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새파란 하늘 위로 빛나는 해가 구름에 가려져 빛이 한줄기로 분산되었다. 이차원의 계획을 위해 울프릭은 곧장 왕과의 접견을 부탁하였다. 울프릭은 왕의 귀빈 대접을 받고 있는지라, 황실을 지키는 기사들이 곧장 통과시켜 주었다.
-충!
기사들은 그런 그들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기사들이 지키는 입구를 지나, 왕이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있던 왕, 에렌 게티가 환한 얼굴로 울프릭을 반겨주었다.
-어서 오시게, 왕국 생활은 어떤가? 불편한 건 없고?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게티는 울프릭의 만족스러운 답변에 길게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울프릭은 게티에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폐하. 은밀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한데 외람되지만 잠시 신하들을 물릴 수 있겠습니까?
울프릭의 말에 왕이 힐끔 옆에 서 있는 신하들을 보았다. 울프릭은 혹시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않았을지 떨려 하였다. 다행히 게티는 이차원 일행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기에 말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손짓하자 신하들이 물 빠지듯 빠르게 물러났다. 우선 안심이 된 울프릭이지만 이제부터가 본 게임 시작이다.
-무슨 얘기길래 이리 뜸을 들이는 게냐?
게티는 쉽게 말을 떼지 못하는 울프릭을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울프릭은 식은땀이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괜찮아, 잘 해낼 수 있어.’
울프릭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싶을 정도였다. 한 왕국의 왕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은 중죄이며 사형에 처 해질 수 있는 문제이다. 거기다 지금의 에렌 게티는 리지에 의해 조종당하는 중이다. 만약 왕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며 발각이라도 되면 이대로 모든 계획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었다.
‘울프릭, 이번이 마지막이야. 꼭 성공해야 돼.’
이곳에 오기 전 이차원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무조건 성공해야 해.’
울프릭은 결연한 표정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침착하자, 인간은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믿을 뿐이니까.
-드래곤의 알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울프릭 말에 왕의 표정이 호기심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의 눈망울에는 욕망이 가득히 채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정말이냐?
-드래곤 알이 두 개였지만 손이 부족하여 하나는 그곳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프릭은 거짓말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처음엔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말을 이어 나가면서 말끝은 흐렸지만 꽤나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울프릭이 떨리는 이유는 에렌 게티를 속이기 어려울 것 같아서도 있지만, 자신이 하는 말을 리지가 에렌 게티를 통해서 듣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거짓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너니까.’
여동생이 아닌, 이제 마녀라고도 불리는 그 여자가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불안함을 가진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더군다나 표정도 읽을 수가 없어 더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 계획의 승패 여부는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은 놓지 않았다. 울프릭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조금씩 나아갔다. 그때 날카로운 질문이 울프릭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사실을 이제 와 고하는 이유는 뭔가?
아직까진 울프릭의 말에 의심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해도 이 상황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울프릭은 게티가 지신을 괜히 엄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이 짋문이 나올 걸 예상해 울프릭은 이차원과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차분하게 말하였다.
-요정은 다시 늪으로 돌아가 알을 가져오자고 하지만 전 생각이 다릅니다.
-계속 얘기해 보거라.
게티는 시종일관 같은 자세를 취하였다. 울프릭은 흐르려 하는 식은땀을 온몸으로 막으려 애썼다.
-요정의 야망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의 드래곤 알을 얻었는데도 그는 또 하나의 알을 얻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건 세상을 통치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야망에서 오는 고통을 전, 더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울프릭은 부들거리며 진정성을 보여주듯하였다. 실제로 다른 의미로 떨리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모습은 본의 아니게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럼 요정과 갈라지면 그만인 것을 왜 나를 찾아온 겐가?
-전 타무즈 왕국이 좋습니다. 다른 왕국들보다 과학과 마도공학의 수준도 높고 사람들의 기본 전투력도 수준급이니까요. 거기다 오랜 기간 침략을 받지 않아 평화롭기도 하고요.
