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리지는 이미 무력 영약의 제조를 끝마치고 계획대로 디즌 왕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욕망을 쥐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력 영약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수십의 용병단을 더 끌어모았고, 리지 자신도 무력적으로 이전보다 강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마법력 역시 증가했는데 일반적인 마법이 아닌 흑마법인지라 그 파괴력이 더욱 강력하였다.
‘알이 하나 더 있었단 말이지?’
게티의 눈과 귀를 통해 울프릭의 얘길 들은 리지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울프릭의 어릴 적 기억에 남아있는 리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물의 모습이었다.
‘대악마를 깨우는 걸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가장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는 리지는 한쪽으론 게티의 시선으로 울프릭의 행방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게티의 시야에 들어온 울프릭은 묵묵히 알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게티를 힐끗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숨기듯 시선을 돌리도록 하지도 않았다. 리지는 그런 울프릭의 모습에 반신반의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확신이 안 서니.’
울프릭의 계획이 자신에게 던진 함정인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리지 역시 성급히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한 리지는 울프릭의 도착지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였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게티의 시야를 통해 리지의 눈에 보인 풍경이 있었다. 그 풍경에 리지는 중얼거렸다.
-크라투반 정글?
울프릭은 에렌 게티를 이끌며 단둘이서 리바이온이 살고있는 크라투반 정글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울프릭의 도착지를 깨달은 리지는 생각했다.
‘저기서 하칸의 알을 얻었고, 하나를 더 발견했다고?’
저곳에서 드래곤 알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은 리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울프릭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믿기지가 않았다.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거늘... 리지가 자신의 옆에서 말을 느긋하게 타고 있는 충신 레이큰을 불러 세웠다. 레이큰은 충심을 다지듯 깍듯이 모셨다.
-계획을 변경한다. 드래곤의 알이 발견됐어. 계획을 미루더라도 알을 갖겠어.
-명 받들겠습니다.
-크라투반 정글로 사람을 보내. 울프릭과 왕 단 두 명이니 많이 보낼 필요는 없다.
레이큰은 리지의 명을 받들고 손짓하자 11명의 용병대가 말을 끌고 무리에서 이탈하였다. 그들이 정글로 향하기 전에 리지가 그들에게 한 가지 충고를 더하였다.
-오빠는 살려둬. 할 얘기가 많으니까.
레이큰이 그 말을 듣자 멀어져가는 용병대를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는 마치 맹수의 포효와도 같았다.
-울프릭은 살려둬라!
용병대에서 거센 기합소리가 울리더니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국민들을 바꾸자고?
코케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하나같이 다 똑같은 반응들이었다. 이차원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타무즈 국민들에게 영약을 먹여 놨으니 그들이 디즌 국민을 대신해 싸우기만 하면 됩니다.”
-무작정 싸울 건 아니고 영약에 취한 척 행동하다가 방심한 틈에 습격을 할 생각입니다.
코케 왕과 친분이 있는 코웰이 이차원 옆에서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러나 코케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코케는 신하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답신이 없느냐?
-예. 자리를 비우신 것 같습니다.
코케는 아까 전부터 에렌 게티에게 연락 구슬을 통해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허나 에렌 게티는 당연히 자리에 없었다. 코케는 이들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은 듯 보였다. 갑자기 찾아와 마을이 위험하다며 온 국민을 바꾸자고 하다니, 시답지도 않은 얘기다.
대악마는 이미 오래전 봉인이 됐고 이것을 깨우는 것은 강력한 흑마법을 손에 넣지 않는 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국민을 바꾸자니? 그 정도 모험을 하기 위해선 더 큰 확신과 증거가 필요했다.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는데...’
그러나 막상 그들의 말을 무시하자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이 너무 컸다. 그들은 모두 영웅이라 칭송받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이곳까지 와서 굳이 거짓을 고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코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그동안 조용히 있던 렌더가 쭈뼛쭈뼛 걸어 나섰다. 렌더는 그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렌더의 손에 들린 것은 바로 흑마법에 걸린 인형이었다. 코케는 그 인형을 보자 매우 놀란 눈치를 보였다. 그의 눈앞에 누군가 흑마법을 사용했던 흔적이 대놓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코케는 목청부터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이건...
-흑마법에 걸린 인형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친동생 리지의 짓이기 때문에 그동안 조용히 있었던 울프릭이 나섰다. 울프릭은 비록 자신의 여동생일지라도 지금부턴 어떻게든 막아야 된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분노로 침식된 감정을 누르는 듯한 억양으로 말했다.
-그 인형에 저주를 건 사람은 제 여동생입니다.
울프릭은 이실직고를 하였다. 코케는 그 내용에 더욱 놀랐다.
-뭐라?
-전 사라진 동생을 쫓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리지가, 제 친동생이 대악마를 깨우려는 정황들을 제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럴 수가...
코케는 큰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영웅이라 불리던 인물의 가족이 이런 일을 꾸미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곳 디즌 왕국의 시민들을 대악마에게 바칠 제물로 사용할 겁니다.
-감히... 7성군의 나라를 노린단 거지...!
