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왕좌에 앉은 카릴 요스 4세, 카릴의 왕이 이차원 일행을 흥미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대륙에 소문이 자자한 이차원 일행이 전쟁을 끝내준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 왕은 자신에게 득이 되고도 남을 제안인데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또냐, 라는 귀찮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대들이 처음은 아닙니다.
왕이 뱉은 첫마디에 이차원 일행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온 대륙에 강하다 소문난 영웅들이 전쟁을 막겠다고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왕은 씁쓸하게 웃으며 뒤를 이었다.
“모두 실종됐습니다. 막대한 공을 남겨 보상을 하고 싶어도 죄다 사라져버리니…”
카릴 왕국의 자원은 다른 대륙의 영웅들이 탐낼 정도로 많았고 지금까지 많은 영웅들이 이곳을 찾아왔으나 실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은 전쟁을 막겠다고 찾아온 이차원 일행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왕의 말을 들은 이차원은 조금 의아해하였다. 그 역시 이 내용을 처음 듣는 눈치였다.
‘그런 시나리오가 있었나. 영웅들이 사라진다고?’
게임을 할 땐, 그냥 용을 끌고 와서 다 죽였었고, 무력으로 저 왕국을 제압했던 터라 자세히 알지는 않은 차원이었다. 애초에 아르덴이 말하는 것들을 모두 Skip 버튼을 눌렀었으니까.
이차원은 의아함을 가지고 있는데 안정의 종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종소리는 멀리까지 잘 들리고 시끄러움 속에서도 마음을 울릴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한 소리를 내었다.
-이 종소릴 참 오랜만에 듣습니다.
안정의 종은 카릴 왕국 중심부에 있는 평화의 성당에 설치된 종으로 전쟁이 잠시 휴전상태가 됐을 때 울린다. 종 소릴 들으면 영약의 효과처럼 사람들이 안정을 취할 수 있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질 좋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이차원 일행 덕분에 그 종이 울린 것이다. 조금 전 코웰의 가시들이 폭격을 날려 생긴 일이었다. 적들은 차원의 전력에 충격을 먹었는지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이 종소리야말로 아직 우리 왕국이 건재한 이유기도 합니다.
왕의 말처럼 카릴 왕국이 장시간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종이 있어 효율적인 휴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약은 소모되지만, 종을 울리는 것은 어떠한 것도 소모되지 않았으니까. 또한 이 종소리야말로 이차원이 이곳에 온 이유기도 했다. 역시나 이차원은 이번에도 앞뒤 가르지 않고 본론을 바로 꺼내들었다.
“안정의 종을 갖고 싶습니다.”
이차원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왕이 분명 좀 전까지 종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였는데 그걸 단번에 무시한 발언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잘 못 들은 거겠죠.
왕은 재차 물었다. 그러나 이번 물음에는 화가 굉장히 압축되어 있는 말투가 담겨있었다.
“당장 달라는 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면 주시죠.”
이차원은 분노한 왕과 다르게 너무나 평온하게 대답하였다.
“전쟁이 끝나면 달란 말을 100년이 넘게 지속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요?”
왕의 비꼬는 듯한 물음에 이차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왕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차원 일행이 들고 있는 총으로 향하였다.
-대체 그 총이라는 장비가 뭐길래 이리도 호언장담을 하십니까?
“최상급 에인 결정을 탄환으로 만들어 쏠 수 있는 장치입니다. 파괴력은, 아까 보셨으니 따로 설명할 필요 없겠군요.”
-그 총만으로 전쟁을 멈출 수 있단 겁니까?
“이게 다가 아닙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SUV와 버스의 속도는 마차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고 내구성 또한 성벽을 뚫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차원이 하나하나 설명해주자 왕은 어느새 고갤 끄덕이며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이차원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의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같은 조건을 걸었던 영웅들과 비교해봤을 때, 다른 기운을 느끼는 왕이었다. 그리고 왕의 표정만으로 협상이 자신 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간파한 이차원은 쉬지 않고 조건을 하나 더 내걸었다.
“전쟁은 확실하게 끝내드릴 테니 종뿐만 아니라 왕국에 매장된 타파이트와 미스릴을 가져가게 해주십쇼. 제약 없이.”
이차원 말에 함께 있던 신하들이 그건 너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왕을 쳐다보았다. 신하들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신들 왕국의 존재인 종을 달라는 것도 모자라 자원까지 내놓으라 하다니. 그것만으로 이미 막대한 손실이었다. 왕은 일단 이차원에게 물었다.
-전쟁을 끝내지 못할 경우는?
“빈손이 되겠죠. 우리도 카릴 왕국도.”
이차원의 말대로 앞으로 전쟁이 계속된다면 쌓아 놓은 재화는 계속 소비될 거였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지 못하면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니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왕은 잠시 고심을 하더니 명을 내렸다.
-허락하겠소.
***
전쟁터는 이미 차원의 일행으로 인해 에인 결정 총으로 쑥대밭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전보다 잠잠했고 각 진영에서 저마다 병력을 재정비 중에 있었다. 이차원은 전보다 잠잠해진 전쟁터를 보며 스킬 포세이돈을 사용하자 돌풍과 물보라가 일어나고 전쟁터는 다시금 혼란스러워 졌다.
