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차원은 저번에 서류를 살짝 봐서 알았지만 서류는 일종의 공략집 비스무리한 거였다. 하지만 생각했었던 기존 게임에 대한 공략집은 아니었다. 다크 혼의 바뀐 시나리오에 따라서 연구한 다양한 루트를 기록한 것에 가까웠다.
이차원은 서류를 빠르게 넘겨보는데 끝부분에 포스트잇과 사진이 붙은 서류들이 몇 장 껴있는 걸 보게 되었다. 이차원은 그 서류를 넘겨보았다. 서류에는 각각 넘버가 적혀있었다. 1부터 918번까지였다.
“설마 하나하나 추적을 했다고?”
이차원은 혹시나 해서 1부터 918번까지의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서류 앞부분에는 각 구매자들의 정보들이 적혀있었고 비고란엔 대부분 사망 혹은 실종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내었다.
502번.
502번만 비고란에 사망 혹은 실종이 아니라 알 수 없음이라고 적혀져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어디에 숨어있기라도 한 건가?’
당장 502번의 행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실종이나 사망처리 된 나머지 구매자들과 다른 것은 확실했으니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컴퓨터에서 울프릭의 욕설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에 놀란 이차원은 급하게 모니터를 확인하였다. 모니터 속 화면에서는 태풍 때문에 움막이 날아가 버린 모습이 보였다. 이차원은 다급하게 서류를 넘겨보았다. 당장 급한 불부터 끄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차원이 공략집을 빠르며 넘기며 메마른 황무지에 관한 글을 찾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모래폭풍을 뚫고 가기 위해선 영혼이 깃든 갑옷이 필요하다. 다른 장비를 차고 건너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다. 만약 갑옷이 없다면 오아시스 동쪽으로 쭉 가면 다른 루트가 나오는데 여기선 보스 전을 치러야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보스 정보는 자이언트 웜.}
자이언트 웜이라면, 이차원도 알고 있는 몬스터다.
‘웜은 골레인 사막 마을 퀘스트에서 나오는 이벤트 몹 아닌가.’
원래 게임 시나리오대로라면 자이언트 웜은 메마른 황무지에 나오는 게 아니라 루트 골레인이라는 사막 마을 퀘스트로 만나볼 수 있는 이벤트 보스 몹이었다. 그렇기에 강력한 편도 아니었다.
‘화살 몇 방 맞고 죽었던 거 같은데 뭘 주의하란 거지.’
그의 기억으로는 멀리서 화살 몇 방 쏘아 보내니 죽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근데 그게 주의까지 해야 할 정도인가인 부분에선 이차원은 의아했다.
이차원은 당장에 자이언트 웜의 바뀐 점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리스크가 있단 걸 알았지만 다른 방법이 마땅히 없으니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갑옷을 기다릴 시간은 없어.’
최번개가 그날 당장 그 대신에 뼈를 가져가 헌터 제작소에 전달해줬다고 한들 지배자의 반지가 하루 조금 더 걸렸으니 갑옷은 더 걸릴 거다. 결국 동쪽으로 가는 수밖에 답이 없었다.
“동쪽으로 갑시다.”
-동쪽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요?
“모래폭풍을 뚫는 것보단 나으니 가시죠.”
울프릭은 이차원의 말을 듣고 나침반을 꺼내어 보았다. 이차원 일행은 말없이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동쪽으로 향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 신기루를 보는 건가요?
저 멀리서 희미하게 타지마할의 그것과 닮은 루도브 성의 실루엣이 보인다.
“루도브 성의 모습 같은데 신기루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차원 말에 렌더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망망대해 같은 사막을 걷다가 마침내 목적지가 생긴 것만으로 기뻤기 때문이었다. 울프릭도 마찬가지. 목적지가 보이지 않은 채 계속 걷는 거랑 목적지가 보이며 걷는 것이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렌더의 말처럼 신기루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맞아도 한참을 더 걸어야겠지만 그래도 목적지가 보이니 힘이 나는 울프릭과 렌더였다. 목적지를 향해 잘만 가던 그들을 이차원이 불러 세웠다.
“멈춰요.”
앞장서던 렌더와 울프릭이 이차원의 말을 듣고 걷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차원과 같이 울프릭도 뭔가 수상함을 느꼈는지 재빨리 검을 꺼내 들었다.
조용한 사막 가운데,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러다 순식간에 모래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어 땅에서 무엇인가가 나왔다. 자이언트 웜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렌더를 덮쳐 대려 하였다. 이 모습에 울프릭이 빠르게 심판자의 검을 휘둘러 웜의 목덜미를 베어내었다.
하지만 검은 끝까지 들어가지 않고 중간에 멈춰 섰다. 하지만 자이언트 웜은 검이 꽤 깊게 들어갔는지 큰 부상을 당한 듯 땅속으로 줄행랑쳤다.
-가, 간 건가요?
렌더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물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으니 지켜봅시다.”
***
이차원 일행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다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바로 앞에서 블랙홀처럼 모래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던 것이다. 거기에 이어서 자이언트 웜이 힘차게 튀어 올랐다.
도망간 것이 아니라 잠시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이었다.
