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오랜만에 재밌게 흘러가겠군.’
이차원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메두사의 위력을 보곤 정신을 바짝 차렸다. 메두사는 바닥을 기면서 재빨리 손톱을 휘둘렀다. 이것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공격 범위가 다양했기 때문에 어떤 공격을 해 올지 예측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격할 틈을 주지 않겠다 이건가?”
이차원은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메두사를 예의주시하였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박지원이 갑자기 정장 치마의 옆을 찢기 시작하였다.
“뭐 하는 겁니까?”
이차원은 놀란 마음에 당황하며 물었다. 이런 상황은 게임이나 영화에서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박지원은 어디선가 허벅지에 숨겨져 있던 너클을 꺼내 양손에 끼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싸우시게?”
“그럼요, 한 때 불법헌터 처리반에서도 있었는데.”
“헌터였어요?”
“그럼 일반인을 보좌관으로 붙여놨을 거라 생각했어요?”
박지원 말에 이차원은 바로 수긍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국가 소속 헌터에게 연간 나가는 돈이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이 나가고 전투로 인한 위험도 상당했다. 그러니 일반인을 보좌관으로 붙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위급상황만 더 초래하는 일이었다.
그 동안 보아왔던 이미지와는 달리 박지원도 꽤나 싸움을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자세부터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팔뚝에선 힘줄이 선명히 내다보였고 그 속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슬슬 몸 풀 때 됐다 싶었는데 잘됐네요.”
박지원이 목을 푸는데 우두둑, 소리가 울렸다. 이차원, 평소 자신을 대하던 상냥하고 부드러웠던 이미지와 영 딴판인 그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정말이지, 파도 파도 알 수 없는 양파보다 더한 존재였다. 이차원은 말을 한동안 잃고 있었다.
“...제가 제일 센 놈 지원씨가 나머지 두 놈 맡아요.”
“제일 센 놈, 제가 맡아도 되는데.”
매우 자신감 있는 말투였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여유와 욕망이 보였다. 마음속에서 많이 내포되고 있던 상태 같았다. 자기 혼자 메두사를 상대해도 상관없다는 걸 진심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어려운 일은 제가 할게요. 돈도 더 많이 받으니까.”
“타당하네요.”
이차원은 메두사를 향해 돌진하고 박지원은 나머지 두 양아치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차원은 곧장 독의 장판과 [슈퍼노바]를 동시에 시전하였다. 독의 장판을 사용해 메두사의 오른팔을 노렸다. 메두사는 당연하게 왼쪽으로 몸을 꺾으며 공격을 피하였다. 이차원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 [슈퍼노바]를 사용해 왼쪽으로 향하던 메두사를 향해 눈보라를 강하게 날렸다.
그러나 메두사는 연계공격을 해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꼬리를 이용해 거대한 돌을 움켜쥐더니 이차원을 향해 날렸다. 하지만 이차원이 한 수 더 빨랐다.
‘역시 그렇게 나올 줄 날았다.’
이차원은 [슈퍼노바]를 사용해 일부러 시야를 뺏은 거였다. 그리고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으니 반격해 올 걸 알고 있었다. 손을 이용하지 않고 꼬리를 사용해 반격해올 거란 건 예상 밖이었지만. 이차원은 날아오는 반격에 맞춰 몸을 피하더니 심판의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빛의 십자가가 메두사를 내려 찍었다.
그런데 메두사를 찍어내던 십자가는 이전 게임에서보다 더 거대하고 날카로웠다.
‘저번에 이어 이것도?’
이전에 게임 속에서 독의 장판을 사용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게임 속에서 쓰던 것보다 더한 위력을 뽐냈다.
“크흑....너 뭐야.”
메두사도 당황했다. 검의 위력이 생각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다행히 순간 몸을 틀어서 급소는 빗나갔지만 제대로 공격 당했으면 목숨이 위험했을 공격이다.
“겉으로 본 것보다 더 좋잖아? 저건 내가 꼭 가져야겠어.”
