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차원 일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 비어있는 성 안에 서있었다.
“그때 확실하게 공격했어야 했어.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탓이다.”
리지는 결국 루도브 성 안에 있는 지배자의 손잡이를 들고 도망가버렸다. 그리고 사원에서 리지와 마주쳤을 때 보다 빨리 검을 들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였다.
-그래도 성이 붕괴되는 건 막았으니 다행이죠.
“그래. 리지를 막을 기회는 아직도 남아있어.”
이차원과 렌더는 모두 울프릭을 위로하지만 울프릭의 기분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울프릭은 지배자의 손잡이가 자신의 여동생에 의해 사라졌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자신이 막지 못했단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이번 일은 이차원에 의해 생겨난 일이었다. 이차원은 빨간 줄 패시브라는 변명을 사용하여 일부러 움직이지 못하겠단 상황을 연출하였다.
“으악!”
-이봐, 왜 그래?
“너에게 온 상처가 심한가 봐. 움직이지 못하겠어.”
이차원은 게임 속 그 누구도 만질 수 없었기에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울프릭에겐 미안하니 나중에 따로 사과를 해야겠지’
그들은 그렇게 마을로 복귀하였다. 복귀하는 순간에도 울프릭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것이 자신의 친동생인 리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것은 자명해졌기 때문이다.
마을에 도착한 렌더는 이제 치료가 다 되었는지 숙소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키는 받아놨으니 바로 올라가면 됩니다.
이차원 일행은 다음 목적지로 가기 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여관방에 묵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타무즈라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선 오랫동안 길고 험한 정글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휴식은 필수였다. 물론 다음 목적지를 알고 있는 것은 이차원뿐이었지만.
렌더는 주인에게 받은 키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쉬기로 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본 렌더는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런 비명에 그들은 렌더를 향해 다가가 보았다. 문 앞에는 어째선지 루도브의 왕 발레노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도브의 왕 발레노스는 사원 지킴이 수장 앨리스에게 사원에서 벌어졌던 이야기를 듣고 이차원과 울프릭을 만나보고 싶어 하였다. 다른 성의 왕과는 다르게 직접 성 밖으로 나와 직접 이차원과 울프릭을 수소문하여 찾아내었던 것이다.
-놀래켰다면 미안하네. 그대들이 곧장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뒷조사를 좀 했거든.
-와, 왕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앨리스한텐 얘기 들었네. 악마를 처리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지?
“해야 할 일은 한 것뿐입니다.”
-사원엔 무슨 일로 찾아갔던 거지? 악마가 출몰할 걸 미리 알고 있었나?
“구체적으로 알진 못했지만 악마를 깨우려는 이교도가 있단 소문을 듣고 추적 중에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이차원은 울프릭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렇다면 세크라이아 사건도 알겠구만?
“네.”
-리오만드에 이어 지배자의 손잡이까지 그놈들이 악마를 깨우려는 건 자명해졌네. 그리고 다음 재료는 타무즈에 있지.
발레노스가 그들을 찾아온 이유는 조지 왕과 같았다. 악마의 소환을 막아달라는 거였다.
-어쩔 텐가? 타무즈로 갈 텐가? 참고로 타무즈까진 꽤 험한 여행이 될 거야.
-무조건 갑니다.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울프릭이 발레노스 왕의 말에 대답했다. 이 일을 막아야 하는 건 자신이 해내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발레노스는 씩 웃었다.
-성으로 가지. 영웅들을 이런 누추한 곳에서 재우면 쓰겠나.
말을 마친 발레노스는 먼저 여관을 나간다.
“먼저 가 쉬고 있어. 난 들릴 곳이 있어서.”
-또 어딜 가는데?
“제작소.”
이차원은 창조 스킬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가 헌터 제작소로 향했다.
“왜 이리 늦게 와. 대금 떼먹는 줄 알았다고.”
주인장은 이차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투덜거린다. 이차원은 웃음을 지었다.
“얼맙니까?”
“오천.”
“대금이 5천만 원이나 한다고요?”
이차원이 순식간에 표정을 구기며 어이없어 묻는데 주인장은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
“영혼이 깃든 갑옷 제작을 맡겨 놓고 5천만 원도 안 가져왔단 소린가? 농담이지?”
“...”
“진담인가 보네. 이런 순진한 사람아. 가격은 알고 제작을 맡겼어야지.”
주인장은 이차원이 진심으로 당황하자 혀를 차며 말하는데 순간 김역전이 계좌에 입금했다던 말을 떠올랐다.
이차원이 곧장 스마트폰으로 계좌를 확인해 보니 무려 1억 6천만 원이 들어있었다. 그동안 계약금과 성과급이 쌓이고 있었던 것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니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좌 번호 주세요. 바로 쏴드리겠습니다.”
이차원은 주인장이 보는 앞에서 5천만 원을 입금해주었다. 주인장은 그제 서야 영혼이 깃든 갑옷을 꺼내온다.
칙칙하고 투박하게 생긴 디자인에 색도 흙색이라 어딘지 구려 보였다. 하지만 만져보았을 때 내구성도 상당히 느껴졌고 위압감도 달리 보였다.
