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차원이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난도질해놓은 듯 뜯어진 벽지에는 다크 혼과 관련된 용어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거기에 다크 혼 세계 지도, 등장하는 괴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임프. 오우거. 오크. 트롤.’
전부 하나같이 이차원이 게임 속을 통해 지나쳐 왔던 몬스터들의 그림이다. 그리고 트롤을 제외하면 게임과 현실 둘 다에서 나타난 괴물들이었다.
그림을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보던 이차원에게 문득 의문점 하나가 들었다.
‘게임 시나리오를 막지 못하면 현실도 영향이 가는 건가?’
이차원이 게임 시나리오를 막지 못하게 되었을 때 현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거실을 둘러보던 이차원은 화장실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컴퓨터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차원이 컴퓨터에 가까이 다가가자 책상 밑에 펜으로 적힌 빨간색 마킹이 보였다.
그곳에는 919/920이라는 알 수 없는 숫자가 적혀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지.’
뭘 의미하는지 당연히 이차원은 알 리 없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드는 불길한 느낌이 이차원을 둘러싸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차원은 그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차원이 알 수 없는 숫자에 관한 힌트를 찾기 위해 방 안을 뒤져보았다. 방 안에는 책상과 컴퓨터밖에 없었기에 책상 서랍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서랍을 열던 중이었다. 마지막 서랍을 열어보니 a4용지 50장 정도가 서류철로 묶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차원은 그것을 꺼내어 바로 펼쳐 보았다. 서류에는 다크 혼의 세상에 대한 각종 정보들로 빼곡하게 종이를 채우고 있었다. 이차원의 느낌상으로 이것은 아마 실종된 사람이 적은 공략집 같은 걸로 보여졌다.
자세히 보니 이차원이 헤쳐나갔던 각 스테이지의 해결 방법과 게임에 나오는 보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들어올 때부터 느낀 거지만, 이 집 전체가 온통 다크 혼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이차원은 순간 소름이 돋아났다. 사라진 사람이 살던 집. 어쩌면 차원이동자일 수도 있는 그의 집은 온통 다크 혼에 관한 것으로만 가득했다. 그저 게임일 뿐인데, 게임일 뿐이었지만 한 사람의 현실 자체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이차원은 더 이상 이곳에서 견디기 힘들었는지 서류만 챙기고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서류를 챙겨 집으로 돌아온 이차원은 컴퓨터를 켜자마자 다크 혼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페이지를 누르자 스팀 사이트로 연결되고 다크 혼에 대한 정보가 좌르륵 흘러나왔다. 역시나 욕으로 뒤덮인 유저의 평가와 나락으로 떨어진 별점만이 가득했다.
‘여전히 망겜인 건 여전하네.’
그런데 스크롤을 맨 밑까지 내렸을 때 이차원은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을 본 순간. 이차원은 놀라며 순간 마우스를 집어 던졌다. 땅에 떨어진 마우스는 딸그락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의 눈에 들어온 단 한 줄의 문장. (게임을 구매한 유저 수 920명)
한국에 먼저 발매했다가 회사가 쪽박 치는 바람에 망했으니 해외 유저 사용자 수는 0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숫자는 오직 한국의 유저들로만 채워졌다는 것이다. 이차원은 신림동 아파트에서 봤던 글씨를 떠올렸다.
919/920
‘920은 구매자 수를 나타내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인 건 920이 구매자 수라면 919가 의미하는 건 뭐냐는 것이다.
‘각성한 사람의 숫자인 건가.’
이차원이 추측을 시작하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어쩌면 이 게임을 했던 사람들 모두 이차원처럼 각성했던 걸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마지막 920번째 사람이라면?’
그리고 문득 든 생각. 만약 자신이 가장 마지막 구매자일 경우다. 919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차원이동자고 자신이 마지막 920번째 사람일 경우.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은 실종이 된 거지?
이차원은 이 마지막 물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럼 왜 그 사람은 실종됐고 마지막 사람인 자신이 어째서 게임 시나리오에 참가하게 됐을까.
이차원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유저가 게임을 끝낼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상황은 딱 하나였다.
“게임 오버.”
게임 시나리오가 끝나게 된 것. 더는 바꿀 수 없는 시나리오기 때문에 다음 유저의 차례로 돌아간 것이다.
이차원이 여기까지 생각에 도달했을 때였다. 누군가에게 대답하는 울프릭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
-왕과의 접견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세크라이아 성 지하에 있던 리오만드가 사라져서 성안이 발칵 뒤집혔거든.
-리오만드?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리오만드는 강력한 영혼석을 부수는 용도로 쓰이는 보석인데 주로 대악마를 소환할 때 쓰이지.
모리슨과 울프릭이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모리슨의 말에 울프릭의 표정이 어째선지 빠르게 어두워진다. 그리고 울프릭 옆에 있던 렌더가 의아해서 묻는다.
-근데 그놈은 왜 하필 그걸 훔쳐 갔을까요?
-레오릭까지 깨운 걸 보니 누군가 과거에 봉인된 악마를 전부 깨울 심산인 거지. 왕께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모리슨은 갑자기 부활한 레오릭과 딱 맞게 사라진 리오만드를 보고 한 가지 의심이 들었다.