메두사가 그 와중에도 비릿하게 웃으며 이차원의 검을 탐내었다. 그 거만한 말투에 이차원은 본때를 보여주기로 하였다.
“그렇게 갖고 싶은 검으로 얼마든지 베어주지.”
이차원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날아오는 십자가에 메두사의 머리에 있는 독사 한 마리가 잘려나갔다.
하지만 메두사는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였다.
“그럴 자잘한 공격으로 응대하려 한 거냐? 네 검이 아깝다!”
메두사는 한 마리가 잘려나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광선을 쏘아대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새어 나온 빛은 닿는 것마다 모조리 녹이고 있었다. 하지만 차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그것을 피하였다.
이차원이 모든 공격을 피하자 메두사는 접근전을 시도하며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메두사는 열 손가락 모두가 어느새 독사로 변해 있었는데 그걸 검처럼 휘둘러댔다.
‘저걸 처리하지 않으면 접근하기 힘들겠어.’
이차원은 침착하게 독사를 하나씩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잘라도 뱀은 계속 생겨났다. 그 이유는 바로 심판의 검에 의해 잘려 나가도 계속해서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재생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회복속도가 왜 이렇게 빨라.’
이차원은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메두사와의 전투를 이어나갔다.
‘검으로는 벨 수 없는 건가.’
차원의 검술은 게임 속 모험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했지만, 급소를 노리기엔 메두사의 속도를 이겨내기 힘들었다. 전투에 의해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나긴 했지만, 다행히 이전에 히프족을 상대했을 때 사용했던 회복구슬이 아직 남아있는 상태라 버틸 수 있었다.
‘한두 번 정도는 더 기회가 있어.’
이차원은 자신의 몸을 지키면서 전투를 강했했다. 하지만 이대로 메두사와의 전투에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결국 이차원은 틈이 보인 순간 과감히 돌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차원이 노리던 틈이 보였다.
‘방금 전 공격으로 인해 옆구리가 비었어, 지금이다!’
이차원은 그대로 돌진하였다. 그런데 그때, 메두사가 이차원의 오른쪽 어깨를 물어버렸다. 공격할 틈을 노려 이차원이 공격해올 걸 알았던 메두사는 일부러 빈틈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 노림수에 바로 걸려들다니, 역시 별거 없는 놈이었네.”
이차원은 어깨를 움켜잡으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메두사의 이빨에 있던 독이 상처를 통해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던 것이다. 이차원은 가지고 있던 회복구슬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 히프족의 맹독 내성이 발동합니다! ]
‘내성?’
이전에 보스 구울을 처리하기 위해 히프족의 독을 스스로 주입 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 날 이후 점차족으로 독에 내성이 생겨나고 있던 모양이다.
[ 히프족의 맹독 내성이 발동합니다! ]
[ 히프족의 맹독 내성이 발동합니다! ]
상태 메시지가 이렇게나 빨리 떠오르는 것을 보면 메두사의 독이 퍼져나가는 속도가 히프족의 독보다는 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문장의 뜻을 알아채었다.
“네 공격이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차원은 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넘기지 그랬어. 그땐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었잖아. 큭큭.”
남자는 차원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비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메두사는 이차원이 떨어뜨린 검을 줍는다.
“죽긴 누가 죽어.”
이차원은 검을 주우려는 메두사에게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이 미친 새끼!”
이차원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메두사의 손과 머리털, 뱀으로 이루어져 있는 신체부위도 차원을 막 물어뜯기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난타전이 벌어진 것이다.
검으로 치명타를 입히는 것보다, 어쨌든 유효타를 많이 해서 칭호를 얻어 버프효과를 시키겠다는 것이 차원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독에 대한 내성 덕분에 뱀이 차원을 무차별적으로 뜯어, 피가 철철 넘쳐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 칭호 ‘공포의 학살자’가 시전 조건을 포착했습니다. ]
“역시, 이 방법이 맞았어.”
