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리지!
익숙한 실루엣의 주인공이 리지라고 생각하는 울프릭은 모리슨과 렌더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여성을 미친 듯이 쫓기 시작했다. 마치 울프릭은 뭔가에 홀린 듯이 여성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 같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일단 쫓아가세요.”
이차원이 빠르게 사라지는 울프릭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울프릭은 동생으로 보이는 여자를 쫓아 시장통과 상점가를 지나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동안의 추격전 끝에 울프릭이 여성을 거의 다 따라잡았을 때였다.
“멈추라니까.”
조금만 더 뻗으면 리지의 머리카락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 갑자기 그의 사방으로 검은 사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가로막았다. 이교도들은 빠르게 울프릭을 둘러쌌다.
-너희들은 뭐야? 안 비켜?
울프릭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교도들이 품에 넣고 있었던 칼을 꺼내고는 공격을 하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기습을 예상하고 있던 울프릭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울프릭은 리지로 추측되는 여성과 자신을 떼어놓은 이교도들을 무참하게 공격하였다. 빠르고 간결하게 이교도의 몸을 넘어 다니면서 목숨을 하나씩 끊어 나갔다.
그때, 이교도와 싸움을 벌이던 울프릭에게 그만 틈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이교도의 검이 울프릭의 가슴에 칼이 꽂혀버렸다.
-크흑!
울프릭은 가슴에 검이 꽂히는 순간에도 눈빛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녀의 공허한 눈빛이 울프릭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저 여성이 리지가 맞다면 저 눈빛은 울프릭이 평소에 알던 여동생의 눈빛이 아니었다. 울프릭을 보면 항상 달려와 품에 안겼던 어린 시절의 맑고 투명한 눈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울프릭은 이제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여동생의 모습 때문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동시에 울프릭은 눈이 마주친 순간 몸에 힘이 축 빠져버렸다.
-리지... 너 대체...
정신에 타격이 컸던 탓인지 울프릭은 앞에 있는 여성이 리지가 맞다고 판단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울프릭 스스로도 희망을 놓아버린 듯하였다.
이교도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울프릭 주변에 단체로 몰려들었다. 바닥에 꿇은 울프릭을 향해 덮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뒤늦게 울프릭을 쫓아온 이차원이 스킬 [포세이돈]을 사용하여 태풍으로 이교도들을 더 늦기 전에 날려 버렸다.
“괜찮아?”
-...
울프릭은 칼에 맞은 아픔보다 본인 내면의 아픔 때문에 더욱 아파하였다.
“우선 동생부터 확인해.”
이차원 말에 울프릭은 정신을 차리고 여자의 후드를 벗기려 하였다. 하지만 후드를 향하던 손끝이 떨리더니 주춤거렸다. 앞에 있는 여성이 본인의 생각대로 리지가 맞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졌다 해도 결국 동생은 동생이었다. 울프릭은 그런 마음을 다잡고 후드를 벗겨내었다.
드디어 울프릭은 앞에 있는 여성의 얼굴을 정확히 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별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눈을 감고도 그려볼 수 있는 동생의 이목구비는 아직도 뚜렷하였다.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고 확인해보니 역시 리지가 확실했다.
그런데 역시나 울프릭이 알고 있던 얼굴과 이상한 점이 있었다. 리지의 뺨엔 이상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눈동자도 뻘겋게 변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그랬어? 지금까지 일어난 일, 정말 네가 그런 거야?
울프릭은 리지의 어깨를 붙잡고 묻는데 리지는 그저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하라고 제발!
울프릭이 애원하듯 소리치자 리지는 무슨 주문을 외우듯 뭐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리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부 무슨 말인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직 안 늦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정의심만으로 이 세상을 바꿀 순 없어.
리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 유성우가 별똥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너 끝까지...
울프릭은 자신도 모르게 동생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리지가 그 틈을 타서 도망을 쳐버렸다.
울프릭은 뒤늦게 리지 뒤를 쫓는데 그의 앞으로 커다란 유성우가 떨어졌다.
-리지...
***
역병이 돌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피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던 도시 세크라이아는 갑작스럽게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유성우로 인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상점이 불에 타고 폭발에 휘말린 주민들과 기사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거기에 하필 리지는 유성우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울프릭은 사라진 동생을 찾기 위해 리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지만 역시나 리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울프릭이 불이 난 마법 상점에 들어가려 하자 보다 못한 이차원이 그를 말렸다.
“할 만큼 했어. 그만해.”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어.
울프릭이 리지를 그대로 놓친 것을 자책하는데 혼란 속에서 울프릭과 이차원을 발견한 모리슨과 렌더가 달려온다.
-아니 갑자기 웬 유성우래요?
-여기 있지 말고 빨리 대피소로 이동합시다!
기사단장이 이차원 일행을 데리고 가려는데 그 순간 세크라이아의 광장이 지진이 난 듯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곧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그곳에서 역병을 옮기는 쥐새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색이 된 모리슨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순간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렸다.
-설마 쥐가 무서워서 그래요?
