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채찍을 맞으며 걷던 그들은 마침내 제단 앞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모두 정렬!
제단에 도착한 사람들은 명령에 따르는 척 그 앞에 나란히 정렬하고 섰다. 먼 거리를 채찍을 맞으며 달려왔지만 정신력 하나로 모두 견뎌내었다. 거기에 아직까지도 영약을 먹은 것처럼 행동하는 타무즈 국민들이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더 강한 민족이었다.
‘코웰이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한 국민들이야.’
이차원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새삼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코웰과 데린은 없었다. 그들은 나중에 나올 타이밍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울프릭은 올 때가 됐는데.’
에렌 게티왕과 울프릭은 때를 맞춰서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게 뻔하였다. 에렌 게티는 자신의 국민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눈물을 흘리고도 남을 사람이다. 호감도를 얻는 건 어려울 게 없었다. 물론 호감도를 얻기 위해 이들을 이용하는 건 아니다.
이 사건이 끝나고 에렌 게티에게 [빙의]할 수 있게 되면, 그가 가진 무력들을 얻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차원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나 강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호감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리지를 상대하기에 더욱 쉬워진다.
그런데 그 순간 이차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리지는 지금 저 멀리에서 대악마에 관련한 아이템을 합성, 제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아이템은 모두 흑마법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리지에게 아예 빙의를 해버리는 것도 괜찮지.’
뿐만 아니라, 리지 자체도 자신의 빙의 캐릭터 중 한 명으로 삼아버릴까 생각 중하였다. 죽이는 것보다 앞으로, 현실 세계에서는 계속 헌터로 살아갈 차원으로 생각했을 때, 게임 속 세계의 아주 강한 캐릭터를 굳이 죽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데린보다 강하다 장담할 수 없지만 성장 속도는 무시 못 하겠지.’
리지의 현재 마법력이 데린보다 강하리라고 장담은 하지 못했다. 서로 다루는 마법이 달랐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리지의 성장속도가 엄청나다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살려두는 편이 나을지도.’
이차원은 각종 생각을 하며 저 멀리 리지를 바라보았다. 리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대악마를 불러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였다. 리지가 다가간 곳은 거대한 석관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자물쇠와 같은 잠금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리지는 장치를 열기 위한 재료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열쇠를 만들어내었다.
그런데 리지가 만들어낸 열쇠는 이차원이 보통 알고 있는 열쇠와는 전혀 달랐다. 툭 튀어나온 부분이 사방팔방 튀어나와 있었고, 모양도 일자가 아닌 덩굴처럼 이리저리 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열쇠를 사용해 석관을 열자 엄청난 악취가 올라왔다. 근처에 있는 그녀의 부하들 모가두 코를 부여잡을 정도였다.
그러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리지는 그저 입가를 위로 슬며시 올리고만 있었다, 이어서 제단에 도착한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더니 부하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시작해라.
리지의 말에 절대복종하듯 용병들이 동시에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뽑아라.
이차원이 용병단을 지켜보는데 각각 사람들의 앞에서 단검과 순대와 같은 긴 호스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하려는 짓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제단에 모인 사람들의 피를 뽑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곳에 약 오백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있다. 그들의 모든 피가 필요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양을 바쳐야 되는 모양이었다.
용병들은 연기를 하고 있는 주민들의 앞에 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굉장히 무서워 할 법한데, 그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둘곧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이차원 일행을 온전히 믿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차원이 빙의한 사람의 앞에도, 리지의 용병단이 섰다.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리지는 주문을 외우는 중이었다.
‘아텔레케 콩글레.’
흑마법 언어이다. 이차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해석하자면 ‘대악마에게 제물을 바쳐 그의 부활을 꿈꾸나이다’를 뜻하는 말이었다. 리지는 평온하게 대악마를 소환할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용병들은 주민들과 이차원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칼을 있는 힘껏 쥐어 들며 휘둘렀다.
-크헉!
어디선가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리지를 포함한 용병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리지는 주문을 외우는 걸 멈췄고 용병들은 하늘에 칼을 치켜세우며 굳어버렸다. 그 이유는 바로 이차원이 자신의 앞에 있는 용병의 목에 칼을 꽂아 넣은 것이었다.
리지의 주문이 외우기 무섭게 이차원은 자신의 앞에 있는 용병 목에 칼을 꽂고는 용병의 손에 들려있는 호스를 그 용병의 목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이제 연극은 끝이다. 그동안 재밌었지?”
마을 주민들이 그 말을 신호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
이차원의 행동이 시발탄이라도 되듯, 제단에 서있던 타무스 국민들 모두 단검을 꺼내더니 차원과 똑같이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피를 뽑으려 했던 리지의 용병단에 칼을 꽂아 넣었다.
-크헉.
여기저기서 주민들이 아닌 용병단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단은 곧장 아수라장이 되며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리지의 용병단은 이 상황을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채 당하고만 있었다.
-이게 뭐야.
리지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 그녀 앞에 죽은 용병단의 시신 한 구가 넘어졌다. 제물로 바칠, 무력의 영약을 먹은 사람들이 다들 단검을 들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타무스의 국민처럼 매우 격렬하게 싸워가는 모습까지 보이니 미칠듯한 풍경이었다. 주민들은 여럿이 달려들어 용병단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채찍으로 때릴 때 기분 좋았지?
