이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속셈이 무엇일지,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내야만 했다.
그 말에 차원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단 듯이 경비의 시체에 [사자의 기억]이라는 스킬 시전하였다. 스킬을 사용하자, 그가 살아생전 가지고 있던 기억이 선명하게 보였다. 경비는 하프만의 예측과 일치하였다. 외곽 근무를 하는 경비였는데 기억이라곤 초소에서 히히덕거리는 것뿐이었고 말단직이다 보니 내부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하프만이 이 사실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이차원은 오히려 수상히 여겨 경비병 갑옷에 달린 파란 꼬리표를 만지작거리다 하프만을 쳐다보았다. 하프만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태연함이 같이 보였다. 이차원이 아직도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떨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만 보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는 꼴인데.’
차원은 하프만에 대한 의심을 내려놓지 않으면서도 시체의 기억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비록 그가 말단 경비병이라 왕국 내부 사정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왕국 외곽의 정보들은 얻을 수 있었다.
‘저게 뭐지? 공동묘지?’
그리고 그때, 왕국의 외곽을 도는 경비병의 시선에 공동묘지가 하나 보였다. 저런 곳에도 묘지가 세워져 있었구나, 하는데 어딘가 들어본 듯한 묘지였다.
그리고 떠올렸다. 그 묘지는, 차원이 하원에게 들었던 곳이었다. 카르틴 왕국의 주변에 있다고만 들어서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 했는데 시체의 기억을 통해 공동묘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라프텔을 만나는 건 해결됐군.’
라프텔이 사는 공동묘지 위치를 알아낸 차원은 시체의 기억을 계속 훑어보았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마을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기 휘한 단서는 이것밖에 없었기에 샅샅이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외곽 근무대에서 보초를 서던 경비는 왕실에 전할 것이 있어 차출돼 왕국으로 가는데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깜짝 놀란 경비는 이 사실을 전하러 외곽 근무대에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이 잘 보였다. 하지만 경비가 도착한 그곳에도 아무도 없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경비가 초초해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기억을 통해서 보이는 어떤 물체가 있었다. 검은 말에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그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 뒤로 경비의 기억은 멈추었다.
‘저 차림새에 저런 능력이면... 이교도?’
이차원은 경비의 시점에서 나와 잠깐 3인칭의 시선으로 남자를 살피어 보았다. 검은 말과, 검은 망토. 확실히 남자는 이교도였다.
‘이로써 이교도가 관련된 건 확실해졌다.’
차원은 어쨌든 이 왕국의 국민들이 없어진 사건이 이교도에 의한 거란 걸 확신하는데 그때, 박지원에게 전화가 오면서 그의 시야를 흔들었다.
‘꼭 이럴 때 전화를 건다니까.’
***
“헌터들 전부 모였고 선발전 시작됐습니다.”
“잘됐네. 수고해.”
차원은 바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박지원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이제 그만 놓아줬으면 좋겠는데.
“차원님! 저 지금 돌아버릴 거 같아요.”
양쪽으로 다 돌아버릴 지경이겠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터져버린 거야?
“왜. 하칸이 말썽이라도 피워?”
제발 그런 일로 전화했다고만 해주라. 그래야 상황이 빨리 끝나니까.
“아니요. 하칸은 식자재 마켓 하나 사서 풀어놨더니 얌전해요.”
아 맞다. 그랬었지. 그럼 또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건가. 정말이지 짜증 나 죽겠네.
“그럼 왜 그러는데.”
“안정의 종을 지킨다고 지키고 있는데 누가 와서 이걸 건들기라도 해서 헌터들 싹 다 죽일까 봐 불안해 죽겠다구요. 정신병 걸릴 지경이에요. 직접 오셔서 감시한다고 하시더니 대체 언제 오시는 겁니까.”
“당장은 급한 일 때문에 못 가. 이 일만 끝내놓고 곧 갈 테니까 은신의 영약만 챙겨놔.”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서로 전화를 받겠다고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익숙하고도 오랜만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리고 생각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최번개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형.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들어. 오늘은 볼 줄 알고 왔는데.”
“너 혼자 왔냐?”
“아니. 다 같이 왔지. 오랜만에 다들 형 보고 싶다 해서. 인사해.”
최번개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예리나와 김역전, 은지의 인사가 들려왔다. 아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지, 저 상황에 있었다면 몇 배는 더 귀찮아지는 상황이 눈에 그려져 왔다.
보나마나 그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게 뻔했고 그의 일정이나 최근 활동에 대해 취조하듯이 물어볼 게 뻔하였다.
‘이 사람들, 평소에도 그렇게 시끄러운데 오랜만에 만나면 더 시끄러워지겠네.’
그리고 이내 박지원이 다시 전화기를 뺏어 들더니 언제 오냐고 차원을 닦달하였다.
“지금 전세계에서 차원님 한 분 보겠다고 몰려왔어요. 그것도 A급 이상 헌터들이요. 대체 언제 오시는 겁니까.”
“일단 나 없이 알아서 진행해.”
“하아...”
수화기 너머의 차원의 말이 무책임하게도 들리는 박지원이었다. 이걸 그냥 너클을 끼고 머리에 콩밥을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그랬다간 상처라도 생겨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제명이 되고도 남을 거 같았다.
“설마 지금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거는 아니지?”
박지원은 가슴에 정곡을 제대로 맞은 느낌이었다. 눈치는 또 이렇게 빨라가지고. 박지원은 주변의 시선도 있고 이차원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아봤자 좋을 게 없어서 서둘러 둘러대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애써 마음을 감추며 이차원에게 말을 하였다.
“그럼 걔네들 통제 좀 잘 해주고 내 이야기에 대해선 대충 에둘러 말하면서 처리해. 그럼.”
무심하게 끊긴 전화 소리만이 전파를 통해서 흐르고 있었다. 앞에선 이차원을 보겠다고 난리고, 정작 이차원은 오지도 않고.
어느덧 핸드폰의 신호는 끊어져 있었다. 박지원은 지금 이 상황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