렌더는 뱀을 무서워하는 자신과 같이 그런 건가 싶었다. 칼을 주워주며 묻는데 모리슨의 모습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이차원도 모리슨의 지나친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고 물어보았다.
-예부터 전해지길, 이 광장 지하에는 영혼석이 봉인돼 있는데 그 영혼석에는...
“영혼석에는 뭐요?”
-...레오릭이라는 악마 군단장이 잠들어 있습니다.
모리슨의 말을 들은 이차원은 의아했다.
‘레오릭이라. 이것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이야.’
수천 년 전에 대악마와 함께 봉인 당한 터라 그게 사실인지 진실인진 모르겠지만,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이 게임에 레오릭이라는 악마는 나오지 않았다.
-레오릭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영웅 니콜슨이 레오릭 뱃속에 들어가 몸을 반으로 가르고 봉인했습니다.
모리슨이 수천 년 전부터 전해지던 전설을 얘기하는데 갑자기 더 큰 지진이 발생하였다. 곧바로 광장이 아예 주저앉아버리더니 상점 하나 크기에 맞먹는 거대한 손이 나타났다.
모리슨이 말한 내용이 다시 현실이 돼서 돌아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서, 설마 저, 저게.
렌더는 어마무시한 손의 크기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악마 단장 레오릭이다.
***
군단장 아니랄까 봐 포스가 어마어마하게 뿜어져 나왔다. 상점 다섯 개 정도를 합친 키에 온몸에서 독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신 차려! 동생 찾기도 전에 죽기 싫으면.”
이차원은 리지를 놓친 여파로 아직까지 집중을 못 하는 울프릭에게 한마디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이 없는 울프릭에게 한마디를 더 하였다.
“이대로 네 동생을 포기할 거면 그러고 있어.”
울프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등에 메고 있던 칼을 꺼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울프릭이 칼을 뽑자 군단장이 크게 입을 벌리며 푸른색 액체를 내뿜기 시작하였다. 푸른색 액체가 닿는 곳마다 녹아들기 시작하더니 독가스가 피어오르고 가스를 마신 주민들은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닿으면 독가스로 변하는 건가.’
이차원이 레오릭의 공격을 분석하는데 갑자기 쓰러졌던 주민들이 하나둘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약한데? 어르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모리슨은 독가스가 생각보다 약하다고 안도하며 쓰러진 할아버지가 일어나는 걸 도와주려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모리슨의 손을 붙잡더니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모리슨이 뒤로 넘어지고 할아버지는 그의 위에 올라타 이빨을 드러내며 물려고 하였다.
-노인네 힘이 장난 아니구만.
모리슨이 침을 질질 흘리며 자신을 물려고 드는 할아버지를 간신히 막아내었는데, 몬스터로 변화된 그의 힘은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점차 할아버지의 얼굴이 모리슨의 얼굴과 가까워지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갑자기 할아버지가 무엇인가에 맞은 듯 옆으로 고꾸라졌다.
-괜찮습니까?
렌더가 급한 대로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으로 할아버지를 후려친 것이다. 모리슨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고꾸라진 할아버지도 다시 일어나 모리슨과 렌더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다. 모리슨은 결국 재빨리 칼을 빼 들어 할아버지의 목을 베었다.
그 모습에 이차원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신을 바로 잡기 위해 생각을 고쳤다.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다. 몬스터일 뿐이야.’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차원이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연기를 마신 주민들 모두가 좀비화된 몬스터로 변해있었다. 힘이 강력해진 그들을 울프릭과 모리슨 둘이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이차원은 빠른 판단을 내리고 창조 스킬을 사용하였다.
[빙의가 가능한 캐릭터의 타입만 창조할 수 있습니다.
사냥꾼 / 기사단 / 선택하십시오.]
고민할 것도 없이 이차원은 기사단을 선택하였다. 기사단 캐릭터를 선택하자마자 자신이 모니터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걸 느꼈다. 눈을 뜨자 게임 속으로 들어와 있었고 새롭게 빙의한 자신의 몸을 살펴보는데 다친 곳도 없었다.
“이 정도면 성공인가.”
이차원은 빙의한 몸에 나름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대 갑자기 누군가가 이차원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겼다.
-뭐해, 인마.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따라오라니까.
이차원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기사를 싸늘하게 돌아보았더니 한 기사가 서 있었다.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같은 기사단원 같았다.
이차원의 뒤통수를 후려친 기사가 향한 곳은 좀비로 변한 주민들과 싸우고 있는 동료들 근처였다. 그는 동료들을 도와 함께 싸웠지만, 몬스터로 변한 그들을 인간이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기사 단원들은 결국 좀비의 공격에 당해 뒤로 고꾸라지고 좀비 하나가 곧장 그의 위로 올라탔다.
-으윽. 저리 가. 가라고!
기사단원이 얼굴에 뚝뚝 떨어지는 침에 몸서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좀비의 목이 잘리더니 기사단원 옆으로 툭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갔다.
“뒤통수 때린 값은 치르고 가야지.”
-예?
이차원의 강인한 표정에 기사단원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