-오랫동안 봉인된 채 잠들어 있던 레오릭이 깨어남과 동시에 리오만드가 사라지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누군가의 계략이었던 게 분명하네.
이에 울프릭은 굉장히 경직되었다. 현재 그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건 현재 조종당하고 있는 자신의 여동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그런 모습의 울프릭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울프릭을 향해 물었다.
-혹시 누구 예상가는 인물이 있는 건가?
울프릭은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동생을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물어보기로 했다.
-그놈을 잡는 사람한텐 거한 포상도 내릴 건데 자네는 뭐 아는 거 없나?
“없습니다. 알았으면 진작 잡았겠죠.”
어느샌가 이차원이 모리슨의 질문에 끼어들어 대신 대답해주었다. 울프릭이 갑자기 나타난 이차원이 대답을 대신 해주자 당황하더니 이내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었다.
-그렇구만. 참, 자네 덕분에 리오만드가 사라진 걸 빨리 알 수 있었어. 고맙네.
그때 갑자기 기사 한 명이 달려오더니 왕에게 전달받은 명을 가지고 왔다.
-왕께서 두 분을 찾으십니다.
-접견은 다음으로 미룬 것이 아니었나?
-따로 부탁하실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왕의 부름이라. 대충 짐작은 가는군.’
이차원은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이 갔다. 사건은 다르지만 흘러가는 전개는 이전에 했던 게임 내용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차원과 울프릭은 기사를 따라 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거대한 문이 나오더니 앞으로 서자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엔 왕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세크리아 성의 왕으로서 선대들이 봉인했던 이 땅의 악마가 부활하는 걸 그저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네. 난 자네들이 범인을 찾는 걸 도와주면 좋겠는데, 어떠한가?
이차원의 예상대로 지금 이곳의 왕, 조지 7세는 선대들이 봉인했던 이 땅 위의 악마가 전부 부활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면서 그 범인을 찾는 걸 도와달라 부탁하였다.
-대악마를 깨우기 위해 리오만드 말고 따로 필요한 게 있습니까?
울프릭은 리지가 레오릭을 깨운 것처럼 대악마를 깨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전제하에 리지가 다른 재료를 모으는 걸 막기 위해서 물어보았다.
-리오만드는 봉인석을 부수는 망치의 머리 역할이네. 손잡이 역할을 하는 건 루도브에 있을 거야.
-여기서 가까운 마을인가요?
왕은 울프릭의 질문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기사들에게 손짓하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기사가 곧장 지도를 전해주었다.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이차원은 울프릭과 함께 지도를 살폈다. 물론 이차원은 게임에서 루도브 지역을 제일 재밌게 했던 터라 가는 길을 확실하게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게임 시나리오가 뭔가에 바뀔 수도 있어서 다시 지도를 확인하였다. 역시나 바뀐 건 없었다.
-넉넉하게 넣었으니 필요한 건 이걸로 구매하게.
왕의 말에 기사가 보따리를 주었다. 울프릭은 보따리를 확인하니 그곳엔 은화와 금괴 말고도 반짝거리는 게 잔뜩 담겨있었다.
그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이차원은 믿기지 않았다.
***
조지 7세가 준 보따리에 들어있는 손목 보호대는 우로보로스의 보호대였다.
‘사건이 달라지면 보상도 달라지는 건가.’
그리고 이건 원래 게임 시나리오에서 주는 보상보다 훨씬 좋은 보상이었다.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냐?
울프릭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보호대의 기능을 아직 모르는 듯하였다.
우로보로스의 보호대. 이 보호대로 말할 것 같으면 상대의 공격을 튕겨낼 수 있는 게임 내에서 강력한 장비로 손꼽힌다.
“일단 줘봐.”
울프릭에게 보따리를 받은 이차원은 손목 보호대를 스킬 전이로 두 개로 만들어 울프릭에게도 건넸다.
“써. 공격을 튕겨낼 수 있는 보호대야.”
이차원 말대로 울프릭은 곧장 보호대를 착용하였다.
-가기 전에 눈 좀 붙일까요?
-근처에 여관이 있을 거야.
“잠깐. 떠나기 전에 준비할 게 있는데. 렌더 씨, 정제수 파는 곳 알죠?”
-네. 갑자기 정제수는 왜요?
“루도브로 가기 위해 필요하니까요. 렌더 씨가 정제수를 구해오시고 울프릭, 넌 모험가 상점에 가서 나침반 좀 구해와.”
-귀찮게 나침반은 왜?
“사막에서 길 잃기 싫으면 가는 게 좋을 거다.”
울프릭은 귀찮아하면서도 나침반을 구하러 가고 렌더도 정제수를 구하러 갔다.
그리고 혼자 남아 있던 이차원은 왕에게 받은 보상을 생각하며 게임 시나리오에 대해 생각하였다. 이제 사건이 달라지면 보상도 달라지는 건 확실해졌다. 과거의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든, 어쨌든 그건 과거고 그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만의 선택으로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었다.
이차원은 자신만의 선택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 거라고 다짐하였다. 루도브를 향한 여행길 준비를 하고 있는 울프릭을 멍하니 보다가 침대 위에 놓인 실종된 그 남자가 남기고 간 서류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선택으로 결과든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반드시. 그럴 것이 운명이란 것은 항상 인간의 손에 닿는 곳에 있기 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