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끈질기군.
써펜트는 배가 뚫렸지만 쉽게 죽지 않았고 끊임없이 몸부림을 해대었다. 울렁거림이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그럼에도 울프릭과 나머지 동료들은 마지막까지 검을 놓지 않고 써펜트의 내장을 찔러대었다.
‘혈정석도 이게 마지막이야.’
혈정석 하나에 약 2000L의 피가 담기는 것이 정설인데, 이미 일곱 개의 혈정석을 다 소진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써펜트는 죽기 전 마지막 힘을 쥐어짜고 있는 듯, 피를 한꺼번에 쏟아내더니 잠잠해졌다.
-뭐야? 죽은 거야?
이차원의 동료들은 잠잠해진 써펜트 배 속에서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역겨운 냄새는 여전히 퍼졌고, 피비린내도 같이 퍼져와 더 고통스러웠다.
-죽어도 문제 아닌가.
울프릭의 말에 다들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가 말하는 문제란...
-설마 이대로 가라앉는 겁니까?
그들이 당장 써펜트를 죽여서 위액에 녹아 죽는 건 면했지만 죽은 써펜트가 물에 가라앉기 전에 탈출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시선은 동시에 이차원이 다시 해결책을 주길 바라며 그의 눈치를 바라보았다. 별수 없이 이차원의 눈에 다시 붉은 기운이 서리더니 써펜트에게 강령술을 걸기 시작했다.
“얼마나 갈진 모르겠어. 영력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절망의 숲에서 뛰쳐나온 몬스터 변형체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음에 영력을 많이 얻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많은 영력을 시체들을 살리느라 소모량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이제 영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갈 때까진 가보자고. 길은 내가 안내할게.
데린이 강령술을 거는 차원 옆에서 눈을 감아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주문을 거는 듯 중얼거리자 물 위가 홀로그램처럼 보여지더니 마치 다른 차원으로 온 거 같았다.
-조심해. 바로 앞에 암초 하나 있어.
데린은 자신의 마법으로 보이는 풍경을 알려주었다. 이차원과 데린이 함께 힘을 합쳐 바다와 같은 강을 건너갔다. 그렇게 대륙으로 그들이 삼켜져 있는 써펜트를 안내하는데,
지이이이잉
어디선가 공기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실에 있는 박지원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어어, 비켜요, 비켜.
그리고 이차원의 집중력이 깨질 때마다 써펜트의 몸이 흔들거리며 출렁거렸다. 통제력을 잃을 때마다 배 속에 있던 사람들 서로 부딪히고 구르고 난리가 났다. 기사들은 이차원이 영력이 없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요정님! 영력이 부족한 거라면 제가 죽어서라도 영력을 제공하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카르틴 왕국의 기사들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던져가며 용맹스럽게 영력을 주겠다고 나서기 시작하였다.
지이이잉!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당연히 모르겠지. 그의 핸드폰에는 계속해서 진동이 울려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 여자가 진짜.’
이차원은 애써 진동 소리를 무시하고 눈을 감아 집중을 계속하여 써펜트를 이끌기 시작했다.
-조금만 버텨. 거의 다 왔어.
데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속을 헤엄치던 써펜트의 헤엄이 멈추더니 그대로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요정님, 괜찮으십니까?
그의 영력이 모두 소진된 것이다. 이제 몇 명의 사람만을 부릴 정도의 영력밖엔 남지 않았다.
“다들 수영할 줄 알지?”
빠르게 판단 내린 차원은 강령술로 써펜트가 구역질을 하게 만들었다. 써펜트는 고통스러운 듯 괴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써펜트 내부가 출렁이더니 배 속에 있는 이차원 일행을 물속으로 뱉어내었다.
감았던 그들의 눈에는 순식간에 대량의 환한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 마침내 써펜트 배 속에서 나온 이차원 동료들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 위에 둥둥 뜬 채 숨을 고르는데, 휴식은 얼마 가지 못했다.
-아얏. 뭐야 이거?
-다들 조심하세요. 피라 떼가 나타났습니다.
기사들 말에 물속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허둥지둥하며 겁에 질리고 피라 떼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차원이 고민도 없이 혈정석에 담았던 피를 방출시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물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시체들의 피가 쏟아지는 듯이 보였다.
이차원은 남은 영력을 이용해, 물속에 있던 시체 몇 개에 강령술을 걸어서 피라 떼가 있는 곳으로 날려 보내었다.
붉은 바닷물에 시체가 엉켜있자 피라들은 금세 그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차원 일행은 그렇게 겨우 피라 떼에서 벗어나 뭍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다들 죽다 살아난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강을 건너지 못했을 거다.
“다들 열심히 해줘서 가능했던 거지.”
-무슨 소리. 다들 너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것쯤은 알고 있어. 그렇게 겸손 떨 거 없다.
울프릭은 그 말과 함께 멀리 떨어져 있는 데린과 프랭크 등 동료들을 보며 말한다. 그들은 모두 디원으로 빙의한 차원을 존경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빛이 나고 있었다. 그때, 상태창이 떠올랐다.
[ 데린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
[ 데린에 빙의할 수 있습니다. ]
‘데린까지?’
그녀가 원하는 물건을 주지 않으면 쌀쌀맞게 행동하던 그녀마저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젠 데린까지 빙의할 수 있게 됐다. 데린까지 동기화율을 만들면, 대체 차원이 가지는 신체 능력이 몇 개일지 알 수 없었다.