평화와 풍요로움의 상징인 나라를 이끄는 코케 왕에게 이 사실은 청천벽력이었다. 디즌 왕국은 대륙을 통치하는 7성군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나라다. 이 나라가 평화로웠던 이유도 그들의 권세가 무섭기 때문인데 정말로 누군가가 자신의 나라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더 최악인 것은 그 누군가가 대악마와 관계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평화로운 나라에 어울리게 평화로운 왕의 모습으로 있던 코케는 누구보다 크게 격노하였다. 숲속에서 새들이 다 같이 하늘로 날아들었다. 무서운 기가 저곳까지 흘러가는 듯했다. 그는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더니 검을 꺼내 들었다. 그의 평소 모습과 정반대되어 보이는 날카롭게 날이 선 기다란 검이었다. 코케는 금방이라도 처단하려는 듯이 얼굴이 붉어졌다.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당장은 참으셔야 합니다. 계획을 안다는 걸 저들에게 들키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니까요.”
이차원이 코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코케는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없자 이를 바득 갈며 다시 자리에 소리 나게 주저앉았다. 코케는 역경을 참을 수 없는지 이차원의 말도 안 되는 계획에 화를 내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이 많은 국민들을 옮긴단 말인가!
그러자 이차원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이미 코케를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이다. 코웰이 대표로 나서며 말을 전했다.
-요정은 못 하는 게 없습니다, 폐하.
-요정?
코케는 아직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코웰의 말과 동시에 다급하게 신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 폐하! 왕국에, 왕국에 글쎄. 아니 이건,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 합니다!
신하의 얼굴이 코케와는 반대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차원 일행은 앞장서며 코케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코케는 신하와 이차원 일행을 따라나섰다. 그러자 코케의 몸이 쭈뼛해졌다. 그의 앞에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왕국으로 줄줄이 입장하는 관광버스의 모습이 동공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저게...!
이벤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차원과 울프릭은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
어느 때보다 거센 경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나팔을 불자, 왕국 전체에 소리가 퍼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비상경보로, 외부 침입자가 발생했으니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는 것임을 알리는 소리였다.
-전투를 준비하라!
타무즈 왕국 국민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전투를 할 줄 알았다. 다들 어렸을 때부터 전투에 특기 하나씩을 만들었고 집엔 전투를 대비하여 항상 무기가 준비돼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마을인 줄 알았는데 굉장히 무서운 마을이었다. 경보가 울리자 저마다 무기를 가지고 집에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 사이로 코웰과 아르만이 함께 말을 타고 전투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나 둘러보는 중이었다. 원래 이런 훈련을 하면 기사들이 왕국을 돌며 제대로 준비태세가 갖춰져 있는지 둘러보는 게 이곳 세계의 정석이었다.
-역시. 타무스 왕국의 국민이다.
어떻게 하면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호전적일 수 있는지, 코웰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갔다. 아르만 역시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훈련인데도 평소보다 더 호전적인 것 같습니다.
원래도 단결력이 좋았는데 최근 리지의 세뇌 사건 이후 마을은 단결력이 더욱 좋아졌다. 이들도 세뇌 마법을 당했던 시민들의 기억이 점차 돌아왔고, 그게 리지라는 마녀 때문인 것을 알게 된 것이 불꽃을 일으켰다.
마을의 모든 시민들이 전투태세를 갖춘 것을 확인한 코웰은 기세 좋게 앞으로 나섰다. 이윽고 광장으로 모여든 시민군단에게 연설을 하며 사기를 더욱 증폭시켰다.
-마녀는 왕국 전체에 세뇌 마법을 걸었고 타무즈 왕국 전체를 농락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빼앗겼습니다. 우리는 우리답지 못했고 무기력했습니다.
코웰의 말에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굳은 표정으로 고갤 숙였다. 그 누구보다 강인한 국가의 시민들이 무기력하게 당했단 사실에 수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차원이라 불리는 요정이 우리의 정신을 깨웠습니다. 그는 마을 전체에 걸린 세뇌마법을 풀었으며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줬습니다. 지금 그가, 우리 타무즈 국민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시민들 모두 이제 이차원을 알고 있었고 리지가 무슨 계획을 세우려 하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거렸다.
-여러분. 우린 위대한 타무즈 국가의 국민들입니다. 우린 깨어났고 싸울 것이며 이길 겁니다. 우리에게 모욕을 준 그 마녀를 반드시 처단할 겁니다.
코웰의 말에 시민들 모두 동시에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치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들의 표정과 행동, 모두 비장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던 고양이마저 그들의 패기에 놀라 털을 곤두세울 거 같았다.
광장 바닥이 창 소리로 가득 채워지며 가장 용맹한 모습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때 저 멀리서 관광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타무즈 사람들에겐 처음 보는 물체였지만 트럭이라는 물체를 먼저 보았기에 낯선 물체는 아니었다. 관광버스는 타무즈 사람들의 의지를 보여주듯이 웅장한 몸체로 그들의 앞에 멈추었다. 실제로 보니 트럭보다 몇 배는 강해 보였다.
이윽고 버스에서 디즌 왕국의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대륙의 사람들이 함께하기로 한 것처럼. 디즌 마을의 사람들도 굳은 의지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긴말을 할 필요가 없다.
저 사람들이 전투와 싸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항상 평화롭게 살아왔다는 것을 아는 타무스 왕국 사람들 역시 알고 있었다. 디즌 마을의 사람들이 저런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을 보고, 이 상황이 모두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이렇게 거대한 왕국들의 사람들을 모두 통치하고 있는 이차원에 대해서도 시야가 다시 보였다.
그리고 모두가 다짐을 했다. 자신들을 건드린 것에게 해악을 내릴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