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하원이라고 하네.
‘하원?’
자신을 하원이라 하며 소개하는 그를 보더니 이차원의 눈이 커졌다. 귀신의 정체는 이 시작의 마을의 검성으로 이름을 날렸었던, 하원이었던 것이다.
‘실제 존재하는 NPC였다니.’
하원은 A급 기사 출신으로, 이 대륙 전체 기사들의 리더로 불렸던 자다. 실제 게임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NPC들이 말하는 것을 건너 건너만 들어봤기에 이차원도 그의 존재를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놀랄 거 없네. 그 녀석, 귀신을 볼 수 있거든.
그런 하원 역시, 디원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한다. 그리고 이차원은 그제서야 왜 디원이 가진 잠재력이 엄청난 건지 알 수 있었다.
‘역시 단순히 강한 육체 때문만은 아니었나.’
덩치가 좋은 것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개연성을 납득하기가 어려웠었다. 디원은 기사 집안 사람도 아닌데다가, 무력을 휘두르는 집안의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게임의 설정이겠거니 했는데, 이제 보니 대륙에서 가장 강했다는 자의 조언을 들어 무력을 키웠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왔다.
“잘 아시나 봐요. 디원에 대해서.”
-알다마다. 검술을 내가 가르쳤거든. 내 몸처럼 아꼈던 놈인데... 오랜만에 보니 기분이 좋구만.
하원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차원은 하원을 통해서 디원에 대해 알고 싶었다.
“꽤 오래 떠나 계셨나 봅니다.”
-그랬지... 그놈이 언제부턴가 귀신이 들리더니 정신도 이상해지고 나쁜 짓만 골라 하길래 떠날 수밖에 없었네. 귀신인 내가 제자를 말릴 힘도 없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속은 타들어 가고. 쯧.
‘귀신이 들렸다고? 김용훈이 빙의했던 시기를 말하는 거군.’
이차원은 하원이 봐왔던 상황을 대충 알 수 있었다.
-로이칸에게 주기 아까운 몸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살아나니 기분이 좋아. 기운을 보니 자네는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하원은 정말로 디원을 아꼈던 듯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얼마나 기쁜지 그는 이차원의 주위를 휘저어 다니며 바라보고 있었다.
“디원을 정말 아끼셨나 봅니다.”
-아꼈지, 정말 아꼈지. 자네도 느끼겠지만 그 몸은 보통 몸이 아니거든. 덩치가 이렇게 큰데도 굼뜨지 않고 민첩하고 유연하긴 힘들거든.
확실히. 울프릭과 코웰을 능가하는 몸짓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로 해 보였다. 하원은 그와의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는지 아련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 몸을 만들기 위해서 나랑 그놈이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는지... 다시 돌아가도 그렇겐 못 할 걸세.
잠깐. 그렇다면 그를 이렇게 만들어 준 건 온전히 하원 덕분이라는 건가?
‘디원의 육체를 끌어올린 장본인이 하원이라면 확실히 잠재력은 있어. 하지만 앞으로도 그가 나에게 쓸모가 있을까?’
차원은 그렇게 하원과 얘기하면서 그의 잠재력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앞서 걸어가던 동료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부터가 영원의 강이야.
이차원은 줄곧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니 카릴리아 대륙으로 향하기 위한 강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이차원의 눈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보였다.
***
-그럼 조심히 가시게.
하원은 귀신을 보고는 미련 없이 이차원을 떠나려 하였다. 그 모습에 이차원은 깜짝 놀랐다.
“이대로 그냥 가시는 겁니까?”
이차원은 당황해서 하원을 붙잡았다. 그와 함께 다니면 어떤 잠재력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떠나게 하기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자네 혹시 물귀신 작전이라고 들어봤나?
“들어는 봤습니다.”
-그럼 알겠네. 물에 빠진 귀신은 한이 많아서 나 같은 영혼을 보면 붙잡지 못해 안달이거든.
자기들만 갇혀 있기 억울하니 같이 고통받잔 심보지, 뭐.
하원은 혀를 차며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곳에 있는 귀신들은 전혀 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괜히 저길 건너려다 영영 갇히는 수가 있으니 난 여기서 이만 돌아가겠네.
결국 차원이 그의 잠재력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데려갈 수가 없어졌다. 대륙을 넘어갈 고지가 바로 코앞인데... 하지만 그로서는 이겨낼 수 없는 현실에 이차원은 그를 붙잡을 이유도, 명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차원은 하원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하원도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배를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카르틴 왕국의 기사단장과 부하들이 출항 준비를 서둘렀다. 이제 그들의 목적지에 거의 다 도달하였다. 이차원은 아직 하원이 아쉬웠지만 그에겐 다른 꿈이 있기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 이리도 어렵다. 그렇게 출항 준비를 마쳐 가며 배에 오르려 할 때였다. 저 멀리서 하원이 다시 되돌아온다.
-그래도 내가 애지중지 키운 놈인데 그냥 보내자니 마음이 쓰려서 말이야. 내 특별히 사람 하나 소개해줄게. 아니지, 그놈도 죽었으니 사람은 아니고 귀신. 귀신 하나 소개해주지.
하원은 오랜만에 만난 디원을 볼 수 있던 게 좋았었는지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귀신이요?”