-아니 대체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물보라라니...!
-당황하지 말고 고삐를 단단히 쥐어라!
바다와 물은 이 왕국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공격인만큼 그들은 더욱 당황했다. 마찬가지로 놀란 말들도 여기저기를 날뛰었다. 뿐만 아니다. 휴식을 취하던 천막도 날아가 버린 상태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협상은? 잘 끝났고?
이제야 기절에서 깨어난 울프릭이 물었다. 울프릭은 차원이 빙의한 동안 기억이 잃었기 때문에 협상 결과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제 전쟁만 끝내면 돼.”
자신 있게 그 말을 하며 울프릭을 쳐다보는데 울프릭은 눈치 빠르게 되물었다.
-또 빌려달라고?
이차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울프릭은 눈을 감고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행동했다. 이차원은 그렇게 다시 [빙의]를 시도했다. 울프릭은 이제 이차원이 빙의하는 동안 기억을 잃는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잘 해결해 갈 테니까. 그런데 그때 카릴 왕국의 B급 기사 아르덴이 울프릭으로 빙의한 이차원을 찾아왔다.
-저놈들이 지금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건 처음 봅니다. 물보라 공격이라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르덴은 확실히 이전 영웅들과 다른 느낌의 이차원에게 감탄하며 말하다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아르덴: 그래도 부디 몸조심 하십쇼. 실종된 영웅들도 지금처럼 승기를 잡다가 사라졌습니다.
실종된 영웅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이차원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아르덴의 말에 이차원도 방금 전 왕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실종이라…’
확실히 자신이 알던 시나리오가 아닌 만큼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르만이 남자 하나를 포박해서 이차원 앞에 무릎 꿇리게 하였다. 그 남자는 억지로 눈물을 흘려가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잠깐 전쟁이 멈춘 사이에 성벽을 넘어와 여자를 겁탈하려던 잡니다.
-종종 있는 일입니다. 지금 라돈 왕국에 있는 세력들 대부분이 도적과 해적 세력들이거든요.
지금 라돈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사실상 대부분 카릴 왕국의 자원을 노리는 도적집단이거나 왕국을 만들려는 해적 세력들이었지 라돈 왕국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한탕을 노려 부자가 되려 했던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재력이 있는 왕국 사람들은 굳이 목숨을 버려가며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반면, 그걸 노린 도적들은 막상 꽤 치열해지니 엄한 짓이라도 하려고 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끌려온 이 자도 파렴치한 도적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차원은 이런 자들도 하나하나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를 지나쳐 코웰에게 다가갔다. 아르만으로부터 칼을 꺼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동시에 살려달라는 남자의 비명도 사그라들었다.
“시작하죠.”
이차원의 말에 코웰이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돌격!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최상급 에인 결정들이 박힌 총을 들고 돌격하는 기사들과 코웰이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적군이 죽어 나갔고 거기에 더해 데린의 메테오까지 떨어지니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때 적군이 홀로 단검을 들고 싸우는 코웰을 둘러싸고 집중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각종 적군들이 칼이며 창이며 꺼내들고 무작정 달려든 것이다. 코웰은 단검을 치켜세우고 [은빛 조각]을 사용하며 적군과 대립하고 있었다. 역시나 코웰을 막을 적군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전은 인해전술이었다. 언젠가 코웰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단장님을 엄호해라!
아르만의 우렁찬 말에 총을 든 기사들이 코웰을 둘러싼 적군을 총으로 쏘며 코웰을 엄호했다. 이제 그들은 검보다 총이 편한 듯 자유자재로 총을 쏴대었다. 그리고 울프릭 몸으로 들어간 이차원도 심판자의 검을 휘두르며 앞길을 막는 병사들을 빠르게 처리해갔다. 기사들의 총은 적군들의 몸을 관통해가며 구멍을 뚫어갔다. 적들은 서로의 몸을 방패처럼 사용하듯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총알이 그들을 같이 뚫어버렸기에 오히려 더 편했다. 이차원도 마찬가지였다. 검을 휘두르며 십자가를 떨어뜨리자 적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팔과 다리들이 허공에 날아다녔고 고통에 찌든 소리들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바닥은 어느새 피와 모래가 섞여 지점토같이 되어 있었고 무기를 놓친 적군들은 뭉쳐진 흙들을 집어 던지며 발악을 하였다. 하지만 멀리서 총이며 십자가를 날리는 탓에 무용지물이었다. 그렇게 이차원 일행은 순식간에 성벽입구에 도착을 하였다. 아르덴은 이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라돈 왕국의 성벽을 넘은 건 25년만입니다.
“잠깐 숨 좀 고르죠.”
이차원은 혹시 모를 잠복을 생각하고 성벽의 기운을 느꼈다. 뭔가 마나를 쓰는 사람의 기운, 강한 기운이 느껴져 온 것이다. 마침 울프릭에 빙의되어 있던 차원이라 기운을 잘 느껴졌는지 확실히 저 멀리서 어떤 기운이 멀어지는 것을 알아챘다. 수상함을 느낀 차원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차원은 자신을 감싸오던 수상함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채었다.
“렌더.”
차원이 곧장 현장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바깥은 그저 붉게 물들어있는 동산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