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러커들을 처리하고 나니 마을 소란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보다 부상자가 더 늘어난 상황이었다.
우선 이차원 일행과 기사들은 부상자들을 안전한 곳에 안치시켰다. 기사단장은 자신들을 도와준 이차원 일행을 잠시나마 대접하기 위해 따로 한자리에 모였다.
-저희들을 도와주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마을에 피해가 커지지 않아 다행이에요.”
어느새 렌더가 앞을 나서 이야기하였다. 제일 먼저 도망치려 했으면서 이렇게 행동하는 모습이 왠지 웃겼다. 기사단장은 다시 울프릭의 검을 보며 물었다.
-그 검은, 어디서 난 겁니까?
-그게 왜 궁금한데.”
-제가 알기로 그 검은 나디저스 왕께서 가지고 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검이 당신의 손에 있기에 묻는 것입니다.
“나디저스 왕은 언데드에 의해 죽었습니다.”
기사단장이 이차원의 그 말에 놀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군.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이 죽어서. 그래서 새 왕은 누가 됐습니까? 호퍼 가문?
“그렉이라고 아마 모르실 겁니다.”
-아아.
기사단장은 마치 그렉을 아는 듯 감탄을 내뱉는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듯 표정이 밝아져 목소리가 커졌다.
-그놈이라면 믿을 만하지. 착하고 아주 성실한 놈이죠.
그런데 이차원은 그렉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기사단장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차원이 궁금증을 품고 있자 기사단장이 먼저 설명하였다.
-저도 리프마을 출신입니다. 부모님이 그 쓰레기 놈들한테 착취당하다 돌아가신 후로 마을을 떠났지만요.
기사단장은 과거를 회상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리프마을의 새로운 변화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근데 귀족 놈들이 순순히 신분 낮은 그렉을 왕으로 인정했을 리는 없고. 어떻게 그렉이 왕위를 받게 되었습니까?
-아킬레스건 하나 끊어버리니까 해주던데.
울프릭 말에 기사단장이 매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사단장의 호감도가 올랐다는 것을 알리는 상태창이 뜬다. 하지만 아직 최대치 달성은 하지 못하고 반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아직 이걸론 부족한데.’
뭔가 기사단장의 마음을 더 이끌어내야만 하였다. 이제 C- 등급 게이트까지 4시간 정도 남았으니 그전까지 기사단장의 스킬을 습득해야만 했다.
‘기사단장의 호감도를 더 올릴만한 일을 해야 해.’
이차원은 이곳에서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도 많은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 이번 사건으로 다친 병사마저 늘어나 환자는 급증하였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지만, 구호대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고 죽음의 갈림길에서 최대한 버티길 응원하는 것뿐이었다.
‘치료제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차원은 그 순간 연금술사의 말이 떠올랐다. 만년초 6개만 있다면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여기 마을 사람들을 구해줘야겠어.”
-저희 살기도 힘든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줘요?
“간신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러커로부터 지켜냈는데 중독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냅두자고?”
이에 렌더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이차원은 더 밀고 나갔다.
“이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선 만년초가 6개 필요하댔어.”
-하지만 우리에겐 하나밖에 없잖아?
-설마 이 주변 산들을 전부 뒤져야 한단 거예요?
렌더의 말대로 주변은 모두 산이었다. 하지만 만년초는 찾기 굉장히 까다롭기에 이만한 규모에서 만년초를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 [복사] 기술을 사용해서 여러 개로 만들 수만 있다면... 앗.’
이차원은 무엇인가 떠올랐다. 바로 얼마 전에 능력이 오른 [복사lv2] 스킬을 쓴다면 만년초 6개는 금방 만들 수 있었다.
이차원이 곧바로 마을을 두리번거리는데 사람들 옆에서 기도 중인 연금술사를 발견하였다.
“연금술사님, 물을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치료제, 당장 만들 수 있는 건가요?”
***
-약초만 있으면 금방 만들지. 헌데 만년초는 찾았고?
이차원은 복사 스킬을 사용하여 만든 만년초 6개를 건네었다.