울프릭은 조심히 게티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게티는 울프릭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다행히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모양이다.
-그대가 뭘 좀 아는구만.
-하지만 최근 이곳에 메테오가 떨어졌고 마을은 큰 위기에 처할 뻔했습니다.
울프릭 말에 게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왕도 리지에 의해 생겨난 그 광경을 목격했으니 말이다. 가장 큰 재앙의 날이었다.
-그래서 전 이곳에 드래곤을 부화시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울프릭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왕의 표정이 금세 풀리며 안정시키듯 수염을 쓸어내렸다. 에렌 게티의 입장에선 이보다 고마운 게 없었다. 드래곤 알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 그 드래곤을 왕국의 수호신으로 키워보겠다는데. 더군다나 울프릭은 요정이라는 이차원과 왕국의 어려움들을 해결했던 신변이 확실한 사람이다.
-신하들을 물린 이유는 메테오를 떨어뜨린 남자가 외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보안을 지킬 필요가 있으니까요.
게티느 울프릭 말이 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술술 잘 풀려가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잘 풀려가는 탓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어느 때에 꼬투리를 잡고 반격해올지 예측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울프릭은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날짜와 시간을 정하시면 제가 직접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게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울프릭을 쳐다보았다. 잠깐의 침묵. 울프릭은 심장이 목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걸렸나? 아니야. 이대로 끝날 리가 없어.’
그리고 마침내 게티가 침묵을 깨고 말하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짓을 띄며 울프릭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대는 타무즈 왕국의 사람이다.
게티는 이제야 만족하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울프릭은 게티의 눈을 피해 한숨을 내뱉었다.
***
한편 데린은 관광버스가 다닐 길을 마법을 통해 모두 닦아 놓았다. 이들은 이차원에게 버스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길을 예쁘게 포장하는 법도 배웠다. 마차만 있는 이곳엔 울퉁불퉁한 길도 많았다. 그렇기에 마차가 절대 낼 수 없는 관광버스의 속도를 최대 이용하기 위해서 마법을 사용해 길을 아주 매끄럽게 닦아 놓은 것이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으니 어서 올라타세요.”
-이런 마차는 내 생에서 본 적이 없는걸.
이차원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마을버스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다. 실제 거리라면 80km의 거리를 반듯하게 만들어 놓았더니 속도감은 더욱 빨랐다.
-아르만, 더 빨리.
-예? 지금도 빠르지 않나요?
-아니야. 더 밟으라고. 더. 더. 더!
아르만이 운전대를 잡았고 코웰은 이런 속도는 인생 처음이라며 신나 하였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엄청난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하지만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은, 산뜻한 기분이 들어왔다.
-신기하지 말입니다. 마차보다 백 배는 빠른 것 같습니다.
-단장님! 여기선 찬 바람도 나옵니다.
다른 기사들도 마약을 먹은 것처럼 매우 들떠 있었다. 그 중 특히나 데린의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이런 속도로 달리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대체 무슨 마법인 거야? 요정 세계엔 이렇게 흔한 건가? 나도 알려줘. 알고 싶어. 나한테 알려줄 순 없는 거야?
데린이 흥분에서 이차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이차원은 괜히 뿌듯해져 콧대가 올라갔다.
“제가 사는 세계엔 이것보다 네 배 빠르고 몇 백명이서 탈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데린의 표정이 더욱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이 정도면 흥분을 넘어선 광기 수준이다.
[ 데린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
-정말이야? 나 그거 줘.
-당신은 뭘 줄 건데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교본과 스크롤을 줄게.
데린이 내뱉은 말에는 매우 가치가 있었다, 데린의 마법기술의 집대성을 알기에, 마음 같아선 정말 몇백 명에서 이 속도의 서너 배로 달리는 기구를 가져오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비행기였다. 차원이 현실에서도 잘 나간다고 하지만, 비행기를 통째로 여기에 넣는 것은 무리였다.