이차원의 주먹에 메두사가 나가떨어졌다. 칭호의 효과는 바로 40퍼센트의 확률로 기절시키는 것이었다. 이차원은 주먹에 맞고 날아간 메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판자의 검을 다시 주워들었다.
‘이거, 정당방위다?’
힘이 다하였는지 메두사에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는 기절해있었다. 이차원은 깨어나 다시 자신에게 공격해오지 못하게 쓰러진 남자의 다리를 잘라내었다.
***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박지원이 상대한 나머지 두 놈도 포박됐고 메두사는 다리가 잘렸으니 사실상 전투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으아아악!”
기절했던 남자는 일어나자마자 다리를 확인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고통을 넘은 공포가 그를 괴롭혔다. 죽진 않았지만 자신의 다리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에 대한 절망한 것이다.
“괜찮습니까?”
박지원은 피를 철철 흘리는 차원을 발견하고 묻는다. 자신도 헌터 둘을 상대하느라 상처가 있지만, 차원은 더 심한 상처를 입었다.
“이것 좀 드세요.”
회복제를 한가득 꺼내며 이차원에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이차원은 박지원에게 양보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에게 사용하세요.”
“그래도 마시는 게-”
“전 아직 괜찮습니다.”
박지원의 말을 끊은 이차원은 피를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킹샌드윅을 처리하였다. 보스라고 하기에도 싱겁게 전투가 끝났고 게이트는 닫히기 시작한다.
“이제 그만 나가시죠”
이차원은 박지원과 함께 게이트 나가려는 그때 메두사였던 놈과 그의 동료들이 이차원에게 애원한다.
“목숨만 살려주세요.”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살려는 줄 건데 게이트는 닫힐 거야.”
[ 킹샌드웍의 토사물 획득! ]
이차원은 살려달라 애원하는 그들을 두고 킹샌드웍이 죽고 남은 토사물을 모두 챙겨서 나가는데, 게이트 밖에는 길드원들과 국방부에서 내보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 누가 이랬어!”
“차원씨 괜찮아요? 몬스터가 이런 거 아니죠?”
“은지씨, 죄송한데 힐 좀 해주시겠어요?”
다들 차원에게 이만한 상처를 입힌 게 누구냐고 미쳐 날뛰는데 정작 이차원은 무심하다.
“박지원씨가 저 대신 브리핑 좀 대신-.”
이차원이 박지원을 찾으며 부르는데 이미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국방부 사람들에게 브리핑하는 중에 있었다.
그녀도 상처가 있지만, 매우 열정적으로 설명 중이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차원에게 맞추려고 감추고 있던 거였다.
‘힘들게 사네.’
지금까지 우랑길드의 악행이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약한 헌터들만 상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놈들에게 당한 헌터들은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 없었으니까.
“우랑길드 그놈들이 진짜였구나, 역시.”
그리고 김역전 뭔가 아는 게 있다는 듯 고갤 젓는다.
“뭘 좀 아나 봐요?”
“이전에 운영하던 길드에서 초보 헌터들이 게이트에서 동시에 실종된 적이 있거든요.”
김역전이 말한 게이트는 기업들의 자회사처럼, 우랑 길드의 자회사였던 것이었다. 그 사고에 대해선 그쪽의 책임자들이 처벌을 받았지만, 김역전의 입장에서는 잃은 게 너무 많았었고, 찝찝함이 남아있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 공론화시켜서, 완전히 뿌리 뽑겠다고 합니다. 한 놈 정도는 살려둘 걸 그랬어요.
증거가 없으니 저쪽에서는 길드랑은 무관하다고 잡아떼고 있으니….”
김역전이 그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이차원은 그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힐 다 됐으면 먼저 가겠습니다.”
이차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게이트를 떠난다. 이제 남은 건 울프릭에게 이 토사물을 건네주고, 빨리 크라투반 정글을 건너는 것뿐이다.
돌다리는 준비되었으니 확인하며 건너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