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어디선가 울프릭의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손에 무언가를 쥐고 이차원에게 다가왔다.
-이게 네가 말하던 천년초인가 만년초인가 맞지?
이차원이 울프릭이 가져온 만년초를 보았다. 이차원이 알고 있는 모양 그대로였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 찾기도 힘든 만년초를 두 개나 발견해 왔단 것이다.
-혹시 모르잖아. 나중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
“응, 잘했어, 정말 다행이야.”
울프릭의 손에 들려있는 만년초 두 개 중 하나를 렌더에게 주었다. 렌더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울프릭은 이차원의 지시대로 만년초를 삼키기 쉽게 잎을 갈기갈기 뜯어 동그랗게 뭉쳤다. 힘겹게 약초를 목구멍으로 삼킨 렌더는 시간이 지나자 점점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이내 악몽에서 깨어나듯 화들짝 깨어났다.
-전 아직 죽기 싫어요!
-이봐, 진정해. 이제 괜찮아.
-아, 울프릭 씨였군요. 저희 어서 이 마을을 떠나요!
렌더가 진짜 죽을 뻔한 위험을 겪은 뒤 잔뜩 겁에 질려 말했다. 더불어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어느덧 하늘은 비가 그쳤고 수평선 너머로 햇빛이 떠올랐다. 세 사람이 트래스 마을을 나와 길을 따라 걷자 리온하트 마을로 가는 길목이 나왔다.
-모험가가 된 뒤로 제대로 쉰 날이 없는 거 같아요.
-그럴 만하죠. 이런 상황들이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으니.
렌더의 표정은 만년초를 먹어서 활기는 넘쳐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도 눈가에 있는 피로는 없애지 못하나 보다.
리온하트 마을은 거대한 성당 때문에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더군다나 세크라이아 성에는 성당이 없어서 성의 주민들과 기사들도 종종 찾곤 하는 마을이었다. 그 말은 즉슨 꽤 크고 발달된 도시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종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도 여긴 아직 습격을 받지 않았나 보군.”
확실히 리온하트 마을은 트래스 마을과 정반대의 분위기를 띠고 있는 듯하였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상황은 바뀌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을에 들어서고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풍경은 정말이지 아비규환이었다. 주민들보다 많아 보이는 경비병들과 바닥에 누워 신음을 흘리고 있는 주민들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던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주민들의 핏줄이 우물의 독을 먹고 중독되었던 렌더처럼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독을 퍼트렸어.”
이차원은 쓰러져 있는 마을 주민들을 보고 있었다. 한편, 울프릭의 마음속 한구석이 심란해졌다. 트레스 마을도 그렇고, 이번 리온하트의 상황이 만약, 자신의 여동생 리지가 조종을 당하여 벌어진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울프릭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때 멀리서 한 남자가 기사들에게 소릴 질러대며 명령을 내린다. 아마 기사들을 지휘하는 걸로 봐선 기사단장쯤 돼 보였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죠?”
이차원은 기사단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단장은 마을 상황과 병사들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복잡한 얼굴을 띠며 이차원에게 말했다.
-러커 떼가 나타나 마을에 독을 살포하고 있습니다. 어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이차원은 그제서야 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독에 감염돼 죽어 나가는지 알 수 있었다.
-술사님, 이곳 좀 도와주세요!
-술사님, 약초가 다 떨어져 더 이상 치료할 수 없습니다!
-만년초 여섯 개만 있어도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텐데...
멀리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던 연금술사 제퍼슨이 이차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차원은 만년초 여섯 개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제퍼슨의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갔다.
-고작 만년초 여섯 개로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전부 구할 수 있단 건가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당장 렌더를 살리기 위해서만 만년초 하나가 소비됐다. 그런데 여섯 개로 마을 사람들 전부를 살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니 나와 같은 연금술이 있는 게지.
어쩐지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퍼슨을 훑어보았다. 백발에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깊이가 깊고 총명하게 빛났다.
‘이 사람이 연금술사인가.’
이차원은 더 자세한 얘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기사 한 명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소리쳤다.
-대장님! 서쪽 숲에서 러커 떼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
‘게임이 치사하게 바뀌네. 러커가 벌써 나오고.’
러커는 대악마 부활 이전에 나오는 강력한 몬스터였다. 그러니 왕국에서 파견된 기사와 경비병이 힘을 합쳐도 상위 등급 몬스터인 러커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기사 한 명이 러커를 막기 위해 장비를 착용하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러커가 기사 몸을 타고 올라가 독가스를 입으로 뿜어댔다. 그러자 병사는 급격히 쓰러지며 중독 현상을 보였다. 하나둘씩 속수무책으로 중독이 되어가는 병사들을 이차원은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거기에 이대로 있다간 울프릭과 렌더마저 언제 감염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냥 갑시다. 저희에게도 벅찬 상대예요.
렌더는 이번에도 이차원과 울프릭이 도망가지 않고 싸움을 지켜보자 불안해졌다. 매는 처음 맞을 때보다 두 번째가 더 아픈 법이다. 렌더는 독에 중독되어봐서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있을 거야.’
선택지는 두 개다. 렌더의 의견을 따라 도망치든가 자신의 의지대로 싸우든가. 도망치면 지금은 어떠한 피해도 없이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트레스 마을과 같이 이 상황이 언제 자신들에게 넘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발 갑시다, 좀!