-나도 영원의 강에 혼령들이 갇힌 뒤로는 못 만난 인간인데 상당한 실력자네. 시대 전쟁이라고 전 대륙을 뒤덮었던 전쟁에서 나랑 함께 싸웠던 인간이야. 내가 디원에게 창술과 도끼를 가르쳐 놨으니 그 인간한텐 강령술에 관한 걸 배우게.
이차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강령술을 배울 수가 있다니.
“그분을 어디서 만날 수 있죠?”
그한테 강령술을 배워 더욱 강력해질 생각에 이차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네랑 같이 있는 놈들을 따라가면 될 걸세.
“카르틴 왕국 기사들이요?”
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그놈들이 누명을 씌워 죽였거든.
그래서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었군.
“그분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라프텔. 라프텔이네.
‘라프텔?’
이차원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라프텔이 맞는지 고민하였다.
라프텔은 모든 교본과 마법 기술을 만들었다고 불리는 여자로, 마녀로 타락해 처형당했다는 말이 NPC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었다. 차원이 게임 플레이어 시절, 마녀의 마법 교본에 나오는 것이라며, 너만 몰래 가르쳐주는 것이라며 차원에게 입을 놀렸던 NPC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게임 설정 속 가상의 인물들이 귀신으로 존재한다고?’
이차원은 디원의 잠재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귀신을 본다는 건 숨어 있는 설정, 전설의 NPC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거 엄청난 능력인데.’
이차원은 점차적으로 디원의 잠재력에 감탄하는데, 출항 준비를 마친 카르틴 왕국 기사들이 신호를 보냈다.
-출항 준비 끝났습니다!
***
차원은 라이텔의 뿔로 만든 배에 오르자 배는 곧장 영원의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에는 별의별 귀신들이 다 나타나며 이차원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들은 자신이 보이는 디원에게 이때다 싶어서 자신의 한을 풀기 시작했다. 이차원은 듣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간신히 무시해대었다. 이 대륙을 건너가려다 죽은 귀신들, 또는 카릴리아 대륙에서 시작의 대륙으로 건너오려다 죽은 귀신들 등 각자 사연도 다양했다.
‘꽤 강력한 기사들도 보이는군.’
라프텔처럼 NPC들에게도 들어봤던 이름의 마법사나 기사들도 그의 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차원은 그들이 그들인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다른 귀신들보다 강해 보여서 시선을 끌 뿐이었다.
-시작의 대륙에서 왔네. 나도 그곳에서 왔는데... 같은 고향 사람이니 말도 잘 통할 거야.
나랑 여기 살자. 응?
귀신들은 이차원에게 온갖 유혹을 해대었다. 이차원이 이 중 제일 강해 보여서 그만을 유혹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이차원만이 귀신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일행들의 시야에는 그저 거대한 강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도 만약 귀신들을 볼 수 있었다면, 정신이 왔다갔다 했을 거고, 이미 홀려서 탈주하는 인원들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차원에게는 이들의 유혹이 통할 리 없었다. 왜냐면 그는 이미 충분히 고난을 이겨낼 준비가 완벽했고, 앞으로 나아갈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평생 경험하지 못한 쾌락을 선물해줄게요. 내 손을 잡아요. 내 손을 잡으면 알게 될 거예요. 어서요.
정말이지, 이게 바로 아까 하원이 말했던 물귀신 작전이었구나. 이차원은 이들의 유혹이 달콤함을 지나쳐 이미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들려왔다. 이들에게 검만 먹혀 들어갔었으면 주변인들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모조리 처리해버렸을 텐데.
이차원으로선 그 점이 제일 아쉬웠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귀 아픈 이들을 떼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귀신들의 유혹에도 다른 쪽으로써 침착함을 유지하는 이차원은 앞길에 집중을 쏟아부었다.
-여기 강인 거 맞죠? 물살이 왜 이렇게 파도 같아요.
-다른 배를 타고 왔다면 이미 난파되었을 거 같은데.
렌더와 울프릭의 대화가 들려왔다. 확실히 강치고는 물살이 매우 거칠었다. 이래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강을 벗어나는 건 힘들겠는데. 그때, 이차원은 강물의 거센 흐름을 보고는 무언가 수상함을 느꼈다.
“확실히 이런 거센 물살은 강에서 보기 드물어. 그렇다면... 역시 써펜트를 만나겠군.”
써펜트는 심해형 몬스터로, 깊은 강바닥에 살고 있는 몬스터다. 다크혼 세계관에서 덩치로 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며, 흰수염고래를 닮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만큼 모습이 거대하고, 매우 흉포하게 생긴 처리하기 힘든 몬스터였다.
거기다가 이빨은 어찌나 아주 날카로운지, 그것의 이빨은 잘 다듬기만 하면 검으로도 만들어져 팔리곤 하였다. 그것은 입을 거대하게 벌려, 이곳을 지나는 모험가들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리는 몬스터로 잘 알려져 있었다.
추가로 설명하자면, 써펜트가 배를 부숴버리면, 이 강 도처에 깔려 있는 ‘피라’라는 물고기 몬스터가 살점을 무자비하게 뜯어먹기도 하였다.
-써펜트라뇨. 재수 없는 소리 마십쇼.
그리고 써펜트란 말을 들은 기사단장은 이차원 말을 가볍게 웃으며 넘어가려 하였다. 몸집이 거대한 만큼 만나기도 힘든 몬스터인데... 진짜 이 앞에 나타날 리가...
쿠웨에엑!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써펜트가 나타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