-허허, 이렇게 빨리 약초를 구해올 줄이야, 그런데 자네, 좀 전까지 전투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나?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이차원은 찔린 표정을 지었지만 그럴듯한 해명으로 둘러대었다.
“저희한테 원래 5개밖에 없었는데 전투 중 우연히 마을 안에 있던 풀숲에 하나가 있더라고요.”
-그렇구만, 아무튼 이렇게 약초를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 고맙구려.
만년초를 건네받은 제퍼슨은 곧장 치료제를 연성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손짓 하나하나가 신중하고 빠르게 움직이면서 입 또한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특히 자신의 지식 분야에 관해서는 흥분하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만년초가 재밌는 점이 뭔 줄 알아? 다들 이걸 약초라고 알지만 사실 독초야, 독초! 그런데 이걸 왜 먹냐. 독을 더 센 독으로 잡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독을 독으로 잡다니, 그건 단지 죽으려 하는 것뿐이잖아.
울프릭은 제퍼슨이 한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야 그렇지, 독을 먹고 낫는다니. 그건 도무지 일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었다. 제퍼슨은 그런 우리를 가르칠 생각에 기쁜 듯 연신 웃어댄다.
-만년초 독은 인간한테만 무해 하거든. 일반 짐승이 먹으면 곧장 저세상 가는 거라고.
만년초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차원은 제퍼슨의 정보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기에 이런 설정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스토리도 바뀌는 마당에.’
점점 변화하는 게임 스토리 자체에서 과정을 통하던 모든 것들이 변해갔다. 지금 나오면 안 될 몬스터도 나오고, 급전개로 무대가 바뀐 데다가 마을 통째로 분위기가 바뀐 마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추가된 설명이라 해도 이젠 놀랍지 않았다.
-됐네.
제퍼슨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들어낸 것은 손톱만 한 구슬 수백 개였다. 그 모습은 마치 이차원의 세계에 있는 알약과도 같은 형태였다.
-우리가 생각했던 치료제하고 생김새가 좀 다른데?
-당연하지, 이건 나밖에 연성하지 못하는 걸세.
단순히 만년초 여섯 개였다면 여섯, 일곱 사람밖에 구하지 못했겠지만, 치료의 핵심이 되는 물질을 분리해 연성함으로써 족히 백 명은 넘는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손톱 크기의 회복 구슬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걸로 마을에 있는 환자들은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기사단장이 이차원과 제퍼슨에 의해 만들어진 구슬을 부하들을 시켜 주민들에게 나눠주게 하고 이차원을 천천히 관찰하였다. 이차원의 생김새가 게임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당신은 혹시 요정입니까?
이차원은 그렇다고 대답하려는데 기사단장이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아니야. 요정은 아니야. 내가 엘프 땅으로 모험을 떠난 지 꽤 되긴 했어도 당신 같은 요정은 본 적이 없소. 고대 마법사가 불러낸 존잰가?
기사단장의 날카로운 말에 뜨끔하였다. 하필 기사단장이 요정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니. 이차원이 무언가 변명할 말을 생각하였다.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울프릭은 연금술사와 같이 있어 이차원과 기사단장의 말이 들리지 않을 거리에 있었다.
“제가 누군지가 중요합니까. 무고한 사람의 죽는 것을 막는 것이 제 업이란 것만 알아 주십쇼.”
이차원 말에 기사단장은 크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역시 신은 존재하나 봅니다.
게임 속에만 존재하지 말고 현실 세계에도 존재하면 좋으련만. 이라고 이차원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그때, 이차원의 앞으로 안내창이 떴다.
호감도가 최대치를 달성했다는 안내창이다.
이차원은 기사단장이 가지고 있는 [검술 LV3]과 [방패 밀치기 LV2]를 습득하였다.
‘뭐야, 이 절묘한 타이밍에 이 스킬들을 획득하다니!’
이차원은 갑작스런 스킬 획득에 너무 놀라서 당황하였다.
-단장님! 대부분 치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 구슬을 나눠주던 기사가 달려와 단장에게 보고하였다.
-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여기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알게 될 거 같아 불편했던 이차원은 크게 안도하였다.
