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차원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민들로부터 빠져나왔다.
‘호감도가 하나도 오르지 않은 것부터, 몬스터가 없는 것까지. 그리고 왕국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분위기까지 모든 게 다 이상해.’
이차원은 아까부터 뭔가 수상한 마을 분위기를 감지했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도 호감도가 오르지 않는 일로 이제 확신이 들었다.
‘안 온 게 아니라 왔다 간 거다.’
이차원은 분명 리지가 왔다 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공허하게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세뇌 마법이라도 당한 건가.’
리지가 왔다 갔다는 의심을 하고 나서야 보였으니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쳤다면 세뇌 마법에 당했다는 걸 몰랐을 거다.
‘생각한 것보다 수준급이다.’
이차원은 순간 두려움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까지 리지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이차원이 두려운 이유는 리지가 이 정도로 티가 나지 않을 정도의 마법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리지는 이미 대악마를 깨울 모든 준비를 마쳤을 확률이 아주 높아진 상태인 거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이차원은 어서 빨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직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울프릭과 대화를 나누었다.
“리지, 이미 왔다 갔어.”
-뭐?
울프릭 역시 믿기 힘들단 표정으로 되묻는다. 마을 분위기가 수상하긴 했지만 딱히 눈에 띌만한 이상한 점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뇌 마법을 걸어놨더라고. 마을 전체에.”
-리지가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구사한다고?
울프릭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이차원은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이차원이 그 증거를 댈 수는 없었지만 이차원의 말이라면 믿을 정도로 신뢰가 가능했다. 그 사실이 울프릭을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옥죄어 왔다.
-그래서 해결책이 뭐냐.
“여길 떠나 다음 목적지로 가는 게 최선이긴 한데.”
-그런데?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이차원은 막막함에 한숨을 뱉는다. 이차원은 진짜 어디로 향해야 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대악마를 깨우는 다음 재료는 여기서부터 순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차원도 정확히 알진 못했던 것이었다.
망치를 만든 다음, 대악마를 깨울 주문서를 찾으러 가는 시나리오, 주문서대로 마법을 구사할 마법 스태프를 얻으러 가는 시나리오. 대악마와 교환할 제물들을 얻으러 가는 시나리오 등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았고 리지가 어떤 것을 먼저 얻으러 갔을지 또한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뒤를 쫓는 건 답이 없어.’
이차원은 그들 스스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파악을 마치고 이차원은 바로 다른 방법이 있는지 머리를 굴렸다.
“일단 사람들 세뇌부터 깨우고 리지의 행방을 찾자.”
-그리고?
“미끼를 만들어서 함정을 파야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리지가 선택한 시나리오에 따라 그녀에게 필요한 물건을 미리 구해놓고, 함정을 만들기. 이것보다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
-그런데 왜 굳이 세뇌 마법까지 걸었을까요?
렌더는 이미 매듭을 구한 리지가 굳이 번거롭게 마법을 건 것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다. 울프릭은 자신의 여동생이 점점 심한 일을 해가고 있다는 것에 매우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이차원은 그런 울프릭의 상태를 조심히 관찰하였다. 그리고 살며시 렌더의 대답에 답변하였다.
“추적받는 것 자체가 불편했던 거지.”
이차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위협은 없었으니,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계속해서 격차를 벌리려는 것이 리지의 의도처럼 보였다. 마을을 소란스럽게 만들면 자신이 왔다 간 흔적을 남기게 되며 무슨 일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이유를 눈치챘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이차원 일행이 해 왔던 것처럼 미리 먼저 이동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그만큼 압박을 받는다는 의미기도 하고.”
즉 이차원의 존재에 리지도 위협을 느낀다는 거다.
-역시 저번에 내가 리지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어.
울프릭은 사원에서 리지의 악행을 잡을 수 있었지만 실패했던 일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크게 남아있었다. 물론 이차원도 그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지음은 우선 이 상황을 풀어서 리지에 대해 쫓아가는 게 최고의 방법이야.”
-세뇌를 푸는 방법은 알고?
다행히 그 부분은 이차원이 잘 알고 있었다. 세뇌 마법을 푸는 것은 다크혼에서 이용되는 마법 또는 스킬을 사용하는 것과 영약을 먹는 방법 두 가지가 있는데 타무즈 마을과 같은 경우에는 영약을 먹이는 것이 쉬웠다. 큰 줄기로 내려져 오는 라린 계곡의 물을 왕국 전체가 식수로 사용하니 영약을 계곡물에 타면 그만이니까.
“영약을 먹이면 쉬워.”
마법을 일일이 사용하기나, 사람들을 모으는 것보다, 영약 전체를 사람들에게 들이키게 하는 게 쉬웠다. 문제는 그 양을 어떻게 할 것이냐인데, 이차원에겐 복사스킬이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료는요?
“지옥 엉겅퀴, 덫의 꽃잎, 땅쥐의 수염. 세 개요.”
지능을 짧은 시간 동안 비약적으로 올려주는 영약을 만드는 재료인데 이것들 통해 세뇌 마법을 벗어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뇌 마법을 사용할 땐 지능이 높은 이들에겐 마나가 많이 드는 법이다.
“덫의 꽃잎은 내가 찾을 테니 나머진 둘이 알아서 찾아.”
이차원은 지옥 엉겅퀴와 땅쥐의 수염은 울프릭과 렌더에게 맡겨두었다. 현실에서도 나오는 덫의 꽃잎은 차원이 직접 얻어오기 위함이었다.
이차원이 재료를 찾기 위해 김역전을 비롯한 팀원에게 곧장 연락을 돌렸다.