마을 주민들은 서로 각자 신체부위 하나씩 잡았다. 그리고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이 그들의 몸에 칼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코웰에게 특훈을 받고 자란 국민들인지 칼 다루는 솜씨가 일반 모험가들보다 차원이 달랐다. 급소만 정확히 노려 빠르게 처리해 나간 것이다.
이런 모습에 리지가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옆에 있던 레이큰을 노려보았다. 레이큰은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부, 분명 제대로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 말 따위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리지의 머리를 짓밟아 누른 이차원 일행과 마을 주민들의 승리였다. 리지는 도저히 자신이 졌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체 어떤 새끼들이...!
울프릭을 도와주는 세력, 그리고 지금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누군지 소리를 지르려 하였다. 순간 그녀의 눈에 익숙한 검이 빛을 발하며 들어왔다.
-저건 분명히...
리지의 눈에 들어온 검은 분명 울프릭이 쓰던 검과 비슷한 거였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판박이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검을 능숙하게 다루며 싸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지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요정 놈이 빙의를 할 수 있다 했지.’
그렇다면...
-저놈을 잡아! 빨리!
마침, 리지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차원과 눈이 마주쳤다.
“지겹다, 나도. 끝내자.”
이차원은 리지가 있는 곳에 독장판을 시전하였다. 거기에 추가로 슈퍼노바를 사용하였다. 십장 고블린을 잡을 때와 같은 수법이었다. 이차원에게 달려들던 용병단은 슈퍼노바 스킬에 얼어붙고 사제단까지 얼어붙었다.
-젠장!
이차원은 바로 리지와 레이큰을 향해 달려들었다. 레이큰은 빠르게 공격 태세를 갖추어 들려 하였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 있던 이차원이 그들 앞에 나타난 건 순식간이었다.
“이렇게 만난 건 처음이지.”
이차원은 바로 검을 휘둘렀다. 레이큰은 막지도 못한 채 공격에 맞고 날아가듯 뒤로 굴러떨어졌다.
이에 리지가 정신을 차리고 메테오와 얼음 기둥을 세우며 이차원과 타무스 국민을 압박하였다. 열심히 싸우던 국민들 앞으로 거대한 메테오가 떨어지며 얼음 기둥이 그들을 에워 쌓았다. 타무스 왕국의 국민들이 강한 축에 속하더라도, 살육을 하는 것에 능한 마법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상황은 역전되는 듯 보였다.
-이대로 끝내버리겠다.
리지가 웃음을 지으며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때, 관광버스 12대가 빠른 속도로 도착하면서 용병단을 쳐버렸다.
웃고 있던 리지의 표정이 다시 싸늘하게 굳는다.
-저건 뭐야 또.
리지 휘하에 있는 병력들은 아연실색하였다. 하지만 아직 놀랄 일은 더 남았다. 버스에서는 코웰과 데린, 그리고 에렌 게티 국왕이 내리더니 그렉과 모리슨 등 차원과 울프릭이 여태까지 지나쳐왔던 왕국들의 국왕과 정에 병력들까지 차례로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차원도 잠깐 당황하여 헛웃음을 지었다.
‘제법인데?’
저건 차원도 생각지 못했던 거다. 힘이 보통이 아닌 데린과 코웰은 애초에 이 행렬에 낄 수가 없으니, 2차로 등장하는 것으로 정해졌던 바다. 그동안 주변 왕국에 도움을 요청해 추가 병력을 데려오려 했었는데, 이렇게 올 거라고는 몰랐다.
-돌격!
게티의 외침에 모든 병력들이 리지의 군대를 향해 돌격하였다.
***
리지의 용병단과 사제단은 이미 먼 길을 걸어왔고, 제물들, 즉 타무스 국민들을 이끄느라 많은 체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게다가, 기습 공격에 의한 충격으로 정신이 없는 상태다. 겨우겨우 정예 용병대와 리지, 레이큰 등이 승기를 휘어잡으려 했는데, 웬 관광버스가 들어오더니 더 강한 전투 병력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병력을 닥치는 대로 썰어버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용병단의 신체부위들이 이곳저곳 흩날리며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 병력들 중 하나인 울프릭. 울프릭은 제단 앞에 서 있는 리지를 발견하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레이큰이 울프릭 앞을 막아섰다.
-나부터 상대해야 할 거다.
기세 좋게 울프릭에게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옆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네 상대는 나야.
어느새 나타난 코웰이 지원 사격을 나섰다. 울프릭은 코웰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리지를 향해 달려갔다.
모든 순간이 당황스러운 리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신의 모든 병력들이 죽었고 앞에선 자신을 죽이겠다고 울프릭이 달려들었고, 뒤로는 이차원이 달려드는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심판의 검이 앞뒤로 달려오고 있었다.
-제기랄.
리지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사람들도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저 마녀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다시 승기가 차원 쪽으로 기울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원에겐 글귀로 보였다.
[ …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
…
[ … 빙의할 수 있습니다. ]
…
[ 론다로의 (R)스킬 약한 바람.Lv1을 획득했습니다! ]
……
[ 구넌의 (R)스킬 스피릿.Lv1을 획득했습니다! ]
수십 개의 스킬과 빙의 가능 문구. 이렇게 스킬을 빠르게 습득하는 헌터는 이차원이 유일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