이차원은 갑옷을 착용하고 거울을 보는데 헌터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뭔가 있어 보였다. 이제 남은 건 바지와 신발 그리고 투구뿐이었다.
“이제 바지랑 신발 투구만 제작하면 되겠구만. 소문에 의하면 맘모스를 잡아서 만드는 투구가 그렇게 좋다던데”
“그건 어디 가서 얻을 수 있죠?”
“헌터도 아닌 내가 어떻게 알겠나, 나도 그저 듣기만 한 것이니까.”
이차원은 주인장의 말에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자주 보자고. 세트로 맞추면 디씨도 해줄 테니까 꼭 우리 가게로 와!”
주인장이 가게 문을 나가는 이차원을 향해 외친다.
***
그 시각, 국방부.
올해로 60에 들어선 백발의 최한일 앞에 서 있는 젊은 직원이 있었다.
“보수 단체 사이에서도 여론도 좋습니다. 시민들의 안전은 등한시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기존 헌터들과 달리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싸웠다는 영웅 이미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최한일은 직원의 말을 들으며 이차원의 이력서를 자세히 훑어보고 있었다. 생김새는 최한일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강해보이지도 않는 인상에 신체사이즈 또한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의외구만. 생긴 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말이야.”
“여자들한텐 그게 매력이라고 인기가 상당합니다.”
“평판도 괜찮고 실력도 괜찮고 인기까지 많은데 결격 사유도 없다고?”
“네.”
“너 지금까지 뭐했냐?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예?”
“이런 놈을 여지껏 컨텍 안 하고 뭐 했냐고. 놀았어? 여기가 네 놀이터냐?”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하겠습니다!”
백발의 60대 최한일은 젊은 직원을 쏘아붙였다. 직원은 덜덜 떨며 죄송하다며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최한일 그를 불러다 세웠다. 직원은 이차원이 속해있는 길드에 연락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서려 했다.
“됐다, 번호 줘. 내가 직접 한다.”
김역전의 전화기가 울려왔다. 평소 같으면 모르는 번호는 칼같이 끊어버리거나 무시하기 일쑤지만 김무상에게 전화가 온 뒤로 째깍째깍 받는 중이다. 이번에도 역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김역전은 휴대폰을 집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최한일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얘기하였다.
“이차원 팀 우리한테 넘기시죠.”
전화하자마자 곧바로 이차원을 내놓으라니, 김역전은 길드가 인기 많아지면서 섭외전화도 많이 왔지만 이차원에 대한 장난 전화도 끊이지 않고 오던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장난전화인 줄 알고 고함을 질렀다.
“전화를 걸었음 통성명부터 하는 게 예의지. 그리고 당신이 뭔데 이차원을 넘기라 말아야!”
“나 국방부 최한일이오.”
“예?”
김역전은 국방부 최한일이란 말에 입을 다문다.
최한일이라면 김역전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남자다. 국방부 내에서 영향력이 강한 남자였고 쉽게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쉽게 승낙할 수도 없었다. 이차원 팀으로 인해 역전 길드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차원이 최번개 유튜브에 이어 김무상의 유튜브에 출연함으로써 인지도가 높아지고, 이차원이 소속된 길드를 사람들이 검색해보면서 덕분에 역전 길드가 흥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역전 길드에 들어오고 싶다는 헌터들만 50명이 넘어 내일 오전부터 면접을 봐도 종일 걸릴 것으로 예상될 정도였다. 이를 미루어 봤을 때 역전 길드에 봄을 가져다준 이차원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냥 거절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한일정도 되면 감사라는 명목으로 역전 길드를 대대적으로 세밀하게 조사하고 작은 건더기라도 그 결과물들을 부풀려서 전파해 영업정지를 시켜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달란다고 그냥 드릴 순 없습니다. 협상을 하시죠.”
김역전은 용기 내서 말하는데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잠시 후 수화기 너머 최한일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세월이 흐르긴 흘렀어. 나한테 협상하잔 놈도 다 있고 말이야. 그래, 좋아.”
***
이차원이 가게를 나가는데 김역전한테 내일 오후 1시에 회의실로 모이라는 메시지가 도착한다.
문자 답장을 보낸 후 울프릭과 렌더를 확인하는데 렌더가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반면 울프릭은 창가에 걸터앉아 달빛을 받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울프릭은 이차원의 얼굴을 확인하곤 다시 달을 보는 것에 집중한다.
-더는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어.
그리고 그건 울프릭뿐만 아니라 이차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전날 새벽에 이차원도 결말이 궁금해 공략집의 맨 끝을 펴보았으나 그 어떤 차원이동자도 대악마 소환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지를 막을 방법이 점점 사라져 가.
이차원은 아무 말 없이 울프릭을 바라볼 뿐이었다.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차원은 울프릭이 말하는 최악의 순간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네가 말하는 그 최악의 상황이라는 게...”
-결국 내 손으로 그 아이를 죽여야 하는 거야.
울프릭 뺨 줄기를 타고 차가운 달을 닯은 고요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이차원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내가 막을게. 내가 무조건 리지를 막을 거야. 그러니까 날 믿어.”
달빛이 그들의 주변을 환하게 비추면서 새하얀 색으로 그들을 둘러가고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