“덫의 꽃 던전 싸우기 까다로울 텐데 준비도 없이 괜찮겠습니까?”
“속죄의 매듭이 있습니다. 오십여 개 정도.”
트럭을 주고 에렌 게티에게서 얻어 두었던 물건이다. 일단 비싼 값을 하는 물건인 것을 알기에 많이 받아두었다. 트럭값을 치른 것이었다. 트럭의 엔진이라던가 여러 기계적인 것들이, 마법을 활용하는 저 세상에서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가치를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시간 될 때 대장간 한 번 들려서 아이템도 다 털어와야겠어.’
이차원은 또한 게임 속 아이템을 현실에 가져올 생각을 가지며 덫의 꽃을 잡을 방법을 생각하였다.
덫의 꽃은 공격 패턴이 있었는데 이 또한 헌터가 되기 전, 게임으로 접했던 것이라 잘 알고 있었다. 덫의 꽃은 사람이 녹는 독을 내뿜는 꽃인데, 평소에 가만히 있다가 피식자가 나타나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펼치면서 독을 내뿜었다.
“매듭으로 주둥이를 빠르게 묶으면 간단합니다.”
이 생각은 차원이 플레이어 시절 울프릭이 차원에게 힌트를 줬던 것이다.
-속죄의 매듭으로 주둥이를 묶어!
지금은 온전히 울프릭이 차원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이전 생각을 하는 차원이다.
덫의 꽃 게이트에 보스몹은 덫의 넝쿨인데, 생김새부터 완전히 다른 놈이었다. 덫의 꽃을 말려 빻아 영약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보스의 몸도 영약에 높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다크혼에서는 덫의 넝쿨이라는 몬스터를 찾기가 어렵지만, 이곳에서는 덫의 꽃 게이트에만 들어가면 있으니, 이 재료를 차원이 구하기로 한 것이었다.
***
영약의 재료로 덫의 꽃이 쓰인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졌지만, 그만큼 덫의 꽃 게이트는 많이 열리는 게이트 중에 속했고 그렇게 강한 몬스터도 아니었다. 그리고 보스마저 힘없이 당하자 이차원 팀은 조금 서운해한다. 오랜만에 팀끼리만 뭉쳐서 시작한 게이트 사냥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쉬운 거 아니야?”
“그러게. 좀 시시하네.”
그리고 그런 시시한 게이트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보스몹도 아닌 이차원이었다.
“차원씨 주위엔 항상 사람이 많네요.”
사람들은 이차원의 등장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봤다. 매번 신선한 전투 방법을 구사한 차원이었으니까.
“이차원씨, 짧게 인터뷰 가능할까요?”
“이차원씨, 그 검이랑 같이 사진 한 번 찍어주시겠어요?”
여기저기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차원을 인터뷰하러 들었고 이차원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다. 말 그대로 어디서나 동경 받는 헌터였다.
그리고 특히나 이번 전투에 관심이 쏠린 건 이차원이 사용한 속죄의 매듭 때문이었다.
“속죄의 매듭으로 사냥하는 방법은 이차원씨가 개발한 건가요?”
“매듭당 팔 구백만 원 상당인 고가의 아이템으로 아는데 모두 직접 구매하신 건가요? 아니면 협찬?”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덫의 꽃의 꽃잎이 닫혔다 열리는 것을 막기 힘들어 그 독을 피하면서 사냥하는데, 차원의 사냥 방법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덫의 꽃이 오므려졌다가 독을 방출할 때에는 이미 꽃잎이 묶여 있었고, 지능이 없다 싶어 한 덫의 꽃은 원래의 본능에 의해 꽃잎이 닫힌 채로 계속 독을 내뿜었고 그렇게 차원팀은 손 안 쓰고 덫의 꽃을 모두 제압하였다.
“게이트 닫힙니다. 다들 나가시죠.”
그리고 이차원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그들을 지나쳐 게이트를 나간다. 보스몹을 잡은 이상 더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이차원은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자 울프릭과 렌더도 이미 재료를 구해다 놓은 상태였다.
‘고생 꽤나 한 모양이네.’
이차원은 현실에 갔다 오기 전과 달리, 꼬질꼬질해진 울프릭과 렌더를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런데 울프릭이 이차원이 전해준 아이템을 보고 의아해하며 묻는다.
-덫의 꽃잎은 알겠는데 이건 뭐냐?
“꽃잎보다 강력한 덫의 넝쿨.”
-신기하네.
렌더와 울프릭은 처음 보는 넝쿨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말리는 동안 동선 좀 파악하자.”
이차원은 울프릭과 렌더를 데리고 물을 정수하는 시설로 향한다. 시설엔 그곳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기사단이 있었다.
-영광입니다. 이곳까지 행차를 다 하시고.
이미 이차원 일행에 대해 얘길 들은 기사단장 코웰이 그들을 친절하게 응대했다.
-장담컨대 우리 마을은 그 어떤 왕국보다 깨끗한 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사단장은 정수시설을 안내하며 호탕하게 말했다.
-고도화된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물을 생명이라 여기는 기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이차원이 코웰의 외견을 살펴보는데 딱 보기에도 무력이 매우 강해 보이는 근육질이고 정수시설에 대한 자부심도 높아 보였다. 그것으로 보아 순순히 영약을 타는 것을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약부터 먹여야겠군.’
이차원은 코웰을 제압하고 약을 먹여 세뇌를 푼 후에 마을 전체에 영약을 먹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지금 이 방법을 헤쳐나갈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