-다음 구간부턴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니 오늘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르틴 왕국의 기사단장 말에 이차원도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다. 어차피 다들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기서 더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오늘은 이만 자고 끝내자.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재정비를 하도록 하죠.”
이차원 말에 동료들 모두 바닥으로 드러눕듯 자리에 누웠다.
***
다크혼 세계에서 나온 차원은 곧장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진동의 세기로 전화가 얼마나 왔을지 짐작이 갔지만, 그는 핸드폰을 켰다. 역시 부재중 통화가 몇십 통이 와 있었고 모두 박지원이었다.
한숨을 짧게 내쉰 이차원이 곧장 박지원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한 번만 더 했다간 죽었어.”
“누가요? 설마 차원님이요? 농담도, 참.”
박지원은 이차원 말을 농담으로만 받아들이고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이다, 이 여자야.
“차원님이 가져오신 죽음의 나무로 만든 농경지에 게이트가 발생했어요.”
“그게 지금 이렇게 호들갑 떨 일인가?”
“차원님, 그냥 게이트도 아니라 헤르페르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뭐?”
이차원은 뜻밖에 날아온 박지원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헤르페르 게이트는 아주 유명한 게이트기 때문이었다.
헤르페르 게이트에선 게이트를 만든 존재가 인류에게 어떤 보상을 내리는 것처럼 온몸이 타파이트 금속으로 되어있는 몬스터 헤르페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몬스터 자체도 강하지 않았고 엄청난 양의 타파이트를 얻을 수 있어 헌터들에게 인기가 상당했다.
“이제 어쩌죠?”
“어쩌다니? 좋은 거 아닌가?”
이차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좋은 몬스터가 나온다는 게 얼마나 행운이야.
“중국 정부에서 공문이 왔어요. 게이트 내놓으라고.”
이차원은 그 말을 듣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류를 힘써줘서 고맙고 자기들이 거기에 힘을 보탤 수 있어 영광이지만 게이트는 내놓으래요.”
“고맙고, 영광인데 게이트는 달라고? 말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무슨 개똥 같은 소리가 따로 없네.
“중국은 원래 사유지라는 개념이 없잖아요. 그냥 빌려주는 거지.”
“그래서 이대로 게이트 넘겨주자고 전화한 건가?”
“그럴 리가요. 주긴 왜 줘요. 싹 다 우리가 가져야지. 안 그래요?”
박지원의 단호한 대답에 이차원은 피식 웃는다.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다.
“그래. 우리가 싹 다 갖자.”
마침 잘 됐어. 탱크를 이전 대륙에 두고 왔는데, 이참에 타파이트 싹 챙겨서 다시 프랭크에게 주고 편하게 탱크를 타고 대륙을 다닐 생각만 하면... 아니면, 차를 다시 다크혼 세계에 넣고 타파이트로 코팅을 하던가.
‘어차피 이놈들 하는 행동도 별로였고.’
중국 놈들 하는 행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차원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게이트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누구를 호구로 알고.
“저번에 말한 A급 헌터는 구했어?”
“아니요, 그건 아직......죄송합니다.”
“아니야, 마침 잘 됐어. 그거 오디션으로 뽑자.”
“오디션이요?”
“공개 오디션으로 뽑아서 아예 공론화시켜버리게.”
이차원의 말에 박지원이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는 마찬가지로 웃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해서 성공시켜버리니.
“역시 차원님은 못 당해내겠네요.”
***
- 가장 많은 타파이트를 가져온 자가, A랜드 관리자가 될 수 있고, 이번 헤르페르 던전에서 나온 모든 부산물의 20%를 가져갈 수 있다.
-
“공문 보냈다 하지 않았나?”
이차원이 만든 공고를 본 중국 정부 관계자가 책상을 내리치며 성을 내었다.
“얘는 뭔데 남의 땅에 생긴 게이트를 지 것처럼 설쳐대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차원이라고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그걸 내가 몰라 묻냐? 당장 취소해. 오디션이고 뭐고 당장 취소하라고.”
“그게 이미 지원자가 천 명이 넘었고 모두 팔로우가 상당한 유명 헌터들이라서....”
비서의 말을 들은 관계자가 머리 아프다는 듯 행동을 하였다.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유명 헌터들까지 지원을 했다는 건 단순히 부산물이 탐나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로 이차원과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그만큼 이차원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기사들도 상당했다.
[ 게이트의 권리 국가에게 있는 것이 맞나? ]
[ S급헌터 제임스 던 “차원과 함께 게이트 토벌하고 싶어 지원.” ]
[ 중국정부의 헤르페르 게이트 일방적 통보는 상식 밖의 일. ]
…
“우리 쪽 길드 동원해서라도 갚아 준다.”
중국 관계자가 약이 잔뜩 올라 열이 잔뜩 올라있었다. 그는 입에서 불이 나듯 명령을 내렸다. 중국 산하의 여러 개의 길드가 있는데, 타파이트보다 더 많은 걸 얻어야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감히 중국 땅에서 중국인을 엿 먹이려 들어?”
자신들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중국 당국이었다.
그들의 땅에서 마음대로 착취하는 것도 모자라 모든 이익을 다 챙겨가려고 하다니, 그들의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