이차원 일행은 웜을 피해 달리는데 상대적으로 느린 렌더는 이번에도 점점 뒤처졌다. 자이언트 웜은 그런 렌더를 빠르게 추격하였다.
-으아아악!
웜은 렌더의 바로 뒤까지 따라잡은 상태였다. 이차원은 렌더가 잡아먹히기 직전에 이차원이 프라하 성에서 사두었던 흑표범 스크롤을 사용하였다. 이에 커다란 워프가 생기더니 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한 소환수, 흑표범이 나왔다.
흑표범은 나오자마자 자이언트 웜을 따라다니며 충실하게 물어뜯었다. 이에 자이언트 웜 또한 쉽게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환수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지속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이었다.
소환 시간은 단 5분이었다.
“5분 안에 무조건 여길 벗어난다.”
이차원의 말에 울프릭과 렌더는 다시 모래 사막을 달리지만 다리가 푹푹 꺼지는 바람에 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리고 5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고 흑표범 때문에 더욱 열이 받은 자이언트 웜은 흑표범을 내팽겨둔 채 이전보다 빠르게 세 사람을 추월하였다. 그러더니 땅속으로 들어가 앞에서 덮쳐오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다 위에서 먹잇감을 낚아채는 포식자 백상아리처럼 보였다.
울프릭은 재빠르게 검을 빼서 휘둘렀다. 하지만 웜은 타이밍에 맞춰 재빠르게 모래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잠깐의 정적.
울프릭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웜을 경계하였다. 하지만 웜의 속도는 너무 순식간이었다.
울프릭과 렌더의 바로 앞에 숨어있던 자이언트 웜이 모래 위로 튀어 올라 입을 벌렸다.
이어서 울프릭과 렌더의 비명소리가 사막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번 공격으로 인해 렌더는 어깨가 찢겼고 울프릭은 허벅지에 타박상을 입는 피해를 받게 된 것이다.
‘내가 알던 원래의 자이언트 웜과 차원이 다르잖아.’
바뀐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웜은 분명 이벤트 보스였던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거기다 공격을 하려고 하면 모래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갔다를 반복하니 공격할 타이밍이 없었다.
이차원은 결국 창조 스킬을 활용해서 기사 캐릭터로 게임 속으로 직접 들어갔다.
-저 지네 녀석, 무조건 처리해야 돼.
울프릭은 기사로 변한 이차원에게 이를 갈며 말하였다. 울프릭은 자신을 약 올리며 공격하는 자이언트 웜에게 잔뜩 약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울프릭은 빛의 심판자의 검을 휘둘렀고 이차원 또한 협공에 나섰다. 하지만 자이언트 웜은 그들의 공격을 모두 다 피하더니 역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차원과 울프릭이 함께 공격을 해나갔지만 여전히 모래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자이언트 웜을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울프릭의 부상 때문에 더욱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역으로 자이언트 웜은 세 사람을 점점 몰아넣고 있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자이언트 웜 때문에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제 어떡하나, 라고 생각할 때였다. 이차원은 자이언트 웜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순간에 무언가 알아채었다.
‘왼쪽으로 두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
이차원은 바로 자이언트 웜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몸을 숨겼다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다.’
이차원은 정확히 웜이 밖으로 나오는 지점에 검을 휘두르고, 자이언트 웜의 얼굴에 정통으로 십자가가 꽂히더니 초록색 피를 쏟아내며 흩뿌리고 다녔다.
이차원도 사막에서의 움직임이 힘든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웜을 지켜보는데 한 번 꿈틀거리던 웜은 빠르게 땅굴을 파더니 이번에도 사라져버렸다.
이차원 일행이 도망가는 웜을 빠르게 쫓는데 오아시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단 무리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도망가요! 도망가라고!
렌더는 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상단 무리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차원 일행을 바라볼 뿐 전혀 미동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몇 초도 지나지 않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모래에서 튀어나온 웜이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쉬고 있던 상단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지 못한 채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꿈틀거리는 인원 단 한 명도 없이 전원이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도망... 가라니까.
렌더는 자신의 말에도 피신하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모래 위에 풀썩 무릎 꿇으며 중얼거렸다.
이차원과 렌더, 모두 마찬가지로 그 처참한 광경에 고갤 돌리는 순간에 이차원의 눈앞에 안내창이 하나 새롭게 생겨났다.
{게임 시나리오를 수행하지 못하였음. 경험치 저하.}
게임 시나리오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경험치가 깎인 것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서울.
사람들은 모두 길거리를 평화롭게 걸어다니고 있었다. 친구, 연인들은 물론 가족들끼리도 뭉쳐 다니며 화목하고 밝은 모습을 보이며 도로 위를 꾸며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대형 모니터에서 긴급 뉴스 속보가 화면에 떠지며 앵커가 다급히게 속보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속보입니다. 종로 한복판에서 열린 게이트에서 자이언트 웜이 나왔다고 합니다. 현장에 있는 김익준 기자 나와주세요.”
화면 너머 종로 현장으로 바뀌자 자이언트 웜이 무차별하게 시민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들 모두 혼비백산하며 달아나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화목하고 밝은 모습의 사람들은 어느새 공포와 절규의 모습으로 바뀌어 도망치기 바빴다.
김무상은 핸드폰으로 소식을 전해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이 한순간에 바뀌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