울프릭과 렌더도 어느샌가 이차원의 옆에 와있었다.
-성으로 돌아가면 왕께 직접 그대들의 공헌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장은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말을 타고 가던 기사들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며 사라졌다. 이차원은 원하는 보상도 얻었겠다, 잠시 쉬려 하였다. 하지만 금세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며 이차원을 흔들었다.
발신인은 바로 최번개였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4시. 토벌 시간까지 이제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나 좀 제발 쉬게 해주라.’
이차원은 게이트 토벌에 가져가기 위해 오늘 얻은 아이템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봤다. 당장 렌더에게 히프족 독니가 있었고 따로 챙긴 회복 구슬 하나도 있었다. 독니가 쓰일 것 같진 않지만 구울도 독을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회복 구슬은 쓰일만하다고 생각해 챙겨가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렌더에게 다가갔다.
“렌더 씨, 혹시 히프족 독니 빌릴 수 있을까요?”
-네? 갑자기 왜요?
“잠시 제 세계로 가서 확인할 게 한 가지 있어요. 금방 다시 돌려드릴게요.”
-당신이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기요.
렌더는 비싼 값에 팔릴 수 있는 독니를 이차원에게 주었다.
“나 잠깐 자리 좀 비운다.”
-이번에도 오래 걸리냐?
“그건 가봐야 알지.”
-잠깐, 이차원 씨, 금방 주시겠다고...
“그건 걱정 마요.”
이차원은 독니와 회복 구슬을 챙기곤 자리를 비웠다.
***
이차원이 c- 게이트에 도착하자 김역전, 최번개, 은지, 예리나가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 옆엔 이지스 그룹도 함께였다.
“아~ 진짜 불쌍하다. 돈도 못 챙기는 마당에 부속물도 뺏기게 생겼네.”
이지스 그룹원 중 하나인 지민이다. 예원의 길드원답게 성격이 아주 똑 닮았다.
“정식 토벌권 따내면 뭐해요, 어차피 뻔한 결관데.”
예원은 이제 아예 대놓고 김역전을 비웃는다.
“아 진짜 저 새끼들 보자 보자 하니까.”
최번개가 이지스 그룹과 한판 붙으려는 듯 소매를 걷어 올리는데 이차원이 말린다.
“번개야, 그만 참아.”
이차원은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속마음을 절제하고 있었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저 새끼들 대놓고 우리 개무시하는 거라고.”
“물론 알지.”
“아는 사람이 뭘 이렇게 평온해?”
“평온한 게 아니야, 단지 기다리는 거야.”
“뭘?”
“제대로 밟아줄 타이밍.”
최번개는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이차원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싸늘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이차원은 눈을 감고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까지 머릴 차갑게 유지하며 머릿속으로 능력을 정리했다.
[검술 Lv3]과 [방패밀치기 Lv2].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빛의 심판자의 검. 긴급한 상황에서 역전이 가능한 보름달.
“너 말이야. 저번부터 무지 재수 없어. 뭐라도 되는 것마냥 무게 잡고 있는 거 혹시 컨셉이니?”
역시나 예원이 그런 이차원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혼자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듯 침착함을 유지하는 이차원을 보며 그 뒤로 계속 시비를 걸어대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 이차원을 자극하려는 거다.
그러나 이차원은 예원의 어떤 자극에도 조용히 눈만 감고 있을 뿐이었다.
“하! 할 말 없으니까 씹는 것 봐. 찌질하긴.”
“이봐요!”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순 없었던 은지가 가세를 했지만, 오히려 예원은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최강힐러 은지. 그 이름에 걸맞은 활약 기대할게, 오늘.”
그때 이차원이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그 눈빛은 어떤 살기보다 차가웠으며, 매서운 짐승보다도 예리했다. 예원은 눈빛 하나에 순간 흠칫 놀랐다. 그런 모습에 이차원은 씩 웃었다.
“감히 나를 보고 웃어?”
이차원은 미세하게 떨리는 예원을 보며 말했다.
“그쪽도 미리 웃어놔. 게이트 들어가면 웃을 일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