렌더, 이차원을 재촉하고 울프릭은 그저 이차원의 선택에 따를 생각인지 아무 말도 없었다.
이차원은 고민을 하더니 결국 선택을 내렸다.
“가죠.”
-정말인가요? 그럼 어서 빨리 나가요.
“후회하지 않겠지?”
이차원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판단대로 마을을 떠나길 택하였다. 자신들의 능력으론 현재 지금 상황을 이겨내기엔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떠나기 위해 싸움터에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형, 5시간 후 구울 토벌, 잊지 마!]
최번개의 메일이었다. 이차원은 자신의 방에 있는 시계와 달력을 보았다.
‘맞다, 잊고 있었어!’
이차원은 심판자의 검이 있기에 구울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무기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없었다. 이차원은 검사가 아니다. 이 상태로 구울을 처리하러 갔다가는 제대로 무기도 쓰지 못하고 예원의 말대로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만 당하는 꼴이 날 수 있다.
“그럴 일은 절대 안 돼.”
-뭐가 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울프릭이 이차원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이차원은 현실과 게임 속 세상의 일을 동시에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바로 그때, 잭의 일이 떠올랐다.
분명 잭의 호감도 최대치에 달성하자 잭이 가지고 있는 기술 사냥꾼의 지혜 패시브를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이용하여 어쩌면 기사단장의 스킬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잠깐만.”
이차원,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싸움터를 관찰했다. 기사단장의 스킬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기사단장이라 그런지 제법 싸움을 잘한다 정도가 아니라 모든 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방패를 한 번 앞으로 내던질 때마다 앞에서 몰려오는 러커가 두세 마리씩은 죽어 나가고 있었다.
검술의 부족함, 그리고 그것을 채워줄 기술. 이차원은 다짐했다.
“렌더, 미안. 아무래도 역시 싸워야겠어.”
-...
-어쩐지 표정에서부터 보였어. 나도 원하는 바다.
그러려고 지은 표정이 아닌데, 뭐 그렇게 넘어갔으니 그러려니 하였다. 울프릭 역시 아까부터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자신도 이대로 떠나긴 싫었는지 곧장 싸움터로 달려갔다.
***
기사단장은 안정적으로 러커를 잡으며 조금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은 채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기사들은 러커의 독 때문에 점점 물러나고 있었다. 급기야 도망치려는 기사들도 보였다.
-이 고통을 가족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은 기사는 도망쳐도 좋다!
기사단장은 거대한 품위만을 내세우며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은 단장의 힘과 가족에 대한 애정의 시선을 느끼게 되어 악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지시를 하던 단장의 틈으로 러커 하나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방패로 막으며 러커를 죽이려 했으나 다른 한 놈이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려 단장의 검을 묶어버렸다.
-이런!
기사단장이 묶인 칼을 빼내려 하는데 그 잠깐의 순간 근처에 있던 러커들이 모두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려 그의 몸을 묶어버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러커들이 이때다 싶어 서로의 몸을 탑처럼 쌓더니 나무로 만든 바리게이트를 넘어트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수많은 러커들이 기사단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단장은 용맹하였다. 바로 그때 번쩍하는 빛이 일더니 심판자의 십자가가 떨어지며 단장을 잡고 있던 러커들을 처리하였다. 울프릭이 심판자의 검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힘이 빠진 울프릭은 더 이상 검을 들어 올리지 못하였다. 너무 많은 전투와 제대로 자지 못해서 온 피로가 쌓여버린 것이다. 렌더와 이차원이 울프릭을 잡아채 도망가려는 때였다.
어느샌가 기사단장이 울프릭에게 달려드는 러커들을 모두 처리해주었다.
[EXP가 80000 상승하였습니다. 10 레벨이 되었습니다.
스킬이 강화됩니다. 복사LV2 달성 이제 당신은 X6까지 아이템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러커를 처리하자마자 뜨는 안내창이었다.
‘하... 다행히 가능성이 보이는 듯하네.’
새롭게 강화된 스킬에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거 같은 생각에 만족하는데 기사단장이 울프릭에게 소리친다.
-이봐!
울프릭이 뭐냐는 듯 쳐다보는데 기사단장 손이 덜덜 떨린다.
-심판자의 검...
그리고 기사단장의 말을 들은 다른 기사들도 모두 울프릭 주위로 몰려들어 검을 구경했다.
-이거 진짜 심판자의 검이잖아?
-만져봐도 될까요?
기사들은 러커 떼를 싸울 때와 다르게 눈에 활기가 가득하다. 하긴, 이게 당연한 반응이다. 울프릭과 이차원이 들고 있는 빛의 심판자의 검 같은 경우 현실뿐만 아니라 게임 속 모든 기사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보물 중 하나였으니까.
울프릭이 귀찮다는 듯 그들을 밀쳐내고 나머지 러커들을 처리하려는데 이차원이 말린다.
“나머진 내가 처리할게.”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울프릭을 뒤로하고 [제우스] 스킬로 태풍을 일으켰다.
덕분에 러커가 더는 마을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주변 나무를 무너뜨려 서쪽 숲으로 가는 길목을 아예 차단해주었다.
-다... 당신들은 대체...
기사단장이 완전 얼빠진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