‘조작 방법도 모르고. 다른 걸 생각해 봐야겠어.’
일단 나중에 다른 문물로 데린의 물건들을 가져오겠노라 생각했다.
“아, 그나저나 울프릭은 잘 챙겨줬지?”
차원은 데린에게 미리 부탁해 놓은 것이 있었다. 울프릭이 에렌 게티와 리바이온이 있던 늪에 도착하면, 분명 리지가 보낸 용병단과 사제단도 그곳으로 올 테니 그에 대한 방어를 위한 준비를 부탁했던 것이다.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 약속은 잘 지킨다니까?
좋다. 만반의 준비를 시켜서 울프릭을 보낸 듯 해보였다.
-벌써 디즌 왕국이 보이는구만!
코웰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디즌 왕국이 도착하자 흥분해 소리쳤다. 코웰의 표정은 놀이기구를 타는 어린아이처럼 순박했다.
“멈춰요. 여기서부턴 걸어갑니다.”
디즌 왕국의 국왕을 만나기 전부터 저들을 놀라게 하면 안 되니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걷기로 하였다.
***
-전쟁이라도 났습니까?
경비대는 가깝지만은 않은 옆 왕국의 유명한 무력가들이 한꺼번에 오자 놀라서 물었다.
코웰과 데린 역시 이차원 일행처럼 그들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러니 경비대들이 수군거리는 건 당연했다. 애초에 디즌 왕국에 외부인이 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도 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힘을 가진 이들이 올 일은 더더욱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코웰님.
그때, 경비대들이 길을 터주더니 디즌 왕국의 경비대장 아던이 나타난다. 그는 코웰과 비슷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남자로 우락부락했다.
-이거, 이거 근육이 많이 죽었구만? 싸움은 지쳤다고 떠나더니 이래서 싸울 수나 있겠나?
코웰 말에 아던이 팔에 힘을 빡 주며 이를 악물고 대답하였다.
-하하. 제가 스승님을 이긴 건 까먹으셨나 봅니다?
-어쩌다 한 번 이긴 걸로 오래도 우려먹는구만. 사내놈이 그리 쪼잔하면 못 써.
코웰과 아던은 서로 보이지 않는 기를 뽐내며 몸에 힘을 주었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자 이차원이 껴들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끕시다.”
이제 진짜 시간이 없다. 지금쯤이면 리지가 무력 영약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무력 영약의 마지막 재료가 있는 코젠 마을은 이곳에서 체감상 350km의 거리인데. 금방 올 것만 같았다. 물론, 그들에겐 관광버스가 없겠지만. 아더는 이차원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코웰에게 물었다.
-급한 불이라뇨?
-국왕을 만나야 해. 그것도 최대한 빨리.
코웰의 진지한 말투에 아더가 신속히 왕에게 데리러 갔다.
-들라하라!
신하가 왕의 말을 크게 외쳐줬고, 그 소리에 일행들은 왕을 만나러 들어갈 수 있었다. 디즌 왕국의 국왕인, 코케가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그는 게티와는 달리 짧은 콧수염이 있고, 매우 신중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가까운 왕국의 영웅들이 무슨 일인가.
기쁜 표정으로 코케가 그들을 반겼다.
-코웰과 데린. 그대들만 세월이 비껴갔나 옛날 모습 그대로군.
그는 이 왕국에 평화가 찾아오기도 전에,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데린과 코웰도 알아보았다.
-아, 당신이 대륙 전체에 소문이 자자한 그 요정인가?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하였다.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그 말을 시작해야 될지 감도 잡지 못하였다. 허나, 차원은 타이밍을 잡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라가 곧 망할 겁니다.
첫인사라고는 할 수 없는 강렬한 말에 코케의 눈동자가 지진처럼 흔들리는 게 모두의